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머니] 월가 황소상 vs 소녀상 대결의 아트'쩐'쟁
여성 자부심 북돋은 소녀상은 절묘 마케팅?
▲월 스트리트 증권가의 상징이던 '돌진하는 황소상'과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된 '두려움 없는 소녀상'. (사진 = Noel Y. Calingasan. NYC♥NYC @ flickr.com)
세계 금융의 중심지, 미국 뉴욕 시 맨해튼 남부의 월 스트리트에서 황소와 소녀의 한판 승부가 펼쳐지고 있다. 소녀 투우사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미술 작품을 통해 표출되는 문화 마케팅 이야기다. 1989년부터 월 스트리트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동상인 ‘돌진하는 황소(Charging Bull)’와 지난 3월 이 황소와 마주보고 세워진 동상 ‘두려움 없는 소녀’ 간에 저작권 침해를 둘러싼 소송전이 벌어질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 화제다.
지난 4월 11일(현지 시각) AP통신은 ‘돌진하는 황소상’(이하 황소상)을 만든 이탈리아 조각가 아르투로 디 모디카의 변호사 노먼 시겔이 현재 황소상과 마주본 자리에 설치된 ‘두려움 없는 소녀상’(이하 소녀상)의 철거를 내년 2월까지 미루도록 배려한 뉴욕 시에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젠더 다양성에 관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두려움 없는 소녀'가 뉴욕 시의 새로운 명물로 각광받고 있다. (사진 = @brendanbabb 트위터)
"많은 이들에게 귀감 되니 영구 설치해야"
조각가 크리스틴 비스발이 만든 이 소녀상은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전날 새벽에 설치됐다. 두 다리를 벌린 채 당당히 서서,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돌진해 오려는 황소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 소녀상은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SSGA: State Street Global Advisor)'라는 투자자문회사가 여성의 날을 맞이해 월 스트리트의 젠더 다양성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아 비스발에게 의뢰해 만든 것이며, 당초 4주간 황소상 앞에 전시된 뒤 4월 2일에 철거될 예정이었다.
소녀는 단숨에 유명인사(?)가 됐다. 황소상의 인기를 꺾고 월 스트리트를 찾는 관광객들의 핫 포토존이 됐다. 4월 21일 현재 인스타그램에는 #fearlessgirl 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소녀상 사진이 1만 8555건이나 올라와 있는데, 이 중 절반 가까이가 소녀상이 설치된 지 이틀 만에 올라온 것이다.
할리우드의 대세 배우 제시카 채스테인은 8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이 동상을 영구 보전하자!!!!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세상의 반은 여자다”라고 찬사를 보냈고,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뉴욕 시의 빌 드 블라지오 시장도 트위터에 “우리의 미래는 두려움 없는 소녀들에게 달려있다”는 글을 올리며 소녀상을 옹호했다. 레티샤 제임스 뉴욕시 공익 변호사는 소녀상의 영구 설치를 위한 청원 운동을 시작했고, 캐롤린 멀로니 미 연방 하원의원과 게일 브루어 맨해튼 보로(Manhattan Borough) 청장 등 정치인들도 이와 비슷한 캠페인에 나섰다. 미국의 청원 사이트인 change.org에는 소녀상의 영구 설치를 청원하는 지지자가 2만 8천 명 이상 모였다.
뉴욕 시는 이런 성원에 호응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3월 27일(현지 시각) USA투데이는 드 블라지오 뉴욕 시장이 “두려움 없는 소녀상을 2018년 2월까지 그대로 두기로 했다”고 발표했다고 전했다. 드 블라지오 시장은 “이 예술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며 “여성 리더십에 관해 영향력 있는 대화도 이끌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 소녀상은 임시 설치 허가 기간이 끝난 뒤에도 스스로를 주장하며 보다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소녀에 어울리는 조치”라고 전했다.
