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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그림 속 길 (16) 옥류동~세검정 ⑤] 윤동주의 조선女와, 안평대군의 꿈 얽힌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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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06-607합본호(추석)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9.27 09:39:33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수성동에서 올라온 해맞이공원에는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과 운동기구들이 잘 정비되어 있다. 길은 평탄히 이어져 있는데 잠시 후에는 나무로 가꾸어 놓은 쉼터도 지나간다. 여기에서 오솔길을 따라 찻길과 이어져 있는 자락길까지 올라가면 무무대(無無臺)라고 이름 붙여 놓은 전망대가 있다. ‘아무것도 없구나. 오직 아름다운 것만 있을 뿐’. 무무대라고 쓴 돌맹이에는 이런 말도 써 놓았다. 세상이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전망대에서 문안(門안)을 내려다본다. 요즈음에는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흔히 쓰던 말이다. 4대문 안 지역을 이르는 말인데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시내쯤 되는 말이다. 무무대에서 다시 그늘 길로 되돌아 와 나아가면 옥동척강도(玉洞陟崗圖)를 설명할 때 올랐던 옥동척강의 끝 지점을 지나게 된다.

 

송석원의 낮과 밤 모임을 그린 두 점


여전히 약수터에는 시원한 물이 샘 가득하다. 샘에서 사는 금붕어들도 여전히 힘차게 헤엄치고 있다. 길은 높낮이 없이 편히 이어진다. 


잠시 후 시야가 트이는 위치에 나무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내려다 보이는 곳은 세심대 능선 주변이다. 전망대에는 위항문학(委巷文學)을 설명하는 안내판과 함께 천수경의 송석원(松石園) 맴버들이 1791년 유두날 열었던 모임을 기록한 그림 두 점이 장식되어 있다. 

 

무무대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진 = 이한성 교수 
위항문학 설명판이 있는 전망대. 사진 = 이한성 교수
옥동척강 능선의 운동 기구들. 사진 = 이한성 교수 

기왕 송석원 시사(詩社)를 소개할 것이라면 송석원 시사가 열렸던 곳에 가까운 언커크 능선(송석원 능선)에 설치했으면 좋았으련만. 이 그림들은 이미 본 연재물 시리즈 10에 소개한 그림이니 재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이 길을 지나가는 이들의 이야기 소재를 위해 그때 소개드리지 못한 그림 속 시(詩) 한 번 읽고 가자. 이 두 그림은 동갑내기 도화서 화원 김홍도와 이인문이 그린 그림이다. 이인문이 그린 그림은 낮 모임을 그린 것으로 송석원시사아회도(松石園詩社雅會圖)라 하고, 김홍도가 그린 그림은 밤 모임을 그린 것으로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雅會圖)라 한다. 이 두 그림에 미산(眉山) 마성린이 제(題)를 달아놓았다. 함께 읽어 보자.


이인문의 아회도(雅會圖)에는,

 

謙玄以後      
겸재(정선) 현재(심사정) 이후
不見山水善畵者矣     
산수화 잘 그리는 이 보지 못했는데
今覽此帖則           
지금 이 화첩을 관람한 즉
松水館亦是名不虛傳   
송수관(이인문)은 역시나 명불허전이구나.
望八眉翁   
71살 미산(마성린)

 

또 김홍도의 야연도(夜宴圖)에는,
庚炎之夜   삼복의 밤
雲月朦朧   구름과 달 몽롱하고
筆端造化   붓끝 조화는
驚人昏夢   사람 놀라게 해 띵하구나
尾山翁  미산옹(마성린)

 

여기서 庚炎(경염)이라는 말은 삼복더위를 말하는 것이다. 삼복(三伏)을 정하는 방법이 하지(夏至) 지나고 3번째 경(庚)날 즉 일진이 경(庚)으로 시작하는 날(예를 들면 庚子, 庚午…)을 초복(初伏)으로 하고, 그 뒤 열흘 뒤 오는 경(庚)날을 중복(中伏)으로 하고, 입추 지나고 첫 번째 경(庚)날을 말복(末伏)으로 한다. 그러니 초복, 중복, 말복이 모두 경(庚)날이므로 삼복더위를 경염(庚炎)이라 한 것이다.


