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길고도 긴 도시바 인수전 ‘237일 풀스토리’
최종인수자 선정 오락가락한 ‘진짜 이유’
▲도시바가 메모리사업부문의 최종인수자를 선정하는 것을 두고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사진은 일본 요카이치에 있는 도시바 반도체 공장. 사진 = 도시바
(CNB저널 = 황수오 기자) 반도체 낸드플래시 부문 세계2위 기업인 도시바가 9월 21일 우여곡절 끝에 메모리사업부문의 최종인수자로 한미일 연합을 선택한 가운데, 그동안 인수전이 여러 굴곡을 겪게 된 사연이 주목받고 있다. 도시바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국민정서와 기술유출 문제 등을 인수합병의 포인트로 뒀지만, 막판에 실리 위주로 생각을 바꿨다. 도시바가 이처럼 최종인수자 선정을 놓고 오락가락했던 이유는 뭘까.
이번 인수전의 시작은 올해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년에 원자력사업에서 7조 이상의 손실을 입은 일본기업 도시바가 적자를 메우기 위해 메모리사업부 매각에 나선 것. 도시바 메모리사업부는 낸드플래시 부문에서 삼성전자 다음으로 세계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어 관련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반도체가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는 상황은 ‘도시바 인수전’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IHS마켓은 올해 반도체 시장 세계 매출 규모가 1000억 달러(한화 약 113조 6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스마트폰 고성능화로 인해 핵심부품인 반도체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분야인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 등의 분야에서 반도체가 필수동력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직접 도시바 인수전을 진두지휘했다.
도시바의 메모리 사업은 단점보다 장점이 돋보여 매각이 순탄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최종 발표까지의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지난 1월 반도체 메모리 사업을 분사해 19.9% 지분 매각을 발표한 도시바는 2월부터 지분 매각 예비입찰을 시작했다. 하지만 19.9%로는 글로벌 기업들의 시선을 모으기엔 충분치 않았다. 경영권을 가질 수 없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에 도시바는 지난 3월 지분을 50% 이상 팔겠다고 발표했다. 지분율이 절반(50%) 이상이면 지배경영권 갖는다. 경영권까지 포함한 매각안으로 변경한 것.
매각 예상가가 20조 원을 넘는 매머드급 인수합병(M&A)이었지만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웨스턴디지털, 브로드컴, 폭스콘 등 다수의 기업들이 참여의사를 밝혔다.
인수전에 참여한 기업들 중 가장 높은 금액을 부른 폭스콘은 3조 엔(한화 약 30조 4000억 원)을 제시했다. 하지만 도시바 측은 중국으로의 기술유출을 우려해 우선협상대상자에서 폭스콘을 제외했다.
규모가 큰 인수전이다 보니 도시바가 우선협상대상자를 발표한다고 밝힌 지난 6월 글로벌기업들은 서로 연합체를 구성해 인수전에 참여했다.
당시 우선협상대상자 후보로는 2조 1000억 엔(한화 약 21조 2800억 원)을 제시한 ‘한미일 연합’과 2조 2000억 엔(한화 약 22조 3000억 원)을 부른 ‘브로드컴 컨소시엄’이 유력시됐다.
▲현재 SK하이닉스가 속한 한미일 연합과 웨스턴디지털 컨소시엄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사진은 하이닉스반도체 청주 공장 전경. 사진 = SK하이닉스
한미일 연합에는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일본 산업혁신기구, 일본 정책투자은행,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털 등이 함께했다. 브로드컴 컨소시엄은 브로드컴과 미국 사모펀드 실버레이크 컨소시엄으로 구성됐다.
도시바는 지난 6월 21일 메모리 사업부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SK하이닉스가 속한 한미일 연합을 선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도시바 인수전은 한미일 연합의 승리로 점쳐졌다.
하지만 이 예상은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겹치면서 난항을 겪게 됐다. 첫째로는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도시바와 한미일 연합은 합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매각계약 시기를 연장했다.
또 다른 이유는 웨스턴디지털이 법정 공방 카드를 꺼내며 독점교섭권을 요구한 데 있다.
웨스턴디지털은 도시바와 함께 낸드플래시 부문에서 합작 관계를 맺어왔다. 도시바와 긴밀히 협력해온 만큼 “도시바가 우리의 동의 없이 회사를 팔수는 없다”고 주장해왔고,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제 소송에 나선 것이다.
궁지에 몰린 도시바는 결국 ‘한미일 연합’과의 우선협상 약속을 파기하고 지난 8월 웨스턴디지털 컨소시엄과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웨스턴디지털은 미국 사모펀드 KKR을 비롯한 일본산업혁신기구, 일본정책투자은행 등이 모여 ‘신(新)미일 연합’을 형성했다.
또한 도시바는 기존에 가장 높은 금액을 제시했던 폭스콘과도 협상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여러 기업군을 놓고 최대한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기업이 어디인지를 선택하는, 전형적인 수익 위주의 인수합병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기존의 우선협상대상자를 밀어내면서까지 웨스턴디지털과 협상에 들어간 도시바를 보며 국내와 일본 언론들은 “도시바가 웨스턴디지털과 최종 협상을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라는 기사를 다수 보도했다.
하지만 인수전 최종 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됐던 지난 9월 13일의 도시바 이사회에서는 또 다시 결정을 내지 못하고, 한미일 연합과 우선 매각 협상을 진행한다는 각서(MOU)만을 체결했다. 이에 도시바와 웨스턴디지털 간의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었다.
도시바가 이처럼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유력후보들은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한미일 연합은 인수 비용 외에 연구개발비로 약 4조 1000억 원을 제시했다. 또 도시바의 대형 거래처인 애플을 이번 인수전에 참여시킬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웨스턴디지털 컨소시엄은 그 동안 도시바와의 협상에서 마찰을 겪어왔던 도시바 메모리의 의결권을 포기하겠다는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두 후보들을 결정하는 기로에서 도시바 이사회는 9월 21일 SK하이닉스가 속한 한미일 연합과 매각 계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애플이 도시바의 최대 고객 중 한 곳이기 때문에 나온 선택으로 보인다. 도시바가 향후 안정적인 제품 공급을 위해 고객사와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도시바 인수전에서 최종 승기는 한미일 연합 쪽으로 기울었지만, SK하이닉스가 실질적으로 가져갈 실익은 예상보다 적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업계관계자는 CNB에 “한미일 연합에 포함된 이해관계자가 많아 SK하이닉스가 당초 예상했던 실익에 못 미칠 가능성이 크다”며 “일본 여론들이 기술유출 방지를 우려하고 있어, SK하이닉스가 인수협상과정에서 의결권을 확보하는 것도 아직 미지수”라고 말했다.
황수오 기자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