소녀상의 영구 설치를 원하는 사람들은 뉴욕 시의 설치기간 1년 연장 결정을 일단 환영했다. 하지만 레티샤 제임스 변호사는 “여성들에게 ‘꿈은 클수록 좋고, 천장은 높을수록 좋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이 소녀상이 영구적으로 설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구 설치 캠페인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뉴욕 시의 이런 결정에 모두가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소녀상에 비판적인 이들도 존재하며, 비판의 목소리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여성 리더십의 중요성에 관한 소녀상의 메시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한심한 입장도 물론 있지만, CNB저널은 이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두 가지 비판적 입장에 대해서만 소개한다.
▲소녀상의 메시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영구 설치를 청원하는 캠페인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사진 = 페이스북 @FearlessGirlStatue 페이지)
황소상의 본래 의도가 훼손된 건 어쩌고?
소녀상 때문에 마음이 가장 불편한 인물은 다름 아닌 황소상의 작가인 디 모디카다. 그는 소녀상에 의한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조각가인 디 모디카가 황소상을 만든 것은 1987년 증시 폭락 직후다. 그는 당시 소호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증시 폭락으로 어두워진 사회를 보며 예술가로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는 증시 강세장을 뜻하는 ‘불 마켓’에서 힌트를 얻어 황소상을 만들기로 하고, 2년간 36만 달러를 들여 3.5톤이나 되는 황소상을 완성시켰다.
디 모디카는 이 황소상이 2년 전 증시 폭락의 위기를 견뎌낸 미국인의 힘과 용기를 상징한다고 밝히며 1989년 12월 15일 한 밤중에 트럭을 이용해 뉴욕 증권거래소 앞의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몰래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뉴욕 시는 이 게릴라 아트를 허가 없는 설치물로 판단하고 그날 오후에 바로 철거했다.
하지만, 언론과 시민들의 반발이 거셌다. 당시 언론과 뉴욕 시민들은 지금 소녀상에 보내고 있는 것과 같은 열렬한 지지를 황소상에게 보냈던 것이다. 뉴욕 시는 이러한 청원을 받아들여 황소상을 현재 위치인 볼링 그린 파크로 옮겨놓았고, 그 자리에 영구적으로 머물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조치란 뉴욕 시 공원국이 작가 디 모디카로부터 황소상을 영구 대여한 것이다.
황소상은 곧 월 스트리트의 상징이 되었고, 증권업의 상징이 되었다. 디 모디카는 2010년 상하이에도 황소상을 만들어준 바 있다. 우리나라의 증권가인 여의도에도 지난해까지 세 마리의 황소상이 있었다. 현재 여의도에는 한국거래소와 한국금융투자협회 앞에 황소상이 설치되어 있다. 대신증권의 황소상은 지난해 본사의 명동 이전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이 황소상은 1994년 양재봉 대신증권 창업자가 세운 것으로, 작가는 김행신 전남대 교수다.
황소가 주식시장의 상승 국면을 의미하는 이유는 황소가 싸울 때는 뿔을 위로 치켜 올리면서 싸우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식시장의 하락 국면은 앞발을 내리치며 싸우는 곰의 모습에 빗대 ‘베어 마켓’이라고 부른다. 디 모디카는 이러한 증권가의 용어를 이용해 주식 시장의 부활을 바라는 마음을 황소상에 담았을 뿐이고, 사람들이 30년 가까이 황소상을 아껴온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10년에 중국 상하이의 HSBC 앞에 설치된 아르투로 디 모디카의 황소상. (사진 = 위키피디아)
그런데 올해 3월, 마주보는 자리에 소녀상이 세워지게 되면서 황소상은 모디카가 원치 않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두 동상이 마주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전에 없었던 대립 관계를 상상하게 되었고, 그 관계에서 소녀상이 영웅이 된다는 것은 곧 황소가 젠더 다양성을 위협하는 악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디 모디카가 황소상을 만들 때는 그런 대립 관계도, 젠더 다양성에 대한 고민도, 악당 역할도 의도한 적이 없다. 디 모디카는 “‘두려움 없는 소녀상’이 내 황소를 남성 쇼비니즘의 상징으로 변질시켰다”며 “갑자기 앞을 가로막고 나서 ‘자, 이제 어쩔 거냐’고 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소녀상이 작가의 허가도 받지 않고 황소상의 메시지를 훼손하는 저작권 침해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며, 뉴욕 시가 이를 방조하고 있는 셈이다.