이곳 데크를 지나가면 잠시 후 아래로는 청풍계가 내려다보인다. 상류 골짜기가 깊고도 깊다. 그 옛날 장동 김씨 선원 김상용 선생이나 근래에 정주영 회장이 자리 잡고 살 만한 곳일 것 같다. 골짜기가 깊으니 인왕산 산신령이 내어주시는 지하수도 맑고 시원하겠지. 지하수를 저장할 것 같은 지하 탱크가 내려다보인다. 

 

이름이 궁금증을 자아내는 가온다리의 모습. 사진 = 이한성 교수

‘가온다리’라는 이름의 유래는?


청풍계를 지나니 자그마한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인왕산 속살 속에 숨어 있는 출렁다리. 이름을 ‘가온다리’라 붙여 놓았다. ‘가온’은 가운데라는 뜻이라는데 그렇다면 가운데 다리? 왜 이런 이름을 붙여 놓았는지 궁금하다.


길은 숲길로 재미있게 이어져 간다. 잠시 후 ‘仁(인)의 동물 호랑이’라는 설명 판이 나타난다. 왜 인(仁)인가 했더니 호랑이는 배부르면 절대 재미삼아 다른 동물을 죽이는 일이 없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먹이를 잡으면 어린 것과 암컷부터 먹이기에 인(仁)의 동물이라는 설명이다. 아하, 호랑이가 그런 동물이었구나.


우리가 흔히 입에 담는 인왕산 호랑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살았을까? 왕조실록에 보니 세조 때 호랑이가 나타나서 인왕산과 백악산으로 몰아 잡은 일이 있으며, 중종 때에도 인왕산에 호랑이가 나타났으니 호랑이는 인왕산에 출몰했던 짐승이었다. 기왕 호랑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호랑이란 이름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虎狼이? 뭔가 좀 이상하다.

 

‘호랑이’라는 잘못된 말 빼고 
‘인왕산 범’이라 불러줬으면…   


옛 책에는 虎: 버미라(범이라), 狼: 일히라(이리라) 이렇게 구분이 명확하고, 1926년 9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 해에 즘생(짐승) 피해 통계 자료가 실려 있는데 虎: 四人 狼: 四十四人 이렇게 범과 이리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다. 그러면 호랑이는 무슨 뜻일까? 옛사람들은 이런 짐승들의 피해를 조심하란 뜻으로 ‘虎, 狼을 주의하라’처럼 虎와 狼이 붙어 다니다 보니 虎와 狼을 虎狼처럼 쓰게 되고 범(tiger)을 우리도 모르게 虎狼이라 쓰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범(虎)이 이리(狼)와 섞여 이름을 더럽히게 된 사연이 안타깝다. 이제라도 점잖게 ‘인왕산 범’으로 불러 주면 어떨까?


그늘 길을 편히 걸어간다. 잠시 후 ‘대금명인 鄭若大’라는 이를 소개하는 안내판과 만난다. 고종 때 사람이라는데 굉장한 노력파였던 모양이다. 소개되어 있는 글을 빌려온다.


‘어영청(御營廳) 세악수(細樂手)를 지냈고 특히 가곡 반주에 뛰어났다. 대금 수업을 위하여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인왕산에 올라가 도드리 곡을 한번 연주할 때마다 나막신에 모래알 하나씩을 넣어 그것이 가득 찬 뒤에야 산에서 내려왔는데 하루는 나막신의 모래 속에서 풀이 솟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곳을 지나면 이빨과 흡사한 모양의 이빨바위를 지나게 되고 이윽고 청운공원에 닿는다. 수성동에 있던 옥인시범아파트처럼 이곳에는 청운아파트가 있었다. 이제는 모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청운공원이 되었다. 더운 날 마실 수 있는 물(아리수)도 있고, 깨끗한 화장실도 있다. 잠시 숨돌리고 가시라.

