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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북한인 生얼굴 보여주기, 소설은 시작했으니 이제 TV 차례

스토리 들려주며 얼굴 보여줘야 '거울 신경' 반응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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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10호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2018.10.17 15:02:39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1990년대 후반 북한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인 최소 30만 명 이상 굶어죽었다. 그동안 우리가 숱하게 들어온 얘기다. 헌데, 여기서 질문 하나. 30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눈물을 흘렸나? 적어도 필자는 아니다. 그간 숱한 책과 기사를 통해 이른바 ‘고난의 행군’ 당시의 아사 얘기를 들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통계숫자만 보고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한 소설가가 쓴 탈북인 이야기(장강명 작 ‘팔과 다리의 가격’)를 읽고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이 굶어죽는다는 과정, 굶어죽지 않기 위해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기를 반복하다가 팔 하나와 다리 하나가 없어진 탈북인 지성호 씨의 얘기를 읽으면서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강명 작 '팔과 다리의 가격'이 주는 충격

 

이런 게 바로 사람 심리의 맹점이다. 30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한다면, 지성호 씨의 얘기 같은 비극이 30만 번 일어났다는 소리다. 또는 장 작가의 말대로 '세월호 같은 배 침몰 사건이 매일 한 건씩 3년간 일어나면' 죽은 사람의 총숫자가 30만 명이 된다. 4년 전의 세월호 사건 하나가 아직도 한국인을 괴롭히는데, 그런 사건이 매일, 3년간이나 일어나는 정도라니 그저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그런데 그 30만 건을 아주 멀리서 통계 숫자로 얘기해줄 때는 그저 덤덤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 중 어느 한 사람을 클로즈업해 그 표정과 사례-실경험을 들려주면 듣는 자는 바로 몸소리를 치면서 비극을 몸으로 경험한다. 시리아 난민의 고통이나,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멕시코인들의 역경이 전체로서는 그저 그런 뉴스 중의 하나지만, 숨져 해안에 떠밀려온 어린이의 사진이나, 또는 밀입국 중 부모와 헤어져 우는 소녀의 사진이 전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진 위) 세르비아-헝가리 국경에서 헝가리쪽으로 철조망을 넘는 시리아 난민들(사진=위키피디아). 아래는 숨진 채 해안에서 발견된 시리아 소년의 사진이 보도된 뒤 유럽의 대응이 크게 달라졌다는 내용을 보도한 '민중의 소리' 인터넷 지면 캡처.

이런 게 바로 인간과 고등 포유류(개나 원숭이 같은)에 존재한다는 ‘거울 신경’의 작용인가보다. 사람은 고통스런 표정의 사진을 보면 고통스러워진다. 웃는 얼굴 사진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고통받는 사람의 사진을 보는 사람의 뇌 속 고통 감지 부위가 활성화되니 실제 고통을 받는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갓 태어난 마카크원숭이가 혀를 내미는 인간을 본능적으로 따라하고 있다. '거울 신경'의 작용이다. (사진 = 위키피디아)

헌데, 이 거울 신경의 반응을 일으키려면 아날로그적 수단이 동원되어야 한다. 고통받거나 웃는 ‘얼굴’ 사진이라야 거울 신경이 반응하지, ‘30만 명이 웃고 있다’고 디지털(숫자)적으로 알려줘봐야 거울 신경은 반응하지 않는다. 

