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5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8.07.09 10:14:58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환기 미술관은 수화(樹話) 김환기의 작품을 보존하고 예술 세계를 연구하여 전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자연히 사람들은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김환기의 작품만 전시되었다고 기대한다. 그래서 여러 명의 작가들이 함께 하는 전시를 보면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환기 미술관은 김환기의 작품만을 선보이는 단독 전시 외에, 창작 공모전인 ‘프리 환기(Prix Whanki)’를 통해 동시대 미술가들을 발굴, 지원해왔다. 또한 ‘사유 공간 창작 노트 Ⅱ’(2018. 5. 18.~8. 26.)처럼 김환기와 내용 혹은 주제적인 면이나 형식적인 면에서 교집합을 보이는 현대·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하는 전시를 정기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1월 2일. 아침부터 백설(白雪)이 분분(紛紛)…… 종일 그림 그리다. 점화(點畵)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 1월 10일 종일 강설. 종일 제작. 점화를 전부 뭉개고 다시 시작. 1월 11일. 거리엔 적설(積雪). 눈이 쌓이면 스튜디오가 밝아진다. 간신히 점화(點畵) <겨울의 새벽별>을 완성. 완성의 쾌감. 예술은 절박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중략) 1월 24일. 선(線)과 점(點)을 좀 더 밀고 가보자.”
인용된 글은 김환기 에세이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2016)에 실린, 1965년도 일기의 내용이다. 글들을 찬찬히 읽다보면 김환기의 작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김환기가 가졌던 예술과 삶에 대한 고뇌와 신념,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등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작업하는 화가의 모습도 상상된다.
완성 작품 아닌 고뇌의 창작 과정 보여주는 전시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을 보다 보면 작가의 작업실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예술가가 오랜 시간 머무르고 작업하는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작업실이 궁금하다는 것은 작업의 과정이 궁금하다는 의미와도 일정 부분 연결될 것이다. 우리는 작가의 작업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작가가 작업을 위해 어떤 드로잉을 하고, 어떤 시도를 하는지 알기 어렵다. 작가의 사후 공개된 미완성 작품이나 의도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작품을 전시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관객은 (어떤 식으로든) 작가가 완성이라 판단한 작품을 만난다. 과정 미술이나 인터랙티브 아트 등이 익숙한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공개되기 이전 작품의 모습, 작업 과정을 알 수는 없다. 작업 노트를 적는 작가라 해도 그것이 일반인에게 늘 공개되는 것은 아니다. 간혹 작업실이 공개되거나 작가의 동의 아래 작업 과정이 공개되는 경우가 있지만 작품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관객들은 언제나 궁금하다. ‘이 작품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내 앞에 오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작가는 어떤 실험의 과정을 거치며 작품을 실현시켰을까?’
환기 미술관의 ‘사유 공간 창작 노트 Ⅱ’전은 이런 우리의 궁금증을 (일정 부분) 해소시켜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업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 그 과정의 기록 전체를 작품으로 보여주거나 작업 중 전개되는 작가의 사유 그 자체를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작가들이 함께 했다. 작품의 시작이 된 작업 노트와 드로잉, 대형 설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모형이 공개되기도 했다. 덕분에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 요구되는지, 예술적 사유의 확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자취를 따라가며 조금 더 작품에 가까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우리도 인생의 창작 노트를 쓰는 중
무언가에 (행복해하며 혹은 열정적으로, 때로는 괴로워하면서도) 몰두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반추하며 ‘내가 지금 이걸 왜 이리 열심히 하고 있지?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자문했던 적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우리에게 부여된 업무를 실행하기 위해, 때로는 자기만족을 위해 다양한 일을 기획하고 시도한다.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한다. 누군가는 그 과정을 기록하기도 할 것이다. 이번 전시가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조금 더 이해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유의미한) 일에 빠져 있는 나의 모습, 내 삶의 과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엔가 적어놓은 일기나 메모를 한 번 들춰보자. 조금은 낭만적인 결말일 수 있겠으나 우리의 삶은 모두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 환기 미술관은 김환기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전시 외에 동시대 작가들을 소개하는 실험적인 프로젝트들을 다수 진행해왔다. 이번 전시 ‘사유 공간 창작 노트 Ⅱ’처럼 김환기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이 아니라 ‘김환기와 (그 다음 세대라 할 수 있는) 동시대 작가들과의 협업’과도 같은 기획전 역시 꾸준히 선보였다. 김환기의 작품이 발산하는 아우라가 강해 작가 선정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건축물의 구조상 환기 미술관은 작품을 설치하기 쉽지 않은 공간으로 보인다.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과 같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를 위한 작가 선정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또한 회화, 설치, 영상 작품이 골고루 전시되었는데 의도적으로 그 균형을 맞춘 것인가?
“환기 미술관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기획전을 준비할 때에도 늘 김환기를 중심에 놓고 작가를 선정한다. 주제적이고 형식적인 면에서 김환기와 그 맥이 연결된다고 판단되는 작가를 선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번 전시의 경우 작가의 작업실에서 일어나는 사유의 과정, 그리고 작업의 과정이 전시장에서 어떻게 발현되어 관객들과 조응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췄다. 완성된 작품 이면의 이야기를 끌어내어 전달하고자 했다.