 

윤동주 시비의 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어머니 모습을 읊은 듯한 윤동주의 시


저기 보이는 언덕이 시인의 언덕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슬픈 族屬(족속)’이 새겨져 있다.

 

힌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힌 고무신이 거츤발에 걸리우다
힌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힌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一九三八, 九. 동주

 

그 암울했던 시절, 내 어머니 슬픈 모습을 절절이 담았다.


시비(詩碑) 옆으로는 겸재의 그림 장안연우(長安烟雨)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간송에 소장되어 있는 겸재의 그림으로 최완수 선생에 따르면 1741년(영조 17년) 작품이라 한다. 그리고 안내판이 서 있는 시인의 언덕보다는 조금 동쪽인 육상궁(칠궁) 뒤 북악산 서쪽 기슭에서 그린 그림이라 한다. 그림을 곰곰 살피면 좌(東)로는 북악산 서쪽 기슭 끝이 걸쳐 있고 우(西)로는 인왕산의 동쪽 끝이 걸쳐 있다. 그리고 북악산 쪽 아래로는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육상궁(毓祥宮: 칠궁)이라 한다. 경복궁은 임진란으로 폐허가 된 후 복원이 되지 않아 풀만 무성하게 보인다. 우측 인왕산 기슭 아래로는 올망졸망 집들이 어깨를 곁고 있다. 청계천쯤 되는 곳은 그림 제목처럼 비온 뒤끝이라서 이내가 자욱이 덮였다. 그 뒤로 목멱산(남산)은 우뚝하다. 관악산도 비교적 선명하게 삐죽삐죽한 암봉 자태를 보이고 있다. 동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은 아마도 청계산과 남한산성일 듯하다.

 

겸재의 그림 ‘장안연우’.
보름달 둥실 뜬 날 밤의 서울 모습을 그린 ‘장안연월’. 
목멱산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인 ‘필운상화’. 

이 그림과 사촌쯤 되는 그림이 이름도 닮은 장안연월(長安烟月)이다. 장안연우와 거의 유사한 구도의 그림인데 보름달 둥실 뜬 날 밤 그 시절의 서울을 그리고 있다. 이미 소개한 그림으로는 목멱산을 이렇게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 이른바 필운상화(동대상춘, 장동춘색)인데 필운대나 육강현쯤 되는 곳에서 일곱 선비가 꽃 구경에 빠졌다. 또 하나 목멱산과 그 동쪽을 배경으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는 그림으로 이춘제의 서원 삼승정에서 바라보는 그림이 있다. 삼승조망(서원조망)도이다. 모두 그 시절 서울 장안을 내려다(바라) 보는 그림들로서 서로 비교해 가면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제 윤동주 문학관으로 내려간다. 한 시인을 아는 데 도움이 되는 문학관이다. 굳이 윤동주에 대해 이 글에서 설명하는 것은 사족일 것이니 생략하고 물 탱크로 쓰던 시멘트 폐쇄 공간에서 만나는 윤동주 소개 동영상은 한 번 보시라.

 

이춘제의 서원 삼승정에서 바라본, 목멱산과 그 동쪽을 배경으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는 그림인 ‘서원조망도’.

서울의 자태를 그린 그림들


이제 자하문 고개를 넘어 부암동 주민센터를 끼고 무계동(武溪洞)으로 들어간다. 겸재의 창의문도에 그려져 있는 기차바위(백련봉)와 해골모양바위 아래 골짜기 동네가 무계동이다. 소설가 현진건 선생이 사시던 집이 있었는데 갑자기 헐어 공터만 남았다. 현진건 집터의 표석이 있다. 이 골짜기 안쪽에는 윤웅렬(尹雄烈) 별장이 있다.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윤웅렬이라는 사람은 윤치호의 부친으로 1910년 조선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즈음 일제로부터 남작(男爵) 작호를 받은 사람이다. 