디 모디카의 변호사인 노먼 시겔은 “황소상이 갑자기 공포와 권력, 옳은 일에 반대하는 세력을 상징하게 된 것은 참으로 황당한 일”이라고 밝혔다. 시겔 변호사는 뉴욕시가 어떤 절차를 통해 소녀상 설치를 허가하고 진행했는지에 관한 공문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드 블라지오 뉴욕 시장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니콜 젤리나스는 뉴욕 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뉴욕 시장이 모호한 선례를 만들었다”며 “만약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경찰청 앞마당에 흑인을 구타하는 경찰 동상을 세운다면 어떻게 할 셈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뉴욕 시장은 (보편적인) 표현의 자유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소녀상의) 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것만 고려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시 당국은 지금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여성이 "두려움 없는 소녀 말고 두려움 없는 두 소녀들은 어떠냐?"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 @LorenaSGonzalez 트위터)
소녀상은 정교하게 기획된 광고물에 불과해
소녀상에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는 소녀상이 순수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SSGA의 광고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소녀상은 SSGA라는 회사가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SSGA의 로리 헤이넬 고문은 기업들이 더 많은 여성에게 주요 직책을 가질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촉구하려는 것이 제작 의도라며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이끌어줄 두려움 없고 결연한 의지의 소녀를 얻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의도는 소녀상 발 아래의 명판에 새겨진 “여성들의 리더십이 가진 힘을 알아보라. 여성은 변화를 만든다 (Know the power of women in leadership. SHE makes a difference)”라는 문구에도 담겨 있다.
그러나 이것은 SSGA가 최근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성별 다양성 상장지수 펀드(ETF)’에 대한 광고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 펀드는 뉴욕 증시에 상장되어 있는 기업 중에서, 이사회에 여성 비율이 30% 이상인 회사에만 투자한다는 원칙으로 운영하는 펀드다. SSGA는 이사회에 여성 비율이 높고 여성의 의견이 기업 운영에 잘 반영되는 기업이 수익률도 좋다는 다양한 연구 결과를 내세워 이 펀드를 운영하고 있다.
SSGA는 “기업 이사회에 남녀 불평등은 여전하다”며 동상이 성인 여성이 아닌 미숙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미국의 대기업은 여성이 이사회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포춘 지 선정 500대 기업 이사회의 여성은 21%에 불과하며, 주식 시장의 98%를 차지하는 러셀 3000 지수에 포함된 기업들은 이사회에 여성이 한 명도 없는 기업이 전체의 4분의 1이나 된다.
그런데 비판론자들은 SSGA가 더 많은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 이들 중소기업들이 이사회의 여성 구성원 비율을 늘이도록 촉구하려는 것이 소녀상의 제작 의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소녀상의 메시지가 오랫동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미국 사회의 젠더 다양성을 높이는 데 일조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SSGA의 펀드의 인기를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SSGA도 이사회가 11명의 이사 중 3명만 여성으로 구성되어, 비율이 27%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SSGA의 PR 담당자 앤 맥넬리는 “3명이나 27%는 0보다 나은 것 아니냐”고 반박한 바 있다.
‘크레인스 뉴욕 비즈니스’ 지는 사설을 통해 “두려움없는 소녀는 광고에 불과하다”며 “스테이트 스트리트(SSGA)는 광고를 하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전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인 에밀리 펙은 허핑턴 포스트에 낸 칼럼을 통해 “소녀상을 보면서 드는 감정에 속지 말라”며 “이 사랑스럽고 거부할 수 없는 작은 소녀는 단지 매우 정교한 페미니스트 마케팅 수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윤지원 yune.jiw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