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90년대를 풍미했던 만화 ‘세일러문’의 네헤레니아와 ‘날아라 슈퍼보드’의 사오정 캐릭터가 보여 반가운 마음에 작가에게 다가갔다. “혹시 만화 좋아하세요?”
만화 캐릭터 이미지를 비롯해 약 1500점이 넘는 드로잉이 설치된 이곳은 노상호 작가의 개인전 ‘더 그레이트 챕북 Ⅱ’가 열리는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다. 작가 또한 만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것이 전시의 주제는 아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다양한 이미지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거대한 걸개그림이 눈길을 끈다. 전시장 천장에서부터 아래로 늘어뜨리듯 설치됐다. 만화의 인기 캐릭터뿐 아니라 음식, 유명인사 등 걸개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이미지 하나하나엔 큰 연관성이 없다. 이 이미지들은 작가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에서 무수히 떠도는 이미지를 무작위로 뽑아 그린 것들이다. 즉 작가를 포함한 매우 다양한 사람들의 관심사가 반영된 결과. 그렇다보니 작품을 보는 사람마다 관심 있는 이미지들을 하나 둘 캐치할 수 있다.
SNS에서 수집한 이미지 위에 얇은 먹지를 대고 화면을 재편집해 A4 크기의 드로잉을 매일 제작하는 게 작가의 하루 일과다. 이번 전시를 위해서도 올해 1월 1일 새해가 동트는 순간부터 매일 이미지를 수집하고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축적한 드로잉들을 혼합시켜 다시 대형 회화나 입간판, 패브릭 등 다양한 매체와 형태로 확장시킨다.
전시는 이 드로잉들, 그리고 드로잉의 이미지들을 모아 하나로 크게 구성된 걸개그림 모두 보여준다. 장관은 이미지들로 벽을 꽉 채운 공간이다. 전시장 입구 쪽에 마련된 이 공간엔 총 786점의 그림이 모여 있는데 앞서 2016년 웨스트웨어하우스에서 선보인 동명의 개인전 ‘더 그레이트 챕북’의 흔적이다.
전시된 그림의 수가 워낙 많다보니 전시 개막에 앞서 공개됐던 보도자료에 “전시된 작품의 개수가 잘못 기입된 것 아니냐”는 질문도 쏟아졌다고 한다. 앞선 개인전의 2편 격인 이번 전시에서도 수많은 이미지들을 관람객 앞에 쏟아놓았다. 작가는 이런 행위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전시 제목에 사용된 ‘챕북’은 얇고 저렴한 대량생산 출판물을 뜻한다. 가볍게 읽히고 쉽게 소비된다는 특징을 지니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작가의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86년생인 작가는 디지털 매체 사용이 익숙한 시대에서 자랐다. 작가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에 관심이 많았다. 당장 스마트폰으로 SNS만 켜도 하루에 수천 장의 이미지가 바로 쏟아져 나온다. 사람들은 쉽게 이미지를 접하고, 저장하고, 공유한다. 이런 이미지 과잉 시대에 과연 원본 이미지가 중요할까? 내 작업은 이런 궁금증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이미지를 대할 때 너무 무겁게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작가의 이야기. 그래서 매일 드로잉 작업을 할 때도 SNS에 떠도는 이미지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그날 SNS 타임라인(소셜 네트워킹 사이트에서 유저 자신 및 친구들의 글을 모아서 보여주는 부분)에 떠 있는 이미지를 모았고, 하루에 보통 4~5개의 드로잉 작업을 했다.
이미지 과잉 시대에
사람들이 원본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는?
작가는 원본과 자신의 손을 마치 필터처럼 거쳐 다시 나온 이미지 사이에 존재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스스로를 “먹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작가는 “가상에서 수집된 자료는 아주 얇은 먹지처럼 존재하고 있는 나를 통해 편집되고 새롭게 내보내진다. 나의 작업은 SNS 환경에서 매일 수많은 이미지를 접하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보여주는 그 지점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이미지들을 그린 드로잉들의 설치 방식도 눈길을 끈다. 무수한 옷걸이들이 거대한 걸개그림을 한가운데 두고 둘러쌌다. 옷걸이만 보면 마치 옷가게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이 옷걸이엔 옷이 아닌 작가의 드로잉 작업들이 비닐팩에 담긴 채 걸려 있다.
작가는 “사람들이 ‘왜 그림을 전면에 보여주지 않고 옷걸이에 걸었냐?’고들 묻는다. 그런데 이미 이 그림들은 SNS에서 전면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인데 굳이 전시장에서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미지 전면, 즉 가로 이미지만 보는 데 익숙했던 사람들은 이 이미지들이 세로로 설치됐을 때 종이의 얇은 두께를 발견한다. 얇고 팔랑거리는 종이의 두께가 마치 현 시대에서 이미지가 지닌 가벼운 무게감을 상징하는 것 같다.
작가는 “사람들이 옷가게에 가면 편하게 옷을 만지고 구경하는데, 전시장에 오면 경직될 때가 많다. 그것도 독특하게 전시 관람의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그 지점도 재미있더라”며 “이번 전시는 전시장이 아니라 편집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으로 꾸미고 싶었다. 옷걸이의 옷을 만지듯 편하게 드로잉을 만지고 감상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런 작가의 태도는 실제로 쇼룸을 운영한 경험도 영향을 끼쳤다. 연남동 쇼룸에서 비주얼 아트 크루 다다이즘 클럽의 세 아티스트와 노상호가 작업한 굿즈를 판매하고 전시한다. 운영한 지는 약 8개월 정도 됐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옷걸이에 그림을 걸었다. ‘옷을 고르듯 그림을 보는 쇼룸’이 주요 콘셉트다. 전시장이 아닌 공간에서도 작업을 선보이고 싶었던 작가의 바람이 구현된 공간이기도 하다.
정해진 틀에 구속받기를 싫어하는 작가는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과의 협업 또한 반긴다. 다다이즘 클럽의 아티스트들과의 교류로 서로의 영상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티셔츠와 스커트로 만드는 등 협업 컬렉션을 쇼룸에 전시하기도 했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에서는 밴드 혁오와의 작업을 볼 수 있다. 작가는 밴드 혁오의 보컬 오혁과 20살 때부터 친한 친구로 데뷔 때부터 앨범 재킷 작업을 맡아 왔다고 한다. 작가는 “혁오의 앨범 주제가 ‘하우 투 파인드 트루 러브 앤 해피니스(How to find true love and happiness)’였다. SNS에서 사랑과 행복을 검색해 나온 이미지들을 그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혁오의 앨범 재킷은 계속해서 이미지가 이어져 가는 게 콘셉트다. 앞선 앨범 23 재킷 끝부분의 그림과 이번 앨범 24의 첫 부분이 이어졌다. 이후 앨범 25가 나오면 앨범 24의 끝부분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앨범 1부터 현재의 24까지 이어지는 재킷의 이미지는, 하루마다 계속 새로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들의 연장선상 위에서 작업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 스타일과도 맞닿은 느낌이다.
“오늘까지만 작업하고 싶다”는 게 지론이라는 작가. 이런 작가의 오늘이 꾸준히 쌓이면서 이미지의 확장을 이뤄 왔다. 그리고 바로 오늘도 계속해서 발을 넓혀가고 있다. 전시는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내년 2월 1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