 

윤치호의 아버지로서 일제로부터 남작(男爵) 작호를 받은 윤웅렬 별장이었음을 알리는 표지판. 사진 = 이한성 교수 
소설가 현진건 선생이 살던 집은 헐리고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만이 남았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또 하나 이 골자기에 새로 생긴 큰 한옥이 있다. 무계원(武溪園)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는 것 같다. 이 건물은 사연이 있다. 요즈음 뜨고 있는 익선동에 있던 건물을 옮겨지은 것이다. 서화가 송은 이병직(李秉直)은 해강 김규진의 제자로 국전 심사의원도 맡았는데 익선동에 큰 한옥을 짓고 살았다. 그 집이 팔리자 집을 산 이가 이 한옥에다가 요정을 개업하였다. 군사정권 시절 요정 정치가 판을 치고 있었으니 장사도 잘 되었다. 그 요정 이름은 오진암. 서울 시내 유명한 요정이었다. 그 건물을 옮겨다 지은 곳이 무계원이라 한다. 부디 훌륭한 문화 사업을 영위해 나갔으면 좋겠다.

 

청계동천(靑溪洞天)이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 사진 = 이한성 교수 

이 골짜기 바위에는 우리에게 낯선 청계동천(靑溪洞天)이란 각자가 보인다. 언제 누가 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창의문 밖 이 지역에는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골짜기들이 있었다. 이곳 무계동(武溪洞, 청계동천), 석파정이 있는 골짜기 삼계동(三溪洞), 세검정과 탕춘대. 근래에 뜬 곳으로는 백석동천도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다니던 곳이었다.

 

안평대군의 꿈 얽힌 몽유도원도 이야기


자, 이제 무계동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1447년(세종 29년) 4월 20일 밤 비해당 주인 안평대군은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도 황홀하고 아른아른 꿈속으로 빠져들었는데 참으로 희한한 꿈을 꾸었다. 본인과 박팽년, 최항, 신숙주가 꿈속에서 어느 골짜기를 찾아갔는데 아, 본인이 꿈꾸던 바로 그곳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바로 유토피아를 찾아간 것이다.

 

‘몽유도원도’의 발문.(자료 사진)

꿈이 깨자마자 바로 자신과 친한 도화서 화원 현동자 안견(安堅)을 찾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그림 그린 듯 상세히 말했을 것이다. 안견은 이 이야기를 3일 만에 그림으로 생생히 표현하였다. 너무 기쁜 안평대군은 이 이야기를 적어(跋文) 그림과 함께 보관하였다. 그리고는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하여 예술을 같이 논할 수 있는 이들로부터 이 그림에 대한 글(題贊)들을 받았다. 그렇게 글을 받은 사람이 23명이나 되었다. 이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단순히 그림만 아니라 이들이 글도 함께 있는 대작이다. 따라서 ‘몽유도원도 권축(卷軸)’이라 불러야 풀 세트를 이르는 말이다.


긴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안평대군이 써붙인 발문(跋文)은 읽고 가자.


세종 29년(1447) 정묘년 4월 20일 밤. 내가 막 잠자리에 들어 정신이 개운하니 잠에 푹 빠져 들었는데 꿈도 또 꾸었다. 홀연히 인수(박팽년)와 함께 어느 산 아래 이르렀는데, 겹겹의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우뚝하니 높고 고요하였다.


복사꽃 수십 그루에 희미한 오솔길을 따라 숲의 가장자리에 다다르니 갈림길이었다. 머뭇거리고 방황하며 오래 서성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 산관야복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났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나에게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곧 도원입니다”라고 하였다. 


나와 인수는 말에 채찍질 하며 찾아갔는데 깎아지른 절벽의 바윗길은 아찔하고 숲이 우거져 울창하였다. 계곡은 굽이굽이, 길이 구불구불, 백번이나 꺾이며 희미해지려 하는데 그 골짜기로 들어간즉 골짜기 안은 제법 널찍하여 2, 3 리는 됨직하였다.


