한때 직무만족도 1위라는 이름으로 큐레이터(기획자)가 회자된 적이 있다. 많은 이가 선망하는 직업이지만, 현실의 큐레이터는 여러모로 환상에 가까운 베일에 가려져 있다.
큐레이터는 전통적으로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자료 및 소장품을 관리·연구하던 관리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소장품 전시보다 기획전시가 활발해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시 기획력이 강조된 큐레이터의 역할이 점차 부각됐다. 이제 작가를 선정해 작품을 전시장에 걸고 판매로 마무리되는 전시의 시대를 벗어나, 기획자 각자의 연구를 기반으로 이미지를 공간에 안착시키는 기획력의 유무가 전시의 화두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발맞춰 매년 수많은 미술 전시들이 큐레이터들의 제안으로 기획되지만, 대부분 전시 참여 작가들의 이름만큼 기획자의 이름을 접하기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에 작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대적·일상적·미학적 현상을 분석하고, 그 결과(또는 가설)를 작가와 관객에게 미술적 비전으로 제시하는 기획자들을 주목하는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이번 기획은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40세 미만 젊은 큐레이터를 만나고, 기획자들의 미학적 비전과 비평적 관점 그리고 당면한 현실의 고민과 과제를 묻는다. 특히 다원예술, 도시, 텍스트, 디자인 등 자신만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활약하는 동시대 큐레이터들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이들이 형성하는 현대미술의 맥락과 추이를 짐작해보려는 시도이다.
그 첫 번째로 퍼포먼스 아트를 중심으로 다양한 전시·프로젝트를 기획해온 김해주 독립큐레이터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 시각 예술가들의 영상과 퍼포먼스를 한 자리에서 선보이는 프로젝트 ‘무빙/이미지’를 기획했다.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린 이 프로젝트는 영상이 상영되는 1층 블랙박스와 퍼포먼스가 공연되는 위층의 박스 극장에서 작가 3명의 영상 4편과 퍼포먼스 3편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김해주 독립큐레이터 “기획의 이유? 좋아하는 작업을 계속 보고 싶어서”
- 큐레이터가 된 계기가 궁금하다.
“대학에서 프랑스문화학과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당시에도 소설을 읽고 전시나 영화, 공연 보는 걸 즐겼다. 마침 2002년 아트선재에서 프랑스 작가의 작품 제작을 돕게 됐다. 작가가 어떻게 작업하는지를 가까이서 보고 제작에 직접 참여하고 전시를 만든 그때의 경험이 미술에 대한 애정을 샘솟게 했다.”
- 같은 큐레이터이지만, 상업화랑의 큐레이터와 미술관의 학예사, 독립큐레이터 등의 소속 기관 여부에 따라 일의 성격도 다를 것 같다. 독립큐레이터로서 업무의 범위와 성격을 설명해 달라.
“독립큐레이터로서 기관과 협업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스스로 전시 지원금을 찾아 활동할 때의 프로젝트는 성격이 다르다. 작업의 자유로움도 있지만, 기금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다음해, 다음 전시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기금이 결정된 뒤에 계획이 안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별 프로젝트에서 (큐레이터의) 제일 중요한 역할은 작가들을 서포트하며, 작업이 잘 구현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큐레이터에게 기획이란?
“기획이란 프레임을 설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프레임이 얼마나 타당한가를 가장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프레임이 초대하는 작가와 작품들의 궤와 맞는지 고민한다. 판단이기도 하고 윤리이기도 하다. 작가도 마찬가지로 본인 혹은 본인의 작업이 그 프레임과 맞춰졌을 때 유의미할지 판단한다. 기획 자체나 기획하는 공간이 주체가 될 수도 있어 프레임은 다양하다. 기획 제안에 있어서는 글 또는 말로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 퍼포먼스 관련 전시 및 공연을 많이 기획했다, 어떻게 퍼포먼스에 관심 갖게 됐는지 궁금하다.
“늘 퍼포먼스나 영상처럼 시간을 다루는 매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처음 미술 전시를 접했을 때도 영상 작품을 좋아했다. 시간 안에서 움직임을 읽거나 이야기를 찾는 것, 비틀어진 이야기의 방식을 읽어 내고 분석하는 게 재미있다. 특히 시각예술 작가들의 퍼포먼스는 기존의 연극과 달리, 시간 안에 이미지를 쌓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되는 특징이 있다.
2008년 프랑스 유학 도중 한국 백남준아트센터 개관 기념 백남준 페스티벌 ‘나우 점프’의 퍼포먼스 프로그램 담당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일했다. 당시 미술관 안에서 할 수 있는 온갖 형태의 퍼포먼스들을 실험하며, 3개월 동안 주말마다 새로운 퍼포먼스 공연을 진행했다. 일종의 트레이닝을 받은 셈이었다.
