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조형 사진’이라 이야기한다. 여러 재료를 이용해 구체적인 형태를 만드는 조형, 그리고 물체의 형상을 담는 사진, 이 둘의 만남이 그의 화면에서 이뤄진다는 것. 두 장르의 만남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에 작가는 ‘한계를 깨는 가능성’과 ‘조화’를 언급한다.
“조형은 창조의 영역으로 이야기되죠. 반면 사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이뤄져 왔어요. 사진은 전쟁 시기에는 보도 위주의 목적으로 쓰였고, 평화의 시대에는 기록, 광고의 측면에서 많이 사용됐습니다. 사진은 이미 있는 대상을 담는 방식, 그림은 하얀 종이 위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사용해 그리는 방식적인 측면에서 창조의 영역에서 사진의 한계가 이야기되기도 했어요. 이 가운데 저는 두 장르의 창조적인 결합을 떠올렸습니다. 사물이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사진의 국한된 영역을 벗어나 여기에 회화적인 지각 느낌을 넣는 ‘조형 사진’이라는 장르를 생각했죠.”
이 발상에 영감을 준 존재가 마르셀 뒤샹이다. 마르셀 뒤샹은 어느 공중변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성용 변기를 떼어다가 ‘샘물(Fountain)’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술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샘물’과 같이 기성품을 활용한 오브제 ‘레디 메이드(ready-made)’를 전시하기도 했다. “모든 평범한 물건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주장은 당시 미술계에서는 “예술을 모독한다”는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뒤샹은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다.
“사진은 사진, 그림은 그림이라는 식으로 장르를 선 긋듯 나눠버리는 건 예술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한계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사진에 관심을 가졌고, 1977년 제10회 파리 비엔날레에는 사진 분야로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죠. 기계적으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게 아닌, 기하학적인 조형 언어로 사진에 접근하는 데 매력을 느꼈습니다. 또 이런 예술이 특정 누군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뒤샹이 말한 흔한 기성품을 편하게 이용하듯 누구나 접근 용이한 것으로 다가가길 바랐습니다. ‘누구나 조형 사진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가장 말하고 싶은 점이에요.”
이번 전시는 197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7년 파리 비엔날레 참여를 계기로 그 이듬해인 1978년부터 40여 년 동안 파리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해 온 작가가 오랜만에 여는 국내 개인전이기도 해 눈길을 끈다. 그 긴 시간 동안 작가는 파리에서 조형 사진 분야에 대해 천착해 왔다.
그의 작업은 사진을 찍는 데서 시작한다. 인화한 이미지들을 자르고 재조합한다. 사진 이미지와 포장용 크래프트지를 교차로 배열하는 ‘올짜기’ 방식은, 마치 사진과 그림을 바느질해 또 다른 새로운 천을 만들어내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그에게 작업의 영감을 준 마르셀 뒤샹의 모습을 담은 ‘만 레이-마르셀 뒤샹’도 올짜기 기법으로 탄생했다. 이밖에 피카소, 폴 세잔 예찬, 찰리 채플린 등이 화면에 담겨 서양 미술사를 공부한 작가의 흔적이 느껴진다.
사진 이미지와 포장지 교차 배열로 탄생되는 새 이야기
또 그가 선택한 화면들은 한국의 고건축이나 조형물, 예를 들어 경주 불국사의 극락전, 대웅전, 석가탑, 다보탑, 돌사자 등이다. 작가는 이 풍경들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듯한 시간 여행의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국립 경주 박물관 뜰에서 머리가 없는 불상 약 50여 구를 맞닥뜨렸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의 현장을 사진으로 찍는 순간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과거 불상 참수 현장에 마치 제가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작업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색다른 느낌이었죠. 제게 작업은 이처럼 또 다른 시간과의 만남이 이뤄지는 뜻 깊은 행위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전시 공간에서는 ‘움직이는 사진’이 눈에 띈다. 분명 이미지가 한 자리에 가만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움직이는 화면이 보인다. 막대기의 긴 면에 동일한 너비로 자른 사진 이미지를 부착해 사진의 본래 이미지를 해체하고 변형시킨 설치 및 모빌 작품이다. 모빌이 돌아가면서 본래 봤던 화면과는 다른 색과 풍경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경주’는 관람자가 능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바라봐야 하는 작품이다. 마치 이미지를 굴절시키는 렌티큘러처럼 오른쪽에서 본 화면과 정면에서 본 화면, 왼쪽에서 본 화면이 각각 다르다.
“딱 앞에서만 바라봤을 때 작품의 모든 면이 파악되는 화면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제 조형 사진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면서 인쇄된 이미지와 원화 사이 경계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죠. 예를 들어 그냥 하얀 색을 보는 것과 눈으로 뒤덮인 하얀 풍경을 볼 때 느껴지는 하얀색의 감정이 완전히 똑같지 않고 다르듯 저는 획일적이지 않은,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가 생길 수 있는 화면을 원했습니다.”
작가는 이번 전시명을 ‘조형 사진 - 일어서는 빛’으로 정한 이유도 밝혔다. 빛은 자연으로도 이야기되지만 사진적인 관점에서는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한 도구로도 표현된다.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상황까지 더해지면 빛은 더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사진을 베이스로 이뤄지는 작가의 작업에서 빛은 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토록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빛에 능동적인 뉘앙스를 품은 ‘일어서다’를 붙였다.
“기계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적극성의 의지에서 ‘일어선다’는 표현을 빛 앞에 붙였습니다. 누구나 조형 사진가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어요. 그에 대한 호기심과 적극적인 의지가 있다면 말이죠. 조형 사진이 일상화되는 순간을 고대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가나아트 측은 “작가는 지각으로서의 사진 언어를 새로이 구축한다. 기계적 이미지들의 극단적 이용 및 실리주의와는 대칭되는 미학적이며 지각적인 사진의 위상을 찾고, 이런 조형 사진을 통해 인간과 세계 사이의 균형을 찾고자 한다.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사진 및 설치 작품 10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가나아트센터에서 2월 2일~3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