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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영국의 배너 깃발과 한국의 촛불

서울시립미술관 ‘불협화음의 기술: 다름과 함께 하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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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54-555-556호 김금영⁄ 2017.09.25 17:56:47

▲밥 앤 로버타 스미스, '예술은 정의에 관한 것입니다, 예술은 메시지를 퍼트립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예술은 삶을 구원합니다, 모든 학교는 예술 학교여야 합니다, 예술은 당신의 인권입니다, 아직 예술이 있습니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예술은 민주주의의 산소입니다'. 합판에 상업용 페인트, 각 30 x 30cm. 2015~2017.(사진=서울시립미술관)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정말 실화냐.” 방송인 김미화가 9월 19일 검찰 조사를 받기 전 꺼낸 한 마디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만든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 세태를 요즘 유행어로 비꼰 것. 요즘 유행어가 “정말 실화냐”라면 지난 한 해는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포함한 국정농단 실태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를 위한 저마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 시점에 서울시립미술관이 ‘불협화음의 기술: 다름과 함께 하기’전을 11월 12일까지 서소문 본관에서 열어 눈길을 끈다. 2017~18 한영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지난 80여 년 동안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온 영국문화원의 소장품 8500여 점에서 약 26점을 선별한 전시다. 전시 기획에 참여한 서울시립미술관의 박가희 큐레이터는 “1938년부터 컬렉션을 시작한 영국문화원은 작가 커리어가 초반인 시기 주로 작품을 구입해 후원해 왔다. 따라서 작가의 초반 작업을 볼 수 있음과 동시에 영국의 전반적인 흐름 또한 작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며 전체적인 특징을 짚었다.


▲그레이슨 페리, '포근한 담요'. 태피스트리, 290 x 800cm. 2014.(사진=그레이슨 페리, 파라곤 컨템포러리 에디션 회사, 런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

이렇게만 보자면 영국문화원의 단순 소장품 전시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전시장에 들어서면, 그리고 전시명인 ‘불협화음의 기술’ ‘다름과 함께 하기’를 다시 돌아보면 이 이야기들이 우리의 광장과도 맞닿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컬렉션 가운데 서울시립미술관과 영국문화원이 이번 전시를 위해 특히 주목한 작품들은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것들이다. 그레이튼브리튼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과 아일랜드섬 북쪽의 북아일랜드까지 4개 국가로 이뤄진 연합왕국인 영국은 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해 왔다. 민족 간 분열 양상을 비롯해 입헌군주제, 지난해 브렉시트 사태 등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일들이 벌어져 왔다.


▲마틴 파의 작품. (왼쪽) '영국 잉글랜드 뉴 브라이튼_마지막 휴양지 시리즈'. C-타입 컬러 프린트, 126 x 147cm. 1983~85. / '영국 잉글랜드 우스터셔 맬번 여학교 딸기차_생계비용 시리즈'. C-타입 컬러 프린트, 126 x 147cm. 1986~89. 영국문화원 소장품.(사진=서울시립미술관)

전시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영국에서 일어난 사회, 정치, 문화적 주요 사건과 활동을 배경으로 한 작가 16명의 작품을 소개한다. 그런데 이 작품들이 주목하는 건 연대기적 구성에 따른 역사적 사실 자체가 아니다. 박 큐레이터는 “전시는 영국 사회의 계층, 민족, 경제, 정치적 분열과 그 경계에 대해 자신만의 언어와 목소리로 개입을 시도하는 예술가들의 태도와 실천을 살피는 데 더욱 집중하도록 구성됐다”고 주안점을 밝혔다.