사방의 산은 절벽에 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고 멀고 가까이의 복숭아 숲에는 햇빛이 비추며 노을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또 대 숲에는 띠로 엮은 초가집에 사립문은 반쯤 닫혔고 흙으로 쌓은 섬돌은 이미 무너져 내렸다. 닭과 개, 소와 말은 간데없고, 마을 앞 시내에는 오직 조각배 한 척이 물결 따라 흔들리는데 정경이 고요하여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하였다. 이에 머뭇거리며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인수에게 이르기를 “바위를 깎고 골짜기를 뚫어서 집을 짓는다”고 하더니 어찌 이를 두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실로 도원동이로다”라고 하였다.


곁에 몇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여기 정보(최항)와 범옹(신숙주) 등은 함께 운을 골라 시 짓던 이들이다. 함께 신발을 고쳐 매고 내려오며 뒤를 돌아보고 흐뭇해 하다가 홀연히 꿈에서 깨었다.


오호라! “도읍이나 큰 고을 번화한 곳은 이름난 벼슬아치가 노니는 곳이요, 깊은 골짜기의 깎아지른 절벽은 이내 그윽하여 은자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런 연고로 몸에 푸르고 붉은 비단에 얽매여 있는 자는 발자욱이 산이나 숲에 이르지 못한다 하고, 뜻을 자연에서 도야하려는 자는 꿈에서도 솟을 대문이나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니,  무릇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달리하는 길이며 이치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낮에 한 바를 밤에 꿈으로 꾼다”고 하였는데, 나는 궁궐에 매인 몸이라서 밤낮으로 일에 쫓기고 있는 터에 어찌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고, 또 어찌 도원에 이를 수 있었을가?


나에게는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도원을 유람에 여기 몇 사람만이 따랐던 것인가? 의식과 그들의 성정이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여 마음속에 자연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며, 함께 한 몇 사람은 교분이 매우 두터웠던 까닭에 여기에도 이르게 된 것이리라. 이에 가도(안견)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리게 한 것이다.


다만 옛부터 이른바 도원이 또한 이와 같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이 그림을 보는 이들이 옛 그림을 구하여 내 꿈과 비교하게 되면 반드시 말이 있으리라.


꿈을 꾼 지 삼일 만에 이미 그림으로 이루어져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쓰다. 


歲 丁卯 四月 二十日夜 余方就枕 精神蘧栩 睡之熟也 夢亦至焉 


忽與 仁叟 至一山下 層巒深壑 崷崒窈窅 有桃花 數十株 微徑抵林 表而分岐徊徨竚立 莫適所之 遇 一人 山官野服 長揖 而謂余 曰 : “從此徑 以北 入谷則桃源也” 余 與仁叟 策馬尋之 崖磴卓犖 林莽薈鬱 


溪回路轉 蓋百折而欲迷 入其谷則 洞中曠豁 可二三里 四山壁立 雲霧掩靄 遠近桃林 照暎蒸霞 
又有 竹林茅宇 柴扃半開 土砌已沈 無鷄犬牛馬 前川 唯有扁舟 隨浪游移 情境簫條 若仙府然 於是 踟躕瞻眺者 久之 謂 仁叟 曰 : 架巖鑿谷 開家室 豈 不是 歟! 實 桃源洞也 


傍有 數人在後 乃 貞父 泛翁 等 同 撰韻者也 相與整履 陟降 顧盻 自適 忽 覺焉 嗚乎 ! 通都大邑 固 繁華 名宦之 所遊 窮谷斷崖 乃 幽潛隱者之所處  是故 紆身 靑紫者 迹 不到山林 陶情 泉石者 夢不 想巖廊 


蓋 靜躁殊途 理之 必然也 


古人 有言 曰 : “晝之所爲 夜之所夢” 


余 托身禁掖 夙夜從事 何 其夢之 到於山林耶 又 何到 而至於桃源耶 


余之相好者 多矣 何必 遊桃源而從是數子乎 意 其性 好幽僻 素有 泉石之懷而與 數子者 交道 尤厚 故致此也 於是 令可度 作圖 但 未知古之 所謂 桃源者 亦若是乎 後之觀者 求古圖 較我夢 必有言也 


夢後三日 圖旣成 書于 匪懈堂之 梅竹軒.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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