 

‘북한인 30만 명이 이상이 굶어죽었다’는 뉴스도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고, 북한 거리에 방치된 시체의 사진 역시 비슷하다. ‘표정’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고난의 행군 당시에 김정일이라는 북한의 통치자에게 일말의 자비심이 있어 외부 세계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요청하면서 굶어죽는 북한인들의 ‘표정’을 전달했더라면, 그래서 한국인도 봤다면, ‘과연 30만 명 이상이 죽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굶어죽는 북한인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은 죄는 물론 1차적으로 고 김정일 위원장에게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입만 열면 "민족" "겨레"를 들먹이는 지상 최고의 쇼비니즘(국수적 민족주의) 인사들이 많은 남한 사람들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북한에서 30만 명 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1995년 당시 남한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라는 호황기였다. 김영삼 정권의 섣부른 경제 세계화 정책으로 외국 돈이 밀려들면서 벌어진 ‘돈 잔치’ 상황은 정말 대단했다. 필자는 당시 한국 경제의 흥청망청을 보면서 "야~, 정말 이렇게 돈이 많을 수도 있구나”하고 실감했었다. 그런 흥청망청이 영원할 줄 알았지만 역시 "너무 좋으면 끝물"이라고 1997년말 IMF 외환위기는 한국 국민에게 단말마의 고통을 지금껏 안겨주고 있다. 

 

너무 먹어서 토 나온 南, 공개총살 보고 헛구역질 北

 

그러나 1997년말 IMF사태 이전까지, 즉 1995~1997년 상반기까지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정말 기괴할 정도다. 남한에서는 돈이 넘쳐나 비싼 술과 안주들을 너무 많이 먹어서 곳곳에서 토가 나오고 있었다. 반면 정말로 가까운 북한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었다. 장강명의 책은 전한다. 굶다 못해 군부대의 식량창고에까지 도적질에 나선 주민들을 북한 당국이 공개총살했고 강제 동원돼 총살 현장을 본 주민들은 먹은 것도 없으면서 헛구역질을 했다고. 남한인은 배가 너무 불러서 토하고, 북한인은 총살형을 보고 토했다니, 뒤돌아보는 사람에게도 구역질이 난다.

 
남한에선 쌀이 넘쳐 낡은 쌀 보관비로만 수천 억 원씩을 쓴다고 한다. “민족”이라는 소리를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우파든 좌파든 한국의 정치 지향 세력들이 동포 30만 명 이상이 굶어죽을 때 넘쳐나는 쌀 처분도 하지 않았으니, 참 부끄러운 민족사의 한 페이지다.

 
장강명의 ‘실명 소설’에도 필자와 거의 똑같은 경험이 나온다. 한 번 들어보자.

 

고난의 행군이 벌어질 때 나는 20대 초반이었다. 당시 남한은 경제호황 속에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내 또래는 'X세대'로 불리며 호황의 거품을 만끽했다. 
그 시절을 흥겹게 다룬 드라마 ‘응답하라 1994’는 내가 대학교 1학년이던 시기, 내가 졸업한 대학을 배경으로 했다. 그 대학에서 북한까지 직선거리는 40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불과 몇십 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서 수십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몰랐고, 나중에는 기사를 몇 건 읽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흘려 넘겼다.
(118~119쪽) 

 

큰 인기를 끈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홍보 화면.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남한 사람들이 풍요를 구가하던 그때 북한에서는 1993년부터 식량 배급에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하면서 1994년도에는 식량 도둑에 대한 공개총살이 이어졌고, 1995년에는 배급이 완전히 끊기는 대비극이 발생했다.

 

