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원시시대에 UFO를 타고 시공간을 넘어 날아 간 외계인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된 어떤 인물은 그만큼 그 정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특정 시대를 유추하기도 힘들고, 어떤 인물이라고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묘한 형상.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흥미로웠다.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일본 작가 이즈미 카토의 개인전 현장을 찾았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첫 서울 개인전이기도 하다. 작가는 “10년 전 그룹전으로 한국에서의 전시에 참여한 적은 있지만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라 기쁘다”며 설레는 마음을 드러냈다.
페로탕 서울은 “작가의 작업은 199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진화해 왔다. 회화로부터 출발해 2003년 목재 조각으로 범위를 넓혔고, 2012년에는 소프트 비닐을 이용한 조각 작업이 추가됐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를 비롯해 돌과 소프트 비닐을 소재로 사용한 조각까지 작가의 작업을 전반적으로 살필 수 있도록 구성됐다.
먼저 전시장 1층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회화 작품 2점이 눈길을 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작가는 붓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는 “나이프로 배경을 그리고, 손에 물감을 묻혀 그렸다”고 설명했다. 곡선은 부드럽지만 강한 역동성이 느껴지고, 화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미건조하지도 않은 색채는 안정감과 불안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묘미를 드러낸다.
작품명은 특별 대상을 지칭하지 않은 ‘무제(Untitled)’다.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 왜 ‘무제’인지 납득이 간다. “화면에 그려진 인물이 여성인가? 아니면 남성인가?” “작가의 자화상인가?” “특별히 영감을 받은 모델이 있는가?” 등 화면 속 인물의 정체를 끌어내기 위한 질문들에 작가는 “모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객관식의 답을 정해주기보다는 주관식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풀어나갈 수 있게 여지를 둔 것.
그렇기에 작가가 작업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스토리’보다 ‘형상’이라고 했다. 특히 작가는 ‘인간의 형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작가는 “우리가 아무런 편견 없이 순수하게 사람의 형상만을 바라보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강아지나 고양이 등 동물은 매우 관대하게 바라보는 경우가 많지만, 정작 사람에게는 특정 외모에 대한 지적이 매우 거칠게 이어질 때가 많았다. 이런 관대하지 못한 시선이 싫었다”며 인간의 형상에 관심을 가진 이유를 밝혔다.
그래서 작가는 화면에서 인물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배제시켰다. ‘무제’로 타이틀을 정하고, 특정 성별을 주지도 않았으며 옷도 입히지 않았다. 정보가 하나씩 더해질수록 무의식 중 생겨버릴 수 있는 선입견과 편견의 시선을 경계하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을 혐오하는 ‘인간 혐오’ 시대에 작가의 작업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말에 작가는 “애정이 있어야 싫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인간 혐오의 바탕엔 인간 스스로에 대한 관심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실타래로 꿰매서 잇듯 연결되는 그림과 조각들
그림들 옆에는 마치 해당 그림의 쌍둥이처럼 보이는 돌 조각들이 배치됐다. 페로탕 서울은 “작가의 최근의 석재 조각 연작은 2016년부터 작업해 온 것으로, 자아와 타자 그리고 자연간의 내밀한 관계를 재현한다. 원작은 홍콩 해안 지역의 스튜디오 인근 매립지에서 채취한 화강암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돌로 제작한 조각도 선보인다. 페로탕 서울 측은 “신작은 형태와 재료 면에서 전작과의 단절을 보여준다. 작품에 사용된 돌은 인공적으로 변형하거나 깎아내지 않은 것으로, 자연 세계와 인간 존재 사이에 형식상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고 밝혔다. 돌들은 툭 치면 상반신과 하반신이 바로 흩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완전한 형상을 오롯이 드러낸다.
또 눈길을 끄는 작업이 있다. 화면에 인물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눠져 있는데, 이 두 면을 실로 엮은 흔적이 드러난다. 파리의 파인아트 프린팅 스튜디오 이뎀(IDEM)과의 협업으로 진행한 판화 에디션이다. 상반신과 하반신의 반전된 이미지는 한 화면에서 서로 연결되며 색다른 조화를 이룬다. 자수 작업을 하다가 남은 실타래를 조각 작업에 대입하기도 하는 등 그의 수많은 작업 사이에서 연결고리들이 발견된다.
본래 회화를 전공한 작가가 조각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런 여유에서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다가 새로운 영감을 위해 조각을 시작했다. 조각 작업을 하다 보면 또 그림에 대한 영감을 받아 새로운 그림을 그리곤 한다”며 “실타래로 엮는 작업 또한 매력적이다. 빈센트 반 고흐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는 생전 다양한 실타래를 조합해서 색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단지 색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생각이 오간 과정”이라고 말했다. 즉 작가에게는 그림, 조각의 장르 구별이 큰 의미가 없이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연결되는 것.
예컨대 상반신과 하반신 석판화를 연결시키는 것은 분리된 돌 등을 이어 배치시키는 조각 작업에서 영감을 받았고, 이 작업은 또 상반신 소프트 비닐과 하반신 가죽을 연결시켜 새로운 조각을 탄생시키는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페로탕 서울 측은 “작가는 조각을 전공하진 않았으나 이 점이 오히려 강점이 됐다. 전통 방식에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이런 저런 방법을 시도했다. 그 결과 이것저것 다양한 소재와 아이디어를 모아 바느질한 것 같은 조각이 탄생했다”고 밝혔다.
이토록 표현 방식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모호한 대상을 등장시켜 인간에 대한 관심을 끌어낸다는 점. 작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가식과 겉치레 없이 오롯이 인물만을 끌어낸 작가의 작업은 미처 바라보지 못한 인간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는 동시에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따뜻하고 독특한 시선을 느끼게 해준다. 전시는 페로탕 서울에서 11월 18일까지.
한편 작가는 1969년 일본 시마네 현 출생으로, 1992년 무사시노 대학 유화과를 졸업했다. 동경과 홍콩을 오가며 거주 및 작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2007년엔 로버트 스토가 큐레이팅한 제5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됐다. 퐁피두 메츠 센터,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도쿄 하라미술관, 도쿄 현대미술관, 베를린 다임러 컨템포러리, 이스라엘 하이파 미술관, 뉴욕 재팬 소사이어티, 홍콩 타이쿤 등에서 전시를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