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술은 자유롭고도 어렵게 느껴지는 장르다. 챕터투는 추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유로워보일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보임이라는 행위’ 아래 구속됨을 짚는다. 결국 완성된 작품은 공간, 빛 등에 영향을 받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조형 의지, 즉 작가의 관찰과 감정의 발현은 무엇보다 사적이고 자유로운 영역임도 짚는다. 조형 의지는 작가의 성장 환경, 문화, 국적 등 사회적 요소와 성, 신체적 특질, 기질, 취향 등 생물학적 요소 간의 결합 가운데에서 발아되고 배양되는데, 이를 통해 개별성이 형성되고 특정 소재 혹은 주제와의 애착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 그래서 추상미술은 오묘하고 또 매력적이다.
챕터투가 추상미술에 주목하는 ‘우리시대의 추상’전을 연다. 전시엔 오택관, 장재철, 최선, 추숙화, 황수연 다섯 작가가 참여한다. 챕터투 측은 “동시대(Contemporary)라는 시간적-공간적 정의는 유사한 사회적 요소를 경험하고 공유한다는 전제를 내포한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서 새로운 미술사조가 출현하고 새로운 양식이 소멸하거나 안정화 단계에 접어드는 현상은 이를 지지한다”며 “이번 전시는 이런 이론적 토대 하에 동시대 한국 추상의 흐름을 신진작가 및 비주류 작가들의 시선을 빌어 조명해 보고자하는 취지로 기획됐다”고 밝혔다.
오택관의 추상작품은 기법상 통제된 즉흥성의 발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페인팅, 드립핑, 테이핑 방식을 혼용하며 분할된 화면의 한 면, 한 면을 장악해 나가는 작가의 작업 방식은 특정한 사전 계획의 범주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미 구현된 기학학적 이미지를 좌표로 삼아 뒤따르는 이미지에 형태와 DNA를 부여한다.
장재철의 캔버스 부조 작업은 일견 정밀한 산업 공정을 통해 생산된 제품과 유사한 형태의 외형을 지닌다. 여기에 작가 자신이 직접 연마한 기술을 바탕으로 유기적 형태의 입체감을 지닌 캔버스를 가공하고 그 위에 반복적으로 도료를 도포해 매끄러운 표면을 지닌 기하학적 형태의 결과물이 탄생한다. 대칭적인 형태의 작품은 안정감과 균형감을 줌과 동시에 운동성이 내포됐음을 암시해 묘한 긴장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최선의 검은그림(2015)은 폐유를 균질하게 캔버스 표면에 발라 완성한 작품이다. 폐유라는 비예술적 재료는 상업적인 가치가 소멸됐고, 재생의 가능성이 차단돼 있으며, 본원적으로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으로 구성된, 일종의 무(無)의 단계에 머무는 물질이다. 시각적으로 동일한 외향을 띠지만 이질적 재료를 사용해 회화의 기법적 하부구조를 비트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숭고, 개념, 초월 등 전통적으로 색면 회화에 부여된 다양한 수식적 지위들을 경계선으로 한껏 밀어내려는 시도를 한다.
추숙화는 단색조의 하드에 기계적인 패턴이 이입된 작품을 선보인다. 화면 위 균등한 사선은 캔버스에 일종의 규율과 긴장, 단정함을 부여한다. 반복되는 큐빅 형태의 이미지는 작가가 정한 패턴에 따라 이진법의 도식으로 채워지거나 비워진 채로 남겨져 있다. 돌출된 부분에 칠해진 유광 아크릴은 일관되게 단색으로 표현된 표면에 생동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빛과 반응해 다양한 추측을 가능케 하는 이미지를 드러나게 한다.
황수연의 작품은 ‘남겨진 것의 미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상이한 물성을 지닌 물질들이 반복적인 마찰 등을 통해 부서지거나 얇게 펴 발라지고, 혹은 뭉게지는 과정을 거쳐 종국적으로 발현되는 양태들, 즉 조각 및 회화 등 미술의 표현적 특성과 유사성을 가진 변형된 형태들의 구현이 핵심이다. 작가의 반복된 노동이 집약된 물질은 기본적인 물성은 지닌 채, 본연의 형태가 분해되고 의도된 큰 틀 안에서 부분적인 즉흥성을 지닌 하나의 군집된 형태를 띤다. 전시는 챕터투에서 5월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