지성호라는 소년이 어떻게 굶었고,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굶어죽었으며, 먹을 것을 구해 떠돈 북한인들이 어떻게 ‘인간 아닌 동물’이 돼 기찻간에서 남녀 가리지 않고 배설을 하게 됐는지의 과정 등은 장강명의 실명 소설을 읽으면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놀란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북한 개개인이 실제 굶어죽는 과정을 개개인의 표정과 스토리로 처음 접하게 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가 이 실명 소설을 왜 썼는지 자신의 입장을 밝힌 후기 부분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이런 글을 썼느냐. 
처음에 나는 한국 사회 역시 ‘석탄 자루’를 쫓고 있다고 생각했다. 손과 다리가 잘린 소년이 피 웅덩이 속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우리가 외면하고 있다고 믿었다. 내 몫을 남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그게 우리의 민낯이고 수준이다, 사람이 절박해지면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할머니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소년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들고 있던 잡석을 사고, 옥수수 면과 김치를 나눠 준 사람 말이다. 
그 할머니는 왜 그랬을까? 가끔 돌연변이처럼 인간들 중에 천사 같은 성품을 지닌 이가 있고, 소년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절체절명의 순간 그런 사람을 우연히 마주쳤던 걸까?
요즘 나는 그게 단순히 밤과 낮의 차이는 아니었을까 속으로 자문한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상대의 표정을 잘 알아차리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아무 도움 없이도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의 감정 상태를 신기할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 학포탄광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는 소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깜깜한 밤이었다. 할머니는 울고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밝은 아침이었다. 
나는 고난의 행군에 대해 들었고,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굶주림으로 신음하는 한 가족의 구체적인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 표정을 본다면 자기 석탄 자루를 찾는 일은 잠시 미룰 수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싶다. 내가 이 글에서 한 일도 그 표정을 전달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119~121쪽)

 

배경 설명을 하자면, 지성호라는 소년이 달리는 군용 화물열차에서 석탄을 훔쳐내다가(석탄을 훔쳐야 물물교환을 통해 굶어죽지 않을 수 있으므로) 열차에서 떨어져 손과 다리가 잘라 나가는 사고를 당한 뒤 “살려달라”고 스스로 놀랄 정도의 엄청나게 큰 소리로 외쳤지만, 역시 열차에서 석탄을 훔쳐 열차 밖으로 내던진 뒤 열차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석탄 가마니를 찾아 달려가는 같은 동네 주민들은 이 소년을 외면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마취도 없는 수술을 악다구니처럼 고함지르며 받아낸 소년 지성호가 죽을 지경이 돼 “사탕이 먹고 싶다”고 하자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거의 잡석뿐인 석탄 덩어리를 들고 팔러 나섰을 때 모든 사람들이 외면했지만, 할머니 한 분은 자기가 사주겠다며 돈을 주고 먹을거리까지 줬다는 얘기다.

 

북한 정세를 전한 1996년의 한 신문 지면. 북한 김정일 정권이 기만적으로 내건 '고난의 행군' 구호가 소개됐다. 

 

장 작가의 고백은 이런 거다. 처음에는 ‘황금(내 석탄 덩어리)를 쫓는 학포탄광 사람이나, 우리 남한 사람들이나 다 그렇지 뭐. 돈에 미친 한민족은 남한과 북한이 똑같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그러나 도움을 준 할머니를 곰곰 생각하면서 결국 ‘표정을 봤느냐 못 봤느냐가 차이를 가른 것 아닐까’라는 새로운 결론으로 이어지게 됐다는 경험담이다.

 

얼굴을 못 보는 밤과, 훤히 보는 낮의 차이

 
한밤중의 석탄 훔치기 과정에서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소년을 마을사람들은 외면했다. 그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소년 지성호의 얼굴은 못 봤다. 하지만 아침 햇살 아래서 도와달라며 우는 성호 엄마와 여동생의 ‘표정’을 본 할머니는 선행을 베풀었다.


장 작가의 이 얘기를 들으면서, 필자가 기왕에 품었던 생각, 즉 “이제 TV가 북한인의 표정을 보여줄 때다”(본보 6월 29일자 [때맞춰 책 읽기] 김정은만 알면 된다고? KBS ‘한국인의 밥상’이 북한 곳곳 찾아갈 날 기다리며, 7월 13일자 [때맞춰 책 읽기] KBS 보며 운다는 북한인들…jtbc는 또 얼마나 울리려고)가 옳았다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당시 이 두 글은 jtbc가 평양 지국 개설을 위해 대표단을 평양에 파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jtbc나 KBS가 남한 TV의 터치로 북한인의 표정을 방송하게 될 때 생길 엄청난 변화’를 상정하면서 썼다. 

