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2014년을 뜨겁게 달궜던 ‘세월오월’.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을 위해 홍성담 작가는 ‘세월오월’을 작업했다. 하지만 그림 속 허수아비 모양의 박근혜 전 대통령을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조종하는 모습이 문제가 됐다.
작가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비밀리에 함께 그림을 준비하던 윤범모 당시 책임 큐레이터가 “박 대통령의 얼굴을 닭으로 고치면 책임지고 전시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해 닭을 그려 그림 위에 양면테이프로 붙였다. 하지만 결국 외압으로 전시는 취소됐다. 이렇게 말도 탈도 많았던 ‘세월오월’을 직접 눈앞에 마주했다. 박 전 대통령의 얼굴을 가렸던 테이프 자국이 여전히 그림 위에 선명하다. 작가는 이를 “그림에 남은 상처”라고 말했다.
가나문화재단이 인사아트센터에서 8월 19일까지 민중미술작가 홍성담의 개인전 ‘세월오월과 촛불’을 연다. 전시 소식에 많은 관심을 받은 건 단연 ‘세월오월’이다. 전시 취소의 억압을 겪고 이후 국정농단,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까지 불거지면서 ‘세월오월’은 단순히 그림이 아닌,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 예술의 자유 의지를 담은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됐다.
전시장을 찾은 작가 또한 감회가 남달라 보였다. 그는 “의도치 않게 미술계에서 보기 드문 사건의 주인공이 되면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2014년 전시 철회 성명서를 발표하고 나오면서 전시 관계자들에게 ‘5년 이내에 그림을 내린 당신들 입으로 이 그림을 다시 전시하자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실제로 2년 뒤 블랙리스트 사건이 터지면서 광주 시장이 ‘세월오월’을 광주시립미술관에 초청해 전시했다. 그때 진실은 감출 수가 없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세월오월’의 탄생부터 억압 그리고 현재의 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윤범모 평론가 또한 “이번엔 서울에서 관람객들과 ‘세월오월’이 처음으로 만난다. 전시의 열기가 널리 알려져 미술의 사회적 기능이 활발히 이뤄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는 가나문화재단이 준비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은 “가나아트 창업주인 이호재 회장은 민중미술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하지만 보통 상업 화랑에서는 민중미술을 선보이기 어려운 환경이다. 민중미술이 우리 사회에서 외면 받아 온 분위기 또한 있었다”고 짚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점차 분위기는 바뀌고 있다. 현재 현대화랑에서도 대규모 민화전을 열며 가장 우리다운 그림으로 세계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이 일환으로 우리의 삶과 강한 생명력을 담아 온 민중미술 또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보여줘야 할 필요성을 느껴 전시를 마련했다”고 전시 기획 의도를 밝혔다.
‘세월오월’이 화제가 되긴 했지만 전시는 근본적으로 홍 작가가 관심을 갖고 다뤄 온 사회의 이슈를 두루 살피는 데 주요 목적이 있다. 전시장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총 4개의 전시장에 근작 6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세월호 사건을 다룬 ‘세월호, 그리고 4년의 기다림’ ▲세월오월 사건과 광화문을 가득 밝혔던 촛불 행진에 주목하는 ‘세월오월과 촛불’ ▲위안부 문제를 다룬 ‘봉선화’ ▲박정희 정권의 억압을 고발한 ‘간고쿠야스쿠니 – 고속도로’ ▲‘삶과 죽음의 역사’로 구성된다.
“과거에 대한 성찰과 사과 없이 미래는 없다”
특히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가 생각한 건 과거에 대한 ‘사과’다. 세월호와 촛불집회, 위안부, 박정희 정권까지 모든 이야기에는 국가 권력의 폭력이 잠재돼 있다. ‘세월오월’에는 박 전 대통령을 풍자한 모습뿐 아니라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과 주먹밥을 나눠주던 여성이 힘차게 세월호를 들어 올리는 장면 또한 담겼다.
작가는 “박근혜 때문에 이 그림이 유명해졌지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림의 다른 부분에도 담겼다. 1980년대 광주민중항쟁부터 박정희 정권의 자유억압, 그리고 2008년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 2014년 박근혜 정권까지 우리는 억압의 역사 속에서 살아 왔다”며 “우리가 진정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과거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반성해야 그것이 우리의 정신적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단순히 현실 고발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성찰의 자세를 갖추는 노력을 작가는 그림으로 이어온 것.
이건 꼭 국내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봉선화’는 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꼬집으며 국제적 관계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또한 작가는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현재 작업 중이라고 한다.
작가는 “우리가 타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점이 있듯이, 우리 또한 타인에 저질렀던 잔인한 학살의 과거가 있다. 이 과거를 성찰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질서 있는 모습을 동아시아에서 보여줘야 진정한 도덕적, 윤리적 승리가 아니겠느냐”며 “억압과 학살의 역사 속 우리의 뼈에는 자신과 생각이 맞지 않으면 배척하려는 계엄령 DNA가 남아 있다. 이 DNA가 없어지지 않으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미래는 없다. 상생, 화합, 토론이 이뤄질 수 있는 미래를 위해 문재인 정부 기간에 꼭 다뤄지기를 바라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화합을 위한 노력의 가능성을 작가는 광화문을 가득 밝혔던 촛불 집회에서 느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 ‘세월오월’ 옆에 ‘화종 – 학익진’ 시리즈를 설치한 점이 눈길을 끈다. 작가는 “국정농단 당시 시민의 촛불 집회를 보면서 놀랐다. 뜨거운 촛불이 마치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스스로 날개를 펼쳐 적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가운데 이 나라를 진정한 민주주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공격성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인상 깊었다. 그 모습을 물과 불이 합해진 모습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통일대원도’ 또한 눈길을 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근작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담았다. 남과 북의 화합과 평화 통일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 그림으로, 그림 중앙에 그려진 14 종류의 새는 평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양 진영 정상들이 마치 만화처럼 생동감 있게 묘사됐다. 두 정상이 대화하는 풍경을 둘러싸고 통일을 기뻐하는 민중의 모습이 판화 형식으로 그려졌다. 현실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특유의 걸개그림과 판화 양식으로 구현해 온 작가의 화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픈 상처를 지닌 ‘세월오월’과 작가가 발견한 희망을 상징하는 ‘촛불’이 만나 꾸려진 ‘세월오월과 촛불’전. 아픈 상처를 분노와 외면으로 곪아터지게 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 말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돋보인다. 가나문화재단 측은 “각각의 작품들은 관람객들이 민중미술이 사회고발의 한 방편이었음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현실 문제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시각을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