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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南에서 백두산은 '민족의 성산, 北에선 '혁명의 성산'…“주인 김정은 오니 날씨 갰다"까지

북한 주민에게 상식을 되찾아줄 힘든 작업,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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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2018.10.10 17:46:22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오늘 아침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들으면서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하는 발언이 나왔다. 이 방송에 고정 출연하는 북한 출신 기자는 고향(함경도)의 북한 친구들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발언이 나왔다고 전했다.

 

“백두산 날씨가 비가 오고 아주 나빴는데, 김정은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 방문 때는 날씨가 활짝 개어 현지 사람들이 ‘백두산도 주인이 오는 걸 알아봤는갑다’고 말하더라”는 요지였다.

 

이 발언에서 귀에 확 꽂히는 것은 ‘백두산이 주인을 알아봤다’는 부분이다. 

 

북한 사람들이 백두산의 주인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꼽을 리는 없으니 김정은 위원장을 북한 주민들이 백두산의 주인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 통용되는 이른바 ‘백두혈통’ 현상이다.

 

남한인이라면 백두산에 비가 오다가 갠 현상을 "백두산도 민족의 경사를 알아본다"고 표현했을지언정, 북한인처럼 "백두산도 주인을 알아본다"고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두산을 보는 남과 북의 시선은 이렇게 다르다. 

 

백두산 정상에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1992년 자신의 생일(2월 16일)에 새겨넣은 글귀. 남한에선 백두산이 민족의 성산이지만, 북한에서 백두산은 '김씨일가 혁명의 성산'이다. (사진=위키미디아)

 

‘백두산의 주인은 김씨일가’라는 북한인들의 상식

 

한민족의 백두산 신성화는 일제시대 때부터 거의 10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지만, 특히 심한 것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가 “백두산 정기를 받아 북한을 통치할 자격을 획득했다”고 대대적으로 세뇌공작을 진행해온 북한에서였다. 북한 주민들의 일상 대화에서 ‘백두산의 주인은 김씨 왕가’라는 대화가 나오는 걸 보면 이런 세뇌 작전이 완전히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이 얼마나 웃기고, 현실과 괴리된 것인지는, 만약 대구 사람들이 이런 발언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박씨 일가의 신화화가 북한에서처럼 이뤄져 “대구 팔공산의 정기를 받아 박씨일가가 대를 이어 남한을 통치할 자격을 획득했고 팔공산 정기를 받지 못한 사람은 통치권을 쥘 수 없다”는 당국의 세뇌공작이 완전히 성공을 거둬, 줄곧 비가 내리다가 박씨 성을 가진 대통령이 팔공산을 찾아간 날 마침 날이 개이면 대구 사람들이 “팔공산이 주인이 오는 걸 알아봤네”라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상당해보면 된다. 그런 대화가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이뤄진다면 박씨왕조가 완전하게 성립한 셈이 된다. 

 

“백두산은 원래 한민족과 별 상관없는 산”

 

일본제국주의에 나라가 먹히는 과정에서 백두산이 ‘민족의 성산’으로 탈바꿈 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내용을 한 번 잘 들어볼 필요가 있다. 

 

백두산을 민족의 발상지로 신성화하고 장차 그곳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민족이 소생할 것을 노래한 최초의 사람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 다소 성급히 말하자면, 최남선(崔南善)이다. [중략] 최남선이 ‘근참기’를 지은 것은 당시 조선 사람들이 백두산을 너무 경시해서였다.(서울대 이영훈 교수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28~29쪽)

 

많은 한국인들이 읽고 감동을 받은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1926년 작)는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최남선이 가슴 떨리는 마음으로 삼가 참배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백두산 신성화가 완료된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최남선이 민족의 성산을 참배하면서 감격에 휩싸인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이영훈 교수에 따르면 최남선이 이렇게 감동을 듬뿍 담은 근참기를 쓴 이유는, ‘조선 사람들이 백두산을 너무 모르고 경시해서’였다는 것이다.

 

대표적 친일 지식인 최남선-이광수가 가꾼 '민족의 성산 백두산'

 

백두산이 한민족과 거의 상관이 없었던 산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박근혜 정부의 국사 교과서 제정 움직임에 반대해 이른바 진보 사학자로 통하는 심용환의 책 ‘단박에 한국사 근대편’에도 나온다. 

