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영화 '47m'. 한여름에 개봉한 상어가 등장하는 영화. 많은 사람들이 공포의 대상으로 상어가 등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상어는 무서웠다. 하지만 정작 영화 속에서 더욱 큰 공포감을 불러일으킨 건 따로 있었다. 이빨이 날카로운 상어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심해 47m 속 끝도 없이 펼쳐지는 암흑이 더욱 섬뜩한 공포로 다가온 것. 암흑 속 한가운데 비치는 한 줄기 빛은 더욱 빛날 수밖에 없었고, 이 빛은 어두컴컴했던 암흑을 단번에 몽환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힘이 있었다.
리경 작가의 개인전 ‘모어 라이트(more Light): 향유고래 회로도’는 이처럼 암흑과 빛이 주는 공포와 몽환적인 느낌을 물 밖 전시장에 끌어낸 느낌이다. 그런데 묘하다. 전시장은 분명 물 밖 지상에 위치하는데 그의 전시를 보고 있노라면 심해 속 고래의 뱃속에 들어간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이번 전시를 구상할 때 4층까지 이뤄진 공간을 따로따로 나누지 않고 전체가 한 공간인 것처럼 생각하며 꾸렸단다. 그래서 바다의 얕은 곳부터 깊은 곳까지 점차 헤엄쳐 들어가는 느낌을 전시에서 느낄 수 있다.
전시 부제인 ‘향유고래 회로도’도 눈길을 끈다. 향유고래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 속 모비딕이라 불리는 흰 고래의 학명이다. 소설은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선장이 복수를 위해 모비딕을 찾아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는 전시장을 본 순간 이 모비딕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전시 공간 입면도를 보니 향유고래의 머리 모양과 매우 비슷하더군요. 향유고래의 길이가 19~23m에 달한다는 데 공간 크기도 비슷했어요. 그래서 층은 나눠져 있지만, 한 공간으로 보고 작업했습니다. 전시 공간 자체도 향유고래를 떠올리게 했지만, 제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모비딕을 통해 하기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비딕은 생존 동물 중 가장 포악하고, 가장 큰 크기를 지닌 신비한 동물로 알려졌지만 이 동물에 대해 알려진 건 명확하지 않아요. 소설 ‘모비딕’이 향유고래를 가장 잘 설명한 콘텐츠로 이야기될 정도죠. 소설에는 이 신비한 흰 고래가 매우 포악한 면을 가졌다고 해요. 힘든 이 세상을 거칠게 헤엄치며 사는 우리네 모습과도 비슷하다고 느꼈죠.”
작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빛과 어둠으로 표현한다. 그는 비물질적 소재인 빛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이어 왔다. 손에 잡히지 않아 구체적으로 형상을 만들기 어려운 이 까다로운 빛에 매력을 느낀 이유 또한 우리네 삶을 느꼈기 때문.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이야기되곤 하지만, 어느 한쪽만으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어요.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죠. 또 소망과 욕망은 두려움과 불안함을 항상 동반해요. 저는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소재가 빛이라고 여겼어요. 찬란한 빛은 어둠이 있기에 빛날 수 있어요. 어둠 또한 빛이 있어야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죠. 빛과 어둠,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인데 어떻게 관심을 안 가질 수 있겠어요?”
전시장 2층에 들어서면 가장 처음 만날 수 있는 ‘아이 캔 씨 유어 헤일로(I can see your halo) #씬02’는 이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업이다. 깜깜한 공간에 네모 모양의 두 설치물이 바닥에 있고, 위에서 빛이 내려와 이 설치물을 비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한쪽 빛이 어두워지고, 다른 쪽 빛은 더욱 밝아진다.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과정을 설치물을 통해 더욱 잘 볼 수 있도록 구상했다.
빛과 어둠의 교차 속
살기 위해 치열하게 발버둥치는 우리
작가는 “이 작업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감상하길 바라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천천히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작업이기에 금방 보고 훅 지나가면 빛 또는 어둠만 있는 단면밖에 볼 수 없다. 작가는 빛과 어둠을 모두 보기를 바랐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빛을 보고 태어나요. 하지만 태어난 동시에 하루하루는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이죠. 즉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지만, 사람들은 죽음과 어두움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잘 바라보려 하지 않아요. 하지만 소멸이 있기에 우리는 현재 살아있음을 더욱 느낄 수 있어요. 불합리함 속에서도 치열하게 오늘을 살기 위해 애를 쓰고요. 한쪽 면만 보다보면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은데, 전 그 부분을 들춰내서 보고 싶었어요. 빛으로 시작되고 점차 꺼져 가고, 또 가장 환했다가 사그라지는 빛과 어둠에 대한 정면 응시를 통해서요.”
3층의 ‘아이 캔 씨 유어 헤일로(I can see your halo) #씬03’은 특히 죽음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담겼다. 부친의 죽음을 통해 작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보다 구체적으로 하게 됐다고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건 움직이는데, 아버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삶과 죽음의 그 경계가 오묘하게 느껴진 경험이었다. 작가는 “살아 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응시해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많이 하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작업에는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이 보이고 ‘히 고즈 투 더 스카이(He goes to the sky)’라는 외침이 울려 퍼진다.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드리는 작가의 마음이 담겼다. 하지만 꼭 작가의 아버지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삶에 대한 욕구, 그 가운데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죽음, 그 경계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맞닿아 있다.
4층에는 작가의 새로운 시도가 담긴 ‘아이 캔 씨 유어 헤일로(I can see your halo) #씬04’가 기다린다. 작가는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빛에 주목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래서 올라오는 빛은 우리가 발로 가리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빛과 어둠은 위에서 아래로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계기이기도 하다. 이 공간에서는 저 앞 멀리에서 쏘는 빛이 관람자를 향해 날아온다. 그리고 빛이 아주 조금씩 움직인다.
“이전 전시 때 멈춰 있는 빛을 주로 선보였다면, 모든 빛이 이번 전시에서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이 작업을 통해 ‘나는 살아있다’고 외치고 싶은 것 같아요. 빛의 색들도 다양하게 구상됐어요. 제 작업에서는 빛이 생성과 소멸 등 이중성을 가지는 동시에 각자의 색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죠.”
빛과 어둠의 이야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건 소리다. 전시장 2층과 3층, 그리고 4층엔 각각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이 모든 소리가 쌓여 마치 3중주 합창을 하는 것 같다. 작가는 “소리로 이야기 줄거리를 만든다”며 “불쾌하고 힘든 소리가 우리를 건드리길 바랐다”고 말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안함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주로 회피하는 경우가 많죠. 저도 그렇고요. 그런데 포악한 흰 고래와 선장이 살기 위해 벌이는 사투처럼 그 안에서 견디고 발버둥 치면서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숭고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우리는 살아 있고, 그런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건 빛과 어둠이에요. 저는 이 숭고하면서도 치열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어두운 삶, 그리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어요.”
전시는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11월 2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