이유인즉슨 “침묵은 더 무섭다”는 것. 박 큐레이터는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개개인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 더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침묵하거나, 균열을 덮기만 해서는 그 균열을 메울 수 없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무서운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며 “전시는 이렇듯 건강한 사회를 위해 사람들이 내는 이른바 ‘불협화음’에 주목한다”고 설명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 사람들이 내는 ‘불협화음’의 하모니


▲루바이나 히미드의 작품. (왼쪽부터) '1792', '1974', '2015'.(사진=김금영 기자)

하지만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들에 “이것이 옳다” “이것은 틀렸다”고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목소리들을 내는 방식을 보여주고, 들려줄 뿐이다. 박 큐레이터는 “어느 한 이야기만 옳다는 방식은 꼭 피하려 했다. 전시는 사회에 개입하는 다양한 예술 실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를 향해 각자의 고유한 목소리를 낼 것을 요청한다”며 “여기서 중요한 게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이냐가 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담은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전시는 이와 같은 예술 실천이 사회 속에서 각기 다른 발화로 이뤄진 불협화음의 공간을 생성하는 전략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서소문 본관 2, 3층에서 이뤄진다. 2층 전시장은 일반인의 삶을 통해 포착한 영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다.


▲모나 하툼, '로드워크'. 컬러 비디오와 사운드, 6분 45초. 1985. (사진=세인트 갈렌 미술관, 스테판 로너)

한 예로 마틴 파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마틴 파는 영국의 전형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일상 속에서 문화가 어떻게 표현되는지 살피는 작업을 이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지막 휴양지’와 ‘생계비용’ 등을 선보인다. 마지막 휴양지에서는 노동자 계급이, 생계비용에서는 중상위층 계급이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노동자 계급은 작은 공간에 몸을 구깃구깃 집어넣은 채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다. 옷차림 또한 남루하다. 반면 생계비용에서는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우아하게 자연 경관을 즐기며 식사를 하고 있다. 두 작품이 함께 배치되면서 더욱 강렬한 대비 효과를 낳고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빈부격차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한다.


그레이슨 페리는 ‘포근한 담요’로 영국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거대한 태피스트리에 ‘영국 여왕’ ‘피시 앤 칩스’ ‘커리’ ‘좋은 차’ ‘영국의 유명 라디오 드라마 아처스’ 등 영국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상징들을 채워놓았다. 그리고 작가는 이것을 ‘당신을 포장하는 영국의 초상’이라고 묘사한다. 즉 진부하고 편견을 담은 과대 포장된 국가 이미지들을 통해 숨겨진 이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레이첼 맥클린, '사자와 유니콘'. 고화질 비디오, 11분 30초. 2012. 에딘버러 프린트메이커스 커미션, 영국문화원 소장품.(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이밖에 ▲정교하고 화려한 왕실 일가에 대한 해학적인 해석이 돋보이는 마크 윌린저의 ‘로열 애스콧’ ▲북아일랜드의 정치적인 폭력이 극에 달했던 1980년대 중반을 촬영한 폴 그라함의 ‘내분의 땅’ 시리즈 ▲1998~2005년 오랜 기간 조사, 수집한 280여 점의 오브제, 영상, 사진, 인쇄물 등으로 이뤄진 제레미 델러와 알란 케인의 ‘포크 아카이브’도 전시된다.


2층 전시장의 작품들이 현실을 포착해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면, 3층 전시장은 균열 양상의 경계에 선 예술가들이 실제로 그 현장에 뛰어들어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위주로 구성됐다.


모나 하툼의 ‘로드워크’는 1985년 당시 흑인 노동자 계층의 폭동이 빈번했던 런던 브릭스턴에서 선보인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이다. 영상 속에서 작가는 발목에 경찰의 권위와 우파 진영의 폭력성을 은유하는 신발을 맨 채 맨발로 거리를 걸어 다닌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담겼다. 조용하게 그녀를 바라보거나 또는 야유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방인 여성을 향한 당시 영국 사회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광장의 촛불을 보고 작업한 외국인 작가


▲'불협화음의 기술: 다름과 함께 하기' 전시장에 다양한 깃발이 설치됐다.(사진=서울시립미술관, 김상태)

