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전시: 최웅택 ‘이도다완’전] 오래된 찻사발에서 발견하는 반복되는 삶의 변주
▲자연의 색과 모양을 한 최웅택 도예가의 다완.(사진=공근혜 갤러리)
시위 인파가 들썩거리던 청와대로 들어서는 길 입구엔 한복을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골목골목 눈에 띄었다. 이제는 꽤 따뜻해져 한낮에는 열기까지 느껴지는 볕과 함께 가로수의 나무들은 속없이 움을 틔우려 준비하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 청와대 입구에 다다르니 인적이 드물어진다. 하지만 흐르는 공기가 바쁜 봄이라 그런지 그 한산함이 적막하고 쓸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청와대 춘추관 바로 옆에 자리한 공근혜 갤러리는 널찍한 전시공간이 도자기로 채워졌다. 소박한 빛깔의 그릇, 항아리, 꽃병 등이 지나오면서 봤던 겨울을 지내고 봄 햇살을 받고 있는 나무, 그 밑의 겉면이 살짝 건조해진 흙이 주는 정서와 어우러져 보인다. ‘이도다완’을 계승하고 있는 도예가 최웅택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말림 현상과 물레질의 손맛이 살아있는 이도다완.(사진=공근혜 갤러리)
이도다완: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의 그릇
이도다완의 유래는 그 설이 분분하다. 완벽하지 않은 형태에서 비롯한 서민들이 쓰던 막사발이었는데 일본인들이 찻사발로 이용했다는 설부터, 제기였을 거라는 설, 스님들의 공양그릇인 발우에서 비롯됐다는 설까지. 현재도 그 역사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차 문화가 발달한 일본의 차인(茶人)들이 찻사발로서 조선의 이 그릇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최 도예가는 세종의 삼포개항 때 유입된 일본의 차인들이 찻사발을 조선 남쪽 지역의 도공들에게 주문했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납치된 조선의 도공들로부터 발전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조선의 기술력을 기반으로 발전된 일본 도자기에 대해 현대의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얇고 정교한 형태와 화려한 유약의 색채에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간 조선의 도자기 중에서도 일본은 이도다완을 국보로 지정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과 고르게 퍼지지 않은 유약 등 정교함과는 거리가 먼 그 찻사발에서 그들이 발견한 미감은 무엇일까.
▲말차의 초록색과 비파색이 잘 어울린다.(사진=공근혜갤러리)
고요한 자연의 색
최 도예가는 본인이 만든 그릇에 찻가루를 넣고 차선(솔)으로 빠르게 휘휘 저어 거품을 만들어 말차를 타 줬다. 두 손에 감기듯 잡힌 그릇은 유약의 유리질이 매끈하게 덮이지 않아 오히려 포근하고 크기에 비해 상당히 가볍게 느껴졌다. 유약이 가마 안에서 흘러내려 굽(다리)부근에 말림(응결)현상이 생기는 것은 이도다완의 특징이다. 말림 현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유약을 시유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피부(도자기의 겉면)가 매화고목의 껍질과 닮아 매화피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가마의 불과 유약과 흙의 화학적 반응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라 매번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완의 가벼움과 그것의 매력을 결정하는 겉면에 일어난 유약의 효과 등은 그것을 이루는 흙의 성질에 달려있다. 이도다완의 피부에선 유약과 흙의 색감이 어우러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파색이라고 불리며 자연의 색감을 그대로 유지한다. 최 도예가가 사용하는 흙은 경남 진해의 웅천에서 나는 삼백토다. 그리고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이도다완이 바로 웅천의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도다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약말림 현상을 매화피라 부른다.(사진=김연수)
웅천다완의 명맥을 잇다
그는 웅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임진왜란 때 도공들을 모조리 빼앗겨 주인을 잃은 웅천의 가마터에는 도굴꾼들이 끊이지 않았고, 도예가가 어린 시절에도 도굴은 빈번했다. 일본으로 간 이도다완은 약 200여 개 정도라고 전해진다. 그는 가마터에서 도편(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수집해 혼자서 이도다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직접 웅천의 흙과 장석(유약의 유리질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을 캐고 빗물을 받아 수비(흙의 잡물을 없애는 일)를 한다. 임진왜란 이후 사용한 적이 없던 가마에 인근의 산에서 해온 장작으로 첫 불을 댕겨 수십 년간 연구를 지속했다.
납치된 도공들은 일본에서 현재까지 14대째 도자기의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흙을 쓸 수는 없기에 이도다완의 명맥은 이을 수 없었다. 우리의 것이 도둑맞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목격한 도예가의 안타까움은 당연한 것이다. 그는 일본인들이 먼저 발견한 우리 고유의 미감을 재현하면서도 일본이 뺏어간 조선시대의 다완을 도로 구입해 가져오고 있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그렇게 되찾은 조선의 다완도 함께 선보인다. 그의 작품을 100만~3000만 원에 선보이는 한편, 조선시대의 다완은 억대를 훌쩍 넘긴단다.
▲유약이 손의 흔적을 따라 흐른 흔적이 자연스럽다.(사진=공근혜 갤러리)
이도다완의 재현은 자연스런 삶의 재현
이도다완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완벽해보이지 않은 생김새에 있을 것이다. 흔히 물레작업을 물아일체의 상태로 표현하곤 한다. 돌아가는 물레 위에서 흙덩어리의 균형을 잡는 일은 만드는 사람의 의지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흙의 물성을 이해하고 순응할 때 가능해진다. 그 일은 인체의 상반만 사용해도 되는 현대의 전기 물레보다 온 몸을 사용하는 전통 방식의 발 물레를 사용할 때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최 도예가는 “흙에 정신이 들어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이 있다”고 표현한다. 이도다완의 표면에 생기는 물결과 자연스러운 비대칭의 형태는 발물레를 사용하기에 나올 수 있는 형태기도 하지만, 매끈하고 균일한 두께의 형상을 만들 수 있게 된 다음으로 무심하게 만들어도 멋이 나는 경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창작의 결과가 아니다. 재현이 돼야 그것을 바탕으로 창작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최 도예가의 작품은 자연을 이해하고 순응하며 살아온 결과처럼 보인다. 그것은 반복되는 시간의 결과이며 평범한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그의 손끝은 그런 오랜 시간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발견할 수 있는 이도다완의 매력이라면 의식하지 않은 채 담아낸 우리 삶의 모습 같다는 것이다. 어느 것도 같은 모양이 없으며,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있는 다완들은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소박한 우리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은 변화의 모습이기도 하다. 전시는 4월 23일까지.
▲굳은살이 박이고 갈라진 최웅택 도예가의 손끝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다.(사진=김연수)
김연수 breezeme@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