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가로 26cm, 세로 29cm 4호 크기의 그림이 1991년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故 천경자 화백이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에 전시된 ‘미인도’를 보고 “자식을 못 알아보는 부모도 있냐.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라고 위작 의혹을 제기한 것.
그림에 대한 진실 공방은 무려 26년째 이어져 왔다. 소란스러운 한국을 뒤로한 채 천 화백은 미국으로 떠났고, 90년대 초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위조한 죄목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위조범이 미인도를 자신이 그렸다고 선언하는 일도 있었다. 미인도 감정에 국내뿐 아니라 프랑스 미술품 감정업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동원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 12월, 검찰은 “미인도는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천 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금, 논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래서 미인도가 진짜야? 가짜야?”가 궁금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또 다른 질문에 접근하는 연극이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제 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극단 위대한모험이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2017년 12월 22~31일 선보인 이 공연은 미인도가 전면에 세워져 뒤에 숨겨져 있던 인물들, 그리고 이 인물들을 통제하는 권력 시스템에 접근한다. 더 나아가 “이 사건에 직접 관여했던 국현 학예사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왜 이 논란이 지금까지 이어져 와야 했을까?” “왜 작가와 미술관은 대립해야 했을까?” 등 보다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는 질문들을 던진다.
이를 위해 극은 가상의 인물 예나를 무대에 올렸다. 극 중 예나는 국현의 다른 학예사들과는 다른 위치에 선 인물이다. 국현이 최초로 공개 채용 과정을 통해 선발한 학예사로, 제2학예실 내에서 유일하게 ‘비서울대’ 출신이다. 사회초년생으로 늘 눈치를 보던 예나가 국현의 새로운 사업 ‘움직이는 미술관’에서 천 화백의 미인도를 공개하며 사업을 성공으로 이끈다. 하지만 천 화백이 미인도를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예나의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극은 사실과 가상의 사이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권혁빈 미술평론가는 작품 해설글을 통해 “이 연극은 일련의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그렇다고 연극의 이야기 모두가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연극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짚었다.
작품이 주목하는 건 예나가 ‘진짜’에서 ‘가짜’가 돼 가는 과정이다. 권혁빈 평론가는 “가짜가 진짜가 되는 순간, 그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 아니 그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자. 그 순간은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겪거나 겪게 될 일이고, 이미 화가와 남겨진 이들은 겪은 일이니”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짜’와 ‘진짜’는 무엇일까? 극 중 예나는 미인도를 사업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작가와 감정 업체의 확인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는 데에 책임감을 느낀다. 그리고 ‘가짜 그림’에 대한 ‘진짜 진실’을 알리며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하지만 학예실장의 생각은 다르다. 섬뜩한 그의 말.
“예나 씨는 이 그림이 가짜라고 생각하나 봐요? 작가가 위작이라고 하면 다 위작인 거예요? 그러면 작가가 ‘김일성 만세’라고 하면 예나 씨는 ‘김일성 만세’도 하겠네요?”
당신은 ‘진짜’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학예실장은 미인도가 진짜여야 미술관도 진짜가 되고, 그 미술관에 소속된 사람들도 진짜가 될 수 있다며 예나에게 압박을 가한다. 국가 시스템과 기득권층의 권력 앞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얼마나 작아지는가. 처음엔 천 화백에게 사과와 더불어 작품이 위작임을 밝히겠다고 친필 편지까지 남겼던 예나는 미인도가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학예실장이 된 예나가 미인도를 다시 전시에 소개하면서 마무리된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위치에 선 예나. 예나는 자신이 일궈낸 성과가 진짜라고 믿고 싶겠지만 극 중 권력의 힘에 굴복해 점차 기성세대에 물들어가며, 부역자로서 가짜를 입에 담게 된 예나의 삶이 진짜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 무섭다. 학벌도, 든든한 빽도 없는 예나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예나가 기득권에 복종하면서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과정은 얼마나 쉽게 개인이 권력에 세뇌당할 수 있는지, 그러면서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특히 예나의 남자친구 창기를 운동권 학생으로 설정한 점이 눈길을 끈다. 1991년 실제 발생했던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극 사이 끼워 넣으면서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슬아슬한 예나의 모습을 더욱 강조한다.
강훈구 작가는 ‘작가의 글’을 통해 “나는 미인도를 진짜로 만든 국현의 학예사들이 궁금해졌다. 그들은 분명 87년의 후예였을 것이다. 구시대의 막내가 아니라 새 시대의 맏이가 되고 싶었을 것”이라며 “그들은 분명 그들이 하는 일이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이라 믿었을 테다. 작품이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화가가 치매에 걸렸다는 소문을 내고, 논란을 무마시키기 위해 온갖 서류를 위조하면서도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무서운 마음으로 이 희곡을 썼다. 내가 마주한 겨우 한 줌의 진실에도 몸서리치며 썼다. 이 글도 가짜는 아닐까 무서워하며 썼다. 내가 가짜가 될까봐 무서워하며 썼다”며 “나는 이 연극이 충분히 무서웠으면 좋겠다. 가짜는 아닐까, 가짜가 될까봐 무서워하며 봤으면 좋겠다. 그럼 정말 좋겠다”고 덧붙였다.
가짜가 돼가면서 진짜를 점점 보지 못하고, 그 가짜가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섬뜩한 현실. 꼭 미인도 사건에 해당된 논란만은 아니다. 2016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경악할 만한 국가적인 사건을 마주했고, 권력의 힘을 느꼈으며, 그 권력의 행포에 맞서 진짜 삶을 찾기 위해 촛불을 들었다. “미인도가 진짜냐, 가짜냐”에 앞서 왜 이런 논란이 불거지게 되는지, 그리고 당신은 진짜 삶을 살고 있는지, 가짜 삶을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기를 극은 바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