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2호 김금영⁄ 2017.09.08 10:37:24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들판의 나무 뒤 거대한 캔버스를 배경으로 설치한 뒤 이를 찍은 ‘나무 연작(Tree Series)’으로 알려진 이명호 작가. 그런데 이번에는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전시장에 끌어 들여왔다. 사진을 찍는 카메라와 나무 뒤에 설치되는 흰 캔버스까지 전시장에 들어섰다.
사비나미술관이 이명호 작가의 개인전 ‘까만 방, 하얀 방 그리고 그 사이 혹은 그 너머’를 9월 29일까지 연다. 작가가 말하는 까만 방, 하얀 방 그리고 그 사이 공간은 뭘까?
이를 알기 위해 먼저 작가의 작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우리가 익숙하게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주요 주제로 작업해 왔다. ‘나무 연작’ 시리즈의 경우 평범했던 나무가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그냥 평범하게 서 있는 나무는 흔히들 지나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뒤에 흰 캔버스를 세우는 순간, 나무는 캔버스 틀 안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로 탈바꿈한다. 또한 큰 캔버스로 나무에 더욱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이 광경을 찍어 전시장에 전시하면 그것은 기존의 나무와는 다른, 작품의 오브제로서 기능한다. 이처럼 대상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과정을 작가는 작업으로 보여줬다.
까만 방과 하얀 방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 그리고 이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을 기반으로 꾸려진 개념이다. 먼저 까만 방은 전시장 지하 1층에 만들어졌다. 사막의 풍경을 담은 ‘신기루(Mirage)’ 작업이 설치됐다. 작가는 이를 ‘재연(再演)’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이 재연은 미학 또는 철학적 개념에서 설명하는 재연과는 뜻이 다르다는 설명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개념에서 이 용어를 자신의 작업에 사용한다고.
“신기루 작업은 아무 것도 없는 사막에서 이뤄진 작업이에요. 모래밖에 없는 광활한 공간에 캔버스를 설치했죠. 바닥에 큰 캔버스를 깔고 멀리서 이를 보면 캔버스에 빛이 반사돼 반짝 빛이 나 마치 오아시스처럼 보여요.”
실제 작가가 마주했던 현실의 사막에서는 오아시스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찍은 사진에서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를 발견한다. 즉 작가는 현실을 찍었지만, 화면에는 비현실 세계가 재연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사실과 진실을 바라보는 두 시선을 깨달았다. 우리는 ‘사실’을 보고 있다고 믿지만,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이 재연 작업을 담은 까만 방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믿고, 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현실을 반전시켜 보여주는 ‘까만 방’과 그대로 보여주는 ‘하얀 방’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교집합인 ‘회색 방’
그리고 작가는 이 까만 방을 카메라의 원리에도 맞춰 이야기한다. 그는 까만 방을 ‘카메라 옵스큐라’로도 설명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한다. 하지만 단순히 뜻만 맞춘 건 아니다. 캄캄한 방 한 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을 통과시키면 반대쪽 벽에 외부의 풍경이 거꾸로 나타나는 것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다. 그리고 이건 작가의 재연 작업과도 맞닿는다. 사실과는 180도 다른, 뒤집어진 진실의 풍경이 저 너머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층 전시장은 ‘나무 연작’의 개념을 담은 하얀 방이 꾸려졌다. 작가는 이 방을 ‘재현(再現)’의 방이라 설명했다. 재연의 까만 방이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릴 수 있는 시선을 제시했다면, 하얀 방의 재현은 ‘있는 그대로를 다시 들춰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이야기다. ‘나무 연작’은 나무 뒤에 캔버스를 설치해 나무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 현실을 오롯이 기록하고, 대상을 다시 보게 하는 효과다. 까만 방과 달리 진실은 보지 못할지라도 사실만은 명확히 볼 수 있다.
까만 방이 카메라 옵스큐라로 이야기됐다면 하얀 방은 ‘카메라 루시다’의 원리를 품었다. 카메라 루시다는 거울 또는 현미경을 이용해 물체의 상을 종이, 화판 등 위에 비춰주는 장치다. 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비춰 보여주는 작가의 재현 작업과도 맞닿는다.
이 두 공간과 재연과 재현의 개념에 대해 작가는 앞서 4년 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전시에서도 펼친 바 있다. 그런데 그때는 까만 방과 하얀 방만 존재했다. 이번엔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전시명에서도 알 수 있듯 ‘그 사이 혹은 그 너머’가 붙었다. 이 공간은 2층의 하얀 방, 그리고 지하 1층의 까만 방 사이에 자리한 지상 1층에 꾸려졌다. 이름은 회색 방이다.
여기엔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모든 것인 연작(Nothing but Everything Series)’이 설치됐다. 부산 다대포를 배경으로 흰 캔버스 프레임이 설치된 넓은 바닷가 풍경을 촬영한 작품이다.
하얀 방과 까만 방에 전시된 작품들에는 화면 속 도드라지는 존재들이 있었다. 사막에 작가가 만들어낸 오아시스도 그렇고, 흰 캔버스 앞에서 그 형태를 더욱 드러낸 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이 작품엔 그 존재가 부재한다. 작가는 흰 대형 캔버스를 그저 설치만 해놓았다. 그 자연 자체를 기록하는 시도다. 즉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자 생명을 품은 공간으로의 의미, 공백이자 무한대의 공간을 표현한다. 진실과 사실 사이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가장 큰 현실이랄까.
지하부터 지상까지 각 전시장에는 카메라의 원리를 옮겨놓은 대형 설치 작업이 함께 전시됐다. 작가의 화면 속 대형 캔버스도 전시장에 옮겨놓아 관람객들은 캔버스 화면에 들어가 관찰자인 동시에 피사체가 된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도 할 수 있다.
“재연과 재현 그 중간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회색 방은 까만 방(카메라 옵스큐라)과 하얀 방(카메라 루시다)이 상징하는 카메라의 이론적 원리가 교차되는 중간 지점을 상징하죠. 과거엔 주로 완성된 결과물만 전시할 때가 많았는데, 이 방식이 오히려 현실의 재연과 재현 등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리는 건 아닌지 고민했어요. 그래서 결과물뿐이 아닌 작업이 이뤄지는 행위 그 자체를 보여주고자 설치 작업을 함께 선보이기 시작했죠. 앞으로도 꾸준히 이 방식으로 작업을 탐구하고 선보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