루바이나 히미드의 작품도 볼 수 있다. 회화 작품 ‘1792’ ‘1974’ ‘2015’가 나란히 전시됐다. 모두 정치적인 사건과 인물을 배경으로 삼은 ‘패한 선거’ 시리즈 일부다. 1792는 아이티 노예 해방운동과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운동을 이끈 장군이자 정치가인 투생 루베르튀르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1974는 노동당이 아주 간소한 차이로 보수당을 이기면서 온 나라를 놀라게 한 해로, 이를 마주했던 당시 20살이었던 작가의 초상을 담았다. 2015엔 ‘투표’라고 적힌 단추가 달린 셔츠를 입은 남성이 등장한다. 즉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인물들을 그림에 담아 미래를 위해 행동으로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3층의 또 다른 공간엔 수많은 포스터와 배너 깃발들이 전시됐다. 볼프강 틸만스는 브렉시트와 관련해 국민투표에 참여를 독려했던 ‘포스터 캠페인’ 시리즈를 선보인다. 캠페인을 위한 모든 소스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로 배포하고, 투표를 독려했다. 스스로를 “유럽인이자 정치적 예술가”라고 선언하는 작가는 “영국에 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곧 유럽에 관한 열정을 상징한다”고도 강조한다.


‘슬로건 아트’로 알려진 밥 앤 로버타 스미스는 기성 사회의 규범과 가치에 도전하는 배너, 포스터를 전시한다. 그의 배너를 보면 ‘예술은 당신의 인권입니다’ ‘아직 예술이 있습니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아트는 메시지를 퍼뜨립니다’ 등의 문구가 눈에 띈다. 그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창의력으로 예술과 사회에 발언하기를 독려한다. 이 배너들은 지난해 광장을 뒤덮었던 한국 예술인의 조형물, 포스터 또한 떠올리게 만든다. 즉, 이 공간은 영국 사회에 울려 퍼졌던 또 하나의 광장 예술을 구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에드 홀이 광장의 촛불을 보고 작업한 깃발.(사진=김금영 기자)

이 가운데 특히 전시명 ‘불협화음의 기술: 다름과 함께 하기’와 더불어 ‘이게 나라냐’ ‘자유’ ‘평등’ ‘촛불’ 글씨를 든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깃발이 눈에 띈다. 이는 에드 홀의 작업이다. 박 큐레이터는 “전시는 지난해 4월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전시 준비 과정 중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일이 생겼고, 이 일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전시에도 스며들었다”며 “전시 참여 작가 중 에드 홀이 광장을 보고 새롭게 배너 깃발을 만들었다. 영국 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작업과 더불어 한국 상황도 살피면서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현장들에 주목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밖에 ▲우연히 만난 행인에게 ‘영국은 이 불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물은 뒤 떠오르는 생각을 종이 위에 쓴 작업을 선보이는 질리언 웨이링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캐릭터들로 영상을 구성한 레이첼 맥클린 ▲전 교육부 장관 마이클 고브의 2013년 정책 철회 연설에서 망설이는 목소리를 포착해 아카펠라 곡으로 연출한 칼리 스푸너 ▲영국 이민의 역사를 탐구해 블랙 오디오 필름 콜렉티브를 창설한 존 아캄프라 ▲즉흥적인 슬랩스틱을 연상시키는 짧은 클립 영상으로 관습과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 삼손 캄발루의 작품이 전시된다.


전시와 더불어 ‘광장 세미나: 참여와 개입의 예술 실천을 위한 공론장’이 10월 13일, 11월 4일, 11월 10일 열린다. 광장 세미나는 각자의 방식과 태도로 예술 실천 혹은 운동을 수행하는 주체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또한 전시장 내 상설 설치된 ‘자기-주도 가이드’도 눈길을 끈다. 옥인 콜렉티브(이정민, 진시우)가 작성한 문구들로, 전시된 작품을 본 뒤 이를 우리의 문맥에서 재해석하는 시도를 했다.


박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영국 사회를 쭉 살펴본다는 맥락보다는 작가들이 현실에 참여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실천 양상을 살피는 게 목적이다. 그래서 ‘자기-주도 가이드’와 세미나 등을 통해 현재 우리의 상황과도 연결시켜 예술 실천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며 “관객이 각자가 마주한 현실을 투영하고,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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