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그룹내 7인의 부회장 중 수석부회장 직을 맡으며 현대차그룹의 3세 경영이 가시화됐다. 일각에서는 사실상 3세 승계가 이뤄진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지만, 현대차그룹 측은 “아직 정몽구 회장의 경영권은 공고하다”며 확대 해석에 선을 긋는 입장이다. 최근 정 수석부회장이 현대차그룹의 미래로 소개한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의 실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석부회장 승진, 정몽구 회장이 결정했다
지난 14일 현대자동차그룹은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을 그룹 총괄수석 부회장으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앞으로 정 수석 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을 보좌하며 현대차그룹 경영 업무 전반을 총괄하게 된다.
현대차그룹 측은 이번 승진에 대해 “최근 글로벌 통상 환경이 악화되고, 주요 시장의 경쟁 구도가 바뀌는 등 경영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그룹의 통합적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몽구 회장이 내린 결정”이며 “4차 산업혁명 등 미래 산업 패러다임 전환기에 현대차그룹의 미래 경쟁력 강화와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그룹 차원 역량 강화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이번 정 부회장의 승진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분위기다. 현대차 일가가 본격적인 3세 경영 체제에 돌입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반면, 현대차그룹 측은 정 회장의 경영권이 여전히 공고하며, 이번 인사 역시 정 회장의 판단에 따른 포석이라는 입장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정의선 부회장에 대한 이번 역할 부여는 그룹 차원의 체계적이고 신속한 체계와 역량 확보가 필요하다는 정몽구 회장의 판단에 따른 포석”이라며 “정 수석부회장은 정 회장을 보좌하면서 주요 경영 사안은 정 회장에게 보고하고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부회장의 역할이 커지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정 회장의 보좌에 머무를 것이라는 얘기다.
7명 부회장 중 단독 1위… 그룹 전체 경영에 관여
그렇다면 총괄수석부회장이라는 지위는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이며, 정 부회장은 앞으로 어떤 권한을 행사하게 될까?
그간 현대차그룹에는 정 부회장 외에도 6명의 부회장이 존재했다. 윤여철·양웅철·권문식·김용환 현대·기아자동차 부회장과 우유철 현대제철 부회장,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등이다. 그 동안은 정 부회장과 나머지 6명의 부회장이 동렬이었으나 앞으로는 정 수석부회장이 한 발 앞서게 된다. 명실상부한 그룹 내 2인자 지위가 공식화되는 셈이다.
정 부회장이 권한을 행사하는 범위도 한층 확대된다. 정 부회장은 그간 기아차 사장직을 수행하다 2009년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한 뒤, 현대모비스 등 일부 계열사에 등기이사로 등재되기는 했지만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사실상 현대차 이외의 계열사에는 영향을 끼치기 어려운 구조였다.
하지만 총괄수석부회장은 정 회장을 대신해 그룹 내 모든 경영 사안을 총괄하는 자리다. 현대차그룹의 양 날개인 현대차와 기아차는 물론 현대제철과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현대캐피탈, 현대카드, 현대차증권, 현대라이프, 현대글로비스, 현대로템, 이노션 월드와이드, 해비치호텔&리조트 등 모든 계열사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번 수석부회장 승진으로 갑작스럽게 경영 승계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별다른 차질이나 혼란 없이 승계가 이뤄질 수 있는 체계가 구축돼 사실상의 ‘3세 경영 승계’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미 그간 정 회장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안 정 부회장은 정 회장을 대신해 그룹 대표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각종 신차 발표 행사나 글로벌 산업 전시회 참가는 물론 정부와의 만남까지 대부분의 대외활동을 정 부회장이 맡으며 업계 내에서 인지도와 위상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상황이었다. 특히 지난 5월 현대차그룹이 추진하던 지배구조 개편안이 시장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 좌초했을 때도 정 부회장이 공식 입장을 발표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정의선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제공 업체 되겠다”
그렇다면 정 부회장은 앞으로 현대차그룹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까? 정 부회장의 그간 발언을 살펴보면 대략적인 방향이 유추된다.
지난 7일(현지 시간) 인도 뉴델리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무브(MOVE) 글로벌 모빌리티 서밋’에서 정 부회장은 “모빌리티 영역의 혁신적 변화는 우리의 생활뿐만 아니라 환경, 에너지 문제를 동시에 개선할 수 있는 수단이며, 도시와 농촌, 현실과 상상,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며 “현대차는 자동차 제조업체에서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제공 업체로 전환을 적극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모빌리티(Mobility)는 ‘이동성’으로 번역되는 용어다. 스마트 모빌리티는 일반적으로 최신 충전 기술이 도입된 개인형 이동수단을 지칭한다. 정 부회장이 말하는 스마트 모빌리티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이날 정 부회장은 스마트 모빌리티 시대를 구현하기 위한 현대차의 3대 전략 방향성으로 ▲친환경 이동성(Clean Mobility) ▲이동의 자유로움(Freedom in Mobility) ▲연결된 이동성(Connected Mobility)을 들었다. 전기차‧수소차 등 친환경 동력을 사용하고, 자율주행‧공유경제 등 최신 기술이 적용되는 미래형 모빌리티를 주도하겠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그간 정 부회장은 다른 어떤 자동차기업 CEO들보다도 기술과 디자인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 디자인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해 기아차의 디자인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물론 K시리즈, 제네시스 브랜드 등을 성공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모터쇼뿐 아니라 CES 같은 IT‧가전 전시회도 빠짐없이 참여하면서 그는 자율주행차, 전기차, 수소연료전지차 등 ‘미래차’로 통칭되는 영역에 대해 큰 관심을 보여왔다. 앞으로 정 부회장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그가 관심을 보여왔던 미래차 관련 사업이 한층 힘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이유다.
경영‧정책 등과 관련해서도 정 부회장은 그룹을 대표해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 9월 16일 정 부회장은 수석부회장 승진 후 첫 미국 출장에 나섰다. 미 행정부가 추진 중인 수입 자동차 관세 부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윌버 로스 상무부 장관 등 미 행정부‧의회 고위인사들을 만나고 올 예정이다.
정 부회장은 이 일정을 수행하기 위해 18일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 대통령 수행 방북단 명단에서도 빠졌다. 원래는 4대 그룹 회장단이 모두 방북할 예정이었으나 현대차 입장에서는 미국 시장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어 정부 측에 양해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정 부회장은 현대가의 장손으로 자동차 기술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현대‧기아차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며 “안으로는 지배구조 개편 문제를 풀어야 하고, 밖으로는 미국시장 관세 문제와 중국 시장 점유율 약화 등 현안이 산적해있어 앞으로 갈 길이 평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