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4호 김금영⁄ 2018.06.28 09:21:46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어딘가로 향하듯 줄지어 서 있는 조각들. 첫 타자는 인간의 조각, 뒤를 이어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동물인 반인반수, 그리고 동물 조각의 줄을 잇는다. 테라코타 작업으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한애규 작가의 개인전 ‘푸른길’ 전시장이다.
작가는 1980년대부터 꾸준히 흙을 재료로 작업했다. 특히 주로 자신의 일상에서 느끼는 여성, 그리고 이들의 삶과 존재에 대한 사유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표현해 왔다. 2015년 열렸던 작가의 개인전 ‘푸른그림자’에선 푸른 빛깔로 침착한 느낌을 살린 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작가는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바닷가를 거닐다가 물속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를 봤다. 세상을 살아가며 이런저런 많은 일에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존재하고, 그 증거로 그림자가 자리한다”고 말했다.
‘푸른그림자’전에서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그림자를 통해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따라갔던 작가는 이번 ‘푸른길’전에서는 더 멀리 발걸음을 옮겼다. 기나긴 여행의 여정을 함께 한 조각들의 행렬이 전시장에 설치됐다.
행렬 작품의 첫 시작은 역사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비롯됐다. 구상은 오래 전부터 했다. 작가는 “7~8년 전쯤 ‘실크로드를 달려 온 서역인’을 감명 깊게 읽었다. 신라의 지배층이 지금으로 치자면 터키 정도에 있었던 저 먼 지역에서 왔다는 내용인데, 이 내용을 뒷받침하는 유물과 증거물을 채집해 풀어낸 책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아주 먼 곳과 우리나라 사이 교역이 과거부터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며 “과거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흔히 교류가 중국 만주 지역에 한정됐다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먼 지역과도 교류를 했고, 고려 시대까지 이 교류가 빈번했다는 사실을 다른 역사 책을 통해서도 읽었다. 이후 직접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교류의 흔적을 따라 가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작가는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다. 과거엔 저 먼 나라까지 발길이 뚫렸었지만 현재는 휴전선으로 인해 북방으로의 길이 막혀 있다. 작가는 “과거 우리 조상들은 북방으로의 길에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분단이 되면서 길이 막혔고, 우리는 점차 먼 앞길을 보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것만 보면서 길도 마음도 막혀가고 있다”며 “원래 우리는 통크게 먼 곳을 바라볼 줄 알았고, 넓은 지역을 오가며 많은 것들을 봤다. 막힌 길이 반드시 다시 뚫려 다시 시야와 경험을 넓히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오랜 세월 품고 있었던 이 염원을 조각들의 행렬에 담았다. 이 조각들은 막힌 곳을 뚫기 위한 거침없는 행렬을 이어간다. 행렬의 맨앞에는 작가의 대표작인 여인상이 서 있다. 이 작품은 ‘조상’ 시리즈의 일환으로, 인간이자 한 여성으로서의 조상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행렬의 맨앞에는 먼 곳으로 발걸음을 시작하는 인간이 서 있기를 바랐다”며 ‘조상’ 시리즈를 앞에 세운 이유를 설명했다. 이 ‘조상’ 시리즈의 발 부분에는 윗부분과 달리 푸른빛이 감돈다. 작가는 “강과 바다 등 물을 건너 저 멀리까지 교역했던 흔적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조각의 푸른빛은 강과 바다를 건넌 흔적
‘조상’ 시리즈의 뒤는 말을 형상화한 ‘신화’ 시리즈가 잇는다. 상체는 인간이고 가슴 아래부터는 말과 유사한 형태의 반인반수다. 그리고 말을 형상화한 ‘실크로드’와 ‘소’도 행렬을 이어간다. 이 시리즈들은 교류의 역사를 상징한다.
작가는 “작품 속 행렬에 등장하는 인물, 동물, 신화 등과 같이 과거 북방으로의 열린 길을 통해 사람, 동물, 문화 등 인적, 물적 교류의 역사가 이어져 왔고, 신화적 요소 또한 서로 오갔다”며 “말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북방 기마민족의 흔적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소는 인류가 가축화시킨 친숙한 동물이기에 당연히 교류의 길을 따라 들어왔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인반수의 눈동자 등에도 역시 푸른색이 표현됐다. 이 또한 인류 문명의 교류 과정에 있었던 당사자들이 건넜거나, 봤거나, 만졌거나, 발을 적셨던 물의 흔적이다.
전시장 지하 1층을 행렬 작업이 채웠다면 지상 1층엔 기둥 조각과 파편들을 표현한 작품 ‘흔적들’이 설치됐다. 이 작품 위에는 앉아볼 수도 있다. 푸른빛을 테마로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여전히 물 위에서 떠도는 지나간 문명의 흔적을 생각하게 한다. 이런 측면에서 지하 1층 행렬 발걸음의 흔적들은 지상 1층 작품들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행렬 작품을 시작한 건 2016년 늦은 겨울부터라고 한다. 당시 한반도 국제 정세는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며 평화의 분위기가 꽃피기 시작했다. 작가는 “남북정상회담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은 아닌데 작품을 첫 시작할 때와 지금을 보면 분위기가 참 많이 달라져 놀랍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오늘날 어디로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남과 북은 여전히 막혀 있어 자유롭게 오갈 수 없다”며 “작품 속 행렬처럼 북방으로의 길이 막힘없이 뚫리길 염원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7월 1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