 

백두산은 우리 역사와 그다지 관련이 없어요. 우선 고조선은 랴오닝 지방에서 발생했고 단군 신화에도 백두산 이야기는 없습니다. 고구려 역시 압록강변 근처인 졸본-집안 지역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백두산과는 무관합니다. 부여는 만주 복판이고 [중략] 통일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만 확보했기 때문에 백두산은커녕 평양도 장악하지 못했고, 꾸준한 북진 정책을 펼쳤던 고려 역시 함경북도 지방을 온전히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조선 세종 시대에 들어와서야 압록강-두만강 국경선을 확보한 것입니다. [중략]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으로 기리게 된 계기는 이광수, 최남선 때문입니다 [중략] 근대 기획의 산물입니다.(365~366쪽)

 

이영훈 교수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심용환은 아예 “백두산과 한민족은 거의 관련성이 없다”고 단정하는 식이다. 기마민족인 고구려는 산속이 아니라 강가(압록강변 졸본)에 도읍을 잡았으며, 한민족과 관련되는 그 어떤 종족 집단도 백두산을 근거지로 발흥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한민족과 무관했던 백두산은, 1926년에 조선교육회에서 주최하는 백두산 일대의 박물탐사단에 최남선이 참가하면서 동아일보에 1926년 7월 28일부터 1927년 1월 23일까지 총 89회에 걸쳐 연재하면서(다음백과 참조) ‘민족의 성산’으로 새롭게 각색되기 시작했다.

 

민족 위기 때마다 크게 대두된 단군신화-백두산

 

민족의 위기 때에 단군 신화가 크게 일반인에게 퍼졌듯(승려 일연이 ‘삼국유사’에 단군 신화를 실은 시기는 몽고 침략기), 일제 식민지로서 민족말살의 위기에 처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본에 후지산이 있다면 조선에는 백두산이 있다”는 식으로 근대 기획을 한 산물이 바로 백두산이라는 지적들을 위의 예문들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지식인들이 근대 기획을 통해 ‘민족의 성산’ 또는 ‘단군이 내려온 산’(사실 단군 신화의 원래 내용에는 백두산으로 특정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으로 신격화시킨 백두산은, 북한 김씨 왕조 치하에서는 거기서 여러 걸음 더 나아가 ‘백두혈통 김씨 일가에게 통치권을 부여한 산’으로 북한 국민 세뇌에 동원된다. 

 

그래서 지금 북한 쪽 백두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장군봉(‘장군’이란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김씨 왕가를 일컫는 말)이란 이름을 얻었으며,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다는 증인이 수없이 많아도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북한 안에서는 김일성이 백두산 깊은 곳에 설치한 항일 밀영(비밀 사령부)에서 태어났다고 북한 당국은 선전한다. 현 김정은 위원장도 장성택 숙청, 남북대화 재개 등 중요 결정을 앞두고는 꼭 백두산을 찾아 백두산 정기 아래서 결정을 내리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북한 내에선 '김씨왕가의 산' 된 백두산

 

이런 세뇌화 공작의 최종 결과물을 우리는 오늘날 “백두산도 주인을 알아본다”는 북한 주민들의 일상 대화를 통해 듣고 있는 것이다. 

 

70년이 넘은 남북 분단을 통해 남북한의 차이가 곳곳에서 심대하게 벌어졌지만,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보는 시각은 남북한 공통의 이미지로 이미 뿌리를 내렸다.

 

9월 28일 서울도서관 앞에서 열린 제68주년 서울수복 미디어아트ㆍ사진전에 내걸린 문재인 대통령 내외의 백두산 등정 기념 사진. 남한에선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인식하지만, 북한에선 '백두혈통의 산'으로 인식된다. (사진=연합뉴스)

그래서 백두산 부근의 삼지연공항과 서울을 연결하는 직항편이 연결되면 또 많은 남한 사람들이 성산을 찾아 현지를 방문하고 감격하겠지만, 백두산을 이미 ‘백두혈통 김씨왕조의 산(거의 사유재산 급의)’으로 생각하도록 세뇌된 북한인들이 남한인들의 ‘장군봉에서 눈물 흘리기’를 또 어떻게 받아들이도록 북한 당국은 활용할지는 자못 걱정스럽기도 하다. 


이래저래 분단의 상처는 깊고도 깊고, 그나마 정상국가에 속하는 남한인들이 ‘정정’해야 할 일 또한 엄청나게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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