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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작가 - 박은선] 동양화의 여백을 ‘조각’하다

더페이지 갤러리 재개관전 ‘숨 쉬는 돌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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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91호 김금영⁄ 2018.05.30 09:09:17

박은선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무게 1톤이 넘는 거대한 조각이 전시장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 놀랍다. 공간 리뉴얼을 마친 더페이지 갤러리가 재개관전으로 박은선 작가의 작업을 소개한다. 워낙에도 높았던 천장이 더 높아지고,, 이곳에 거대한 조각이 들어서면서 마치 그리스 신전에 온 듯한 고풍스런 느낌이 든다.

 

그런데 묘하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그리스 신전의 기둥과도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조각은 본 순간 서양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그런데 시간을 갖고 찬찬히 조각을 들여다볼수록 그 가운데 동양적인 느낌 또한 뿜어낸다. 전시명 ‘숨 쉬는 돌의 시간’에서 이 연유를 알 수 있다.

 

작가는 “조각에 숨을 불어 넣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숨’은 동양화의 여백과 연결된다. 작가의 작업을 처음 봤을 때 단순히 기둥 조각만 눈에 들어오기보다는 드넓은 공간이 함께 눈에 들어왔는데, 이는 작가가 의도한 바다. 즉 작가의 작업은 조각 자체로 한정되지 않는다. 조각이 설치된 공간까지 합쳐져야 그의 작업이 완성되는 것.

 

야외에 설치된 박은선 작가의 '컨티뉴치오네 - 듀플리캐치온(Continuazione - Duplicazione)'.(사진=김금영 기자)

조각이 설치된 넓은 전시장 공간은 마치 동양화의 여백처럼 조각에 숨통을 트이게 하며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다. 조각 자체도 완전무결하게 꽉꽉 채우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깨뜨려 균열을 만든 점이 눈에 띈다. 그리고 이 균열 사이로 공간이 보여 작품을 앞에서 봐도 뒤가 훤히 보인다.

 

작가는 “동양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작업에 반영됐다. 기둥 하나를 받치는 주변의 요소에 상상력을 동원해 숨을 불어넣는다”며 “그래서 전시를 할 때 장소가 매우 중요하다. 기둥 하나만 떡하니 드러내는 게 아니라, 공간과 조각이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 속 여백의 미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시장뿐 아니라 야외에서 전시를 할 때도 가장 먼저 주변을 둘러보는 건 작가의 오래된 습관이라 한다. 그 공간에 작가의 조각이 들어섰을 때 비로소 공간이 완성되는 느낌, 작가는 여기서 행복감을 느낀다.

 

작가의 작업은 조각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전시장의 공간을 캔버스로 활용해 조각을 그려 넣었다고도 볼 수 있다. 공간을 활용해 동양화의 여백을 조각하는 작가. 그가 ‘동양적 추상조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익히 짐작된다.

 

원과 사각형 그리고 균열
조각을 구성한 작가의 삶

 

무게 1톤이 넘는 조각들이 설치된 더페이지 갤러리 전시장 공간.(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왜 이런 작업 방식을 취하게 됐을까? 작가는 조각이 “나의 삶을 담은 자화상과도 같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작가가 걸어온 길을 살폈다. 이번 전시는 어언 1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이다. 그는 현재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 1993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고, 1995년 이탈리아 미술계에 데뷔 후 유럽 각지에서 50회의 개인전 및 200여 회 이상의 전시에 참여했다.

 

25년 동안 이탈리아와 유럽 여러 국가를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작가는 2007년 7~8월 이탈리아 피에트라사타시의 초청으로 베르실리아나 공원에서 대규모 야외 조각전을 가지기도 했다. 피에트라산타시가 매년 여는 문화 축제 ‘베르실리아나 축제’의 일환으로 열리는 이 전시는 행사 기간에 단 한 명의 조각가를 초청해 야외 조각전을 개최해 왔다. 헨리무어, 페르난도 보테로 등도 이 전시에 초청받은 바 있다. 작가는 이 전시에 초청된 유일한 한국 작가에 이름을 올렸다.

 

구체 형태를 띤 박은선 작가의 조각이 설치된 모습.(사진=김금영 기자)

이토록 해외에서 인정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이지만 내면엔 고독과 갈등이 휘몰아쳤다고 한다. 작가는 “이탈리아에 처음 살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25년 동안 단 한 번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며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고, 처음 이탈리아에 갈 땐 상황이 여의치 않아 박여숙화랑 대표에게 300만원을 빌리기도 했다. 지금은 돈도 갚았고 해외에서도 작업을 인정받지만 낭떠러지에 선 듯한 위기감을 몇 번씩이나 느끼곤 했다”고 말했다.

 

이 불안한 감정을 담은 조각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밝은 톤의 여러 조각들 사이 시커먼 조각 하나가 동떨어진 채 덩그러니 서 있다. 작가는 “모양을 보면 똑같아 보이는 조각이지만 다른 색으로 인해 차별 당하듯 동떨어져 있는 조각이 바로 나를 대변한 모습이다. 고독감이 드러난 작품”이라고 말했다.

 

원과 사각형이 공존하는 조각은 변화와 순수 모두를 갈망하는 작가의 마음을 담았다.(사진=김금영 기자)

그래서 작가는 숨을 쉬고 싶었단다. 숨 쉴 틈 없이 자신을 옥죄어 오는 상황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리석을 깨고 켜켜이 쌓기를 반복했다. 작가는 “조각에 존재하는 틈은 숨을 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작업을 부수고 깨며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느낌이었다. 나를 오롯이 담은 조각은 바로 나 자체”라고 말했다.

 

또 눈길을 끄는 건 조각의 형태다. 작가의 조각은 원과 사각형 형태가 유독 많다. 작가는 “인간은 원래 순수하게 태어난다. 모가 없는 원처럼 둥그렇게. 그런데 자라면서 이 원이 여러 풍파를 만나 깎이기를 반복하며 점차 모가 난 사각형으로 변해간다”며 “내 조각엔 이 원과 사각형이 모두 등장한다. 사각형을 통해 어쩔 수 없는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순수한 원의 형태를 유지하고 싶은 열망이 공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검은색 기둥 조각 하나가 여러 조각들 사이 혼자 동떨어져 나와 있다. 작가는 "해외에서 작업하며 느낀 내 고독감이 드러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사진=김금영 기자)

그래서 작가의 조각은 불안해 보이는 가운데 규칙이 공존한다. 원과 사각형을 동시에 품은 채 서 있는 조각은 위태로워 보이지만 또 그렇다고 쓰러질 것 같지도 않다. 작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중성을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나름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며 “쓰러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서 있는 조각을 통해 나는 오늘도 한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살아간다”고 말했다.

 

거칠게 파괴된 돌과 정교하게 표면이 처리된 돌 사이의 긴장, 그리고 이들 사이의 조형적 구성을 통해 예술과 인간 본질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번 전시는 더페이지 갤러리에서 6월 30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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