환기 미술관은 건축 공간에도 김환기의 예술 세계가 녹아 있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건축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오직 건축물을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기도 한다. 이번 전시뿐 아니라 매 전시에서 공간과 작품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작품과 공간이 어떤 울림을 이끌어내는지에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작품과 관객이 환기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순간이 핵심이다. 그리고, 장르별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관객들에게 다양한 미술의 형식을 선보이는 것도 미술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김환기의 작품이 동시대의 새로운 조형 형식과도 훌륭한 조응을 이끌어내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 이번 전시에서는 김환기의 회화뿐 아니라 파피에 마쉐(papier-mâché) 작품을 전시장 가운데에 배치해 마치 김환기의 추상화와 점화가 입체적으로 재현된 것처럼 보인다. 김환기의 작품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권오상의 ‘New Structure’ 시리즈를 환기 미술관에서 보니 낯설면서도 새로웠다. 김건주의 작품은 공간과 작품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과 상호작용이 두드러진다. 한편 정재철은 실재하는 우리의 현실 공간의 이야기를 미술관으로 끌고 들어왔다. 작품 그 자체만으로 작업 과정이 매우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덤덤한 어조로 버려진 오브제를 가져왔음에도 (과거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그랬던 것처럼) 매우 서정적이다. 김은형과 이진주는 단어 그대로 ‘사유의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았다. 내면의 이야기를 그대로 읽어내면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권오상은 조각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탐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다. 사진과 입체, 평면과 입체를 오가며 형태를 고민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을 위한 에스킷과 노트, 설치를 위한 모형들이 함께 전시되어 작업 과정을 보다 생생히 이해할 수 있게 했다.
김건주는 조각의 이면을 연구하는 작가다. 조각이란 단어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단단하고 견고한, 고정된 무언가를 의미한다. 그러나 김건주의 작업은 언제든지 펼치고 재조합할 수 있는 가변성을 갖는다. 작가가 선택한 나무와 스펀지라는 재료가 보여주는 물성 역시 조각(미술)이라는 형식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보여준다.
정재철은 작업을 통해 지역과 지역을 아우르고 문화와 문화를 연결한다. ‘블루오션 프로젝트’는 전국을 순회하며 국가 간의 관계,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문제, 세계의 공통된 과제와 삶 등을 환기시킨다. 전시된 북해남도의 지도는 모두 작가가 직접 그렸다. 또한 전시된 오브제들 중 일부에는 그것이 발견된 위치 정보가 기재되어 있는데 자연의 흐름과 국가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다.
김은형은 작가의 경험, 그것이 토대가 되어 확장되는 상상 등을 작품에 쏟아낸다. 전통적인 동양화 매체를 고수하지만 현대적 맥락의 필획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회화에서부터 공상과학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들까지 결합시켜 재료적인 면뿐만 아니라 소재적인 면에서도 과거와 현재를 잇고자 시도하고 있다.
마지막, 이진주의 작업에서는 작가의 사유와 상상이 어떻게 작품화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작가의 기억들을 소환해서 녹여내는 작업 방식이 김환기가 점을 찍으며 사유하는 방식과 연결된다. 린넨 위에 세밀하게 그려진 기억의 잔상들은 관객의 기억과 결합되어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것이다.”
-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김환기의 작품과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끌어내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김환기의 작품을 중심에 놓고 공간을 분배했다. 모든 작가의 작품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가들의 작품은 그 각각의 개성이 강해 관객의 동선에 맞게 통일감 있는 하나의 내러티브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한 설치 작업이 많아 그에 따른 돌발 상황들이 있었다. 물리적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최고의 과제였다.”
- 김환기의 작품은 그저 보기만 해도 좋다는 관객들이 많다. 그러나 추상 미술은 여전히 어렵다는 관객들도 있다. 우리가 김환기의 점화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김환기를 연구하고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의 큐레이터로서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친 뒤 발표한 김환기의 가장 초기 작업은 기하학적 추상이었다. 이후 달항아리, 사슴, 매화 같은 구체적인 한국적 소재들을 그리다 다시 추상화(抽象化)되었고, 김환기만의 추상 미술인 점화를 완성했다. 김환기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인 점으로 심상 작용이 일어나는 가장 개성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점은 작가가 이전에 그렸던 이미지들뿐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이미지들을 사유하며 단순화시킨 것이다. 그만큼 수많은 내러티브를 담아내는 것이 김환기의 점화다. 또한 추상화는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린 것이다. 그 자체로 모든 가능성이 다 열려있는 그림인 것이다. 계층, 민족, 지역을 초월하는 감흥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김환기의 점화다. 따라서 정해진 정답이나 감상 방법을 따르려고 하기보다는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관객 자신의 감정을 느껴보길 권한다. 이론이나 지식으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울림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첨언하면, 관객들이 김환기의 작업 과정과 작가의 내적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가의 작업 노트 내용을 전시장 곳곳에 레터링(lettering) 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