당시 다양한 배경의 작가들과 일하며 실무적인 경험을 쌓았지만, 그전까지 내가 무언가를 기획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큐레이팅에 정답은 없지만, 나는 기획을 스스로 질문을 갖고, 그 질문을 해결하고 노력하며 구현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퍼포먼스나 영상이란 매체를 좋아하는 건 매체에 대한 관심이지 질문이 아니다. 백남준 페스티벌 운영과 국립극단 그리고 퍼포먼스 아카이브 연구 경험을 시작으로하나씩 질문이 생겨났다. 하나의 전시를 해보고 나니 그 다음 전시가 연쇄반응처럼 가능해졌다. 내게 기획은 이미 갖고 있는 여러 아이템들을 하나씩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1차 단계를 넘으면 비로소 새롭게 연결되는 다음 질문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 다원예술을 빼놓고 퍼포먼스를 말하긴 힘들다. 다른 장르에 편입되기 힘든 지점의 예술이 다원예술로 묶였고, 그 중 하나가 퍼포먼스다. 다원예술 지원이 줄어든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서울문화재단에는 다원예술 지원분야가 아직 남아있지만,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다원예술 지원사업이 작년부터 사라졌다. 아무래도 아르코에 다원예술로 지원하던 작가들이 연극이나 전시 분야로 이동하게 됐다.
개인적으로 다원예술이란 말이 유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다원예술 지원제도가 사라진 건 아쉽다. (낯섦이 현대예술을 갱신해나가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낯설어도 장르에서 벗어난 걸로 바라보는 기존 장르의 보수적인 시선 때문에 지원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고, 그래서 다원예술 분야가 따로 생겨난 것으로 안다. 각 장르가 조금씩 갱신되고 현대적인 시선으로 변한다면 충분히 포괄될 수 있는 작업들이지만 (다원예술은) 여전히 갈 곳이 없다. 기존의 장르적 구분을 벗어나 다른 시도를 하는 작업들을 수용할 수 있다면 다원예술이란 말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아직은 다원예술 지원제도가 사라진 게 아쉽다. 퍼포먼스는 서로 다른 장르들과 가장 많이 중첩되는 동시에 가장 소외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 2016년 내부 사정으로 중단된 ‘페스티벌 봄’과 작년 말 진행된 일시적인 퍼포먼스 축제 ‘퍼폼2016’을 통해 퍼포먼스 자체를 보여주는 무대가 많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일종의 사명감도 퍼포먼스 전시를 기획하는 데 작용하는지 궁금하다.
“시각예술가들 중 퍼포먼스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과연 그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없다. 극장적인 시도를 하려는 작가들이 프로덕션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 그런 고민에서 작년 ‘무빙/이미지’전을 기획했다. 극장과 전시공간을 같이 병치했을 때 무엇이 다르게 보이는지, 한 층을 경계로 영상작업과 퍼포먼스를 함께 볼 수 있는 경험을 만들고 싶었다. 특히 신체의 움직임 등 퍼포먼스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그것이 기획의 가장 큰 원동력인가?
“플랫폼의 필요성은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됐다면, 기획 자체를 하게 된 원동력은 작업이 재미있어서이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작가의 원동력이 자신 안의 이미지를 밖으로 구현해내는 것이라면, 기획자의 원동력은 누군가가 내면을 시각화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 아닐까. 그게 내 눈앞에서 실현되고, 밖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여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어떤 맥락을 이뤄내는 것이 기획의 즐거움이다."
- 김해주에게 ‘큐레이터’란 무엇인가?
“클레어 비숍의 ‘큐레이터란 무엇인가?’라는 글에는 큐레이터의 역할을 영화감독, 문학편집자, 돌보는 사람, 정신분석학자, 중매자 등으로 표현하는 여러 구절이 있다. 나 역시 이 모든 표현에 수긍하면서 또 그 중 어느 하나로만 완전히 정의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큐레이터의 역할은 작가와 작품, 제도, 공간, 시간 그리고 현재의 필요 사이에서 매번 자신의 포지션과 역할을 찾고 또 만들어가는 일이다.”
- 이상적인 큐레이팅이란?
“가장 이상적인 큐레이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최근 기획인) ‘무빙/이미지’의 영감을 준 ‘플레이그라운드 페스티벌’을 말할 수 있다. 벨기에의 중소도시 루벤의 미술관과 공연장을 함께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작은 규모의 기관이지만 꾸준히 퍼포먼스에 주목하고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이다.”
- 큐레이터를 꿈꾸는 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글을 쓰라고 말하고 싶다.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것이 기획의 시작이다. 기획안을 쓰는 건 제안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생각이 글로 물질화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아이디어를 작업화하는 것처럼, 기획자는 생각을 글로 물질화한다고 느낀다. 그걸 바탕으로 작가에게 기획을 제안할 수 있고, 또 기획의 많은 부분에서 글쓰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 글을 계속 쓰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결정적 순간들'(2014) 전시 전경. (사진제공=김해주)
김해주 큐레이터는…
‘무빙/이미지’(문래예술공장, 2016) ‘안무사회’(백남준아트센터, 2015) ‘결정적 순간들: 공간사랑, 아카이브, 퍼포먼스’(국립현대무용단·아르코예술자료원, 2014) ‘메모리얼 파크’(팔레드도쿄, 2013) 등의 전시 및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