 

탈북해 중국에 살고 있는 북한인 100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모은 책 강동완 , 박정란 저 '사람과 사람'(2015년) 

필자가 읽은 책 중 북한인의 표정을 제한적이나마 보여준 것은, 7월 13일자 [때맞춰 책 읽기]에서도 언급한 동아대 강동완 교수의 ‘사람과 사람’(2015년 발간)도 있었다.

 

강 교수는 중국으로 도피나온 탈북자 100명을 중국에서 인터뷰했다. 강 교수는 책 서문에서 “그들(재중 북한인)을 만나고 돌아온 늦은 밤이면 호텔방에서 엉엉 소리 내며 서러운 눈물을 홀로 쏟아냈다”(13쪽)고 밝혔다. 그들의 고통과 간난을 '내 몸으로' 만나면 펑펑 울지 않을 수 없다는 경험담이다.


물론 강 교수의 책은 탈북자 개개인의 신원을 밝힐 수 없기에 ‘30대 탈북 남성’ ‘60대 탈북 여성’ 식으로만 전했다. 개개인의 이야기로되 ‘표정을 보는’ 맛은, 장강명의 실명 소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책의 세계에서는 북한인의 실상이 이렇게 한발자국씩 전진하며 전달되고 있다. 2015년의 강동완 교수의 책에서 2018년의 장강명 작가의 소설은, 큰 진전이다. 

 

독재자도 출판 시장에 아주 작은 숨통을 터주기는 한다. 대세에 큰 영향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작은 숨통을 통해 거둘 수 있는 탄압 효과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세를 움직이려면 현대 미디어 사회에서는 TV가 움직여야 한다. 

책에 드러나는 북한인의 얼굴은 이렇게 점점 생생해지고 있지만, 책이 아무리 변해도 TV가 나서지 않으면 당장의 큰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한정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책은 ‘아주 특별한 소수’가 읽는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독재 정권은 제한적으로나마 책 세상은 열어 놓는다. 독재 정권을 비난하는 책이 발간될 여유를 아주 적은 틈만으로라도 열어 주면, 터질 것 같은 주전자 속의 열기와 고압이 일부 완화된다. 동시에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이런 책도 허락하는데 우리가 독재란 말이냐?”고 항의할 수도 있다. 게다가 책의 통로를 열어놓으면 ‘불량한 자들’의 명단까지 확보해뒀다가 여차직하면 일망타진하는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책의 세계는 선도-선발의 역할은 할 수 있지만, 고도 미디어 사회인 한국에서 TV가 나서지 않고는 대중을 움직일 수 없다.

 

책은 진화하지만, 변화 불러오는 건 TV

 
필자가 [때맞춰 책 읽기]를 통해 KBS ‘한국인의 밥상’이 북한 곳곳을 찾아갈 날을 기대한 것도 같은 이유다. 이제는 TV 카메라가 북한 곳곳을 찾아가야 할 때라는 것이다. 물론 북한 당국이 이런 남한의 카메라를 방치할 리 없다. 통제 사회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TV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의 표정을 과거 ‘당국이 허락하는 한도로만’ 접할 수 있던 2017년 이전과, 이런 통제자 없이 라이브로 그의 표정을 지켜본 2018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한인이 김정은 위원장을 보는 시각은 확 달라졌다. 이렇듯 한국 TV가 북한 현지인의 표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느냐 않느냐의 차이는,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눈다.

 

북한 당국의 제재는 여전하겠지만, 2017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이 넓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기대해본다. ‘북한인의 밥상’ 같은 프로그램이 KBS의 전파를 타면서, 북한인의 표정과 스토리텔링이 남한인에게는 물론 북한인에게도(왜냐면 북한인 태반이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 TV를 시청한다니) 전달될 그 순간을.

 

'김일성 수령의 1차 고난의 행군처럼 우리도 식량난을 맞아 2차 고난의 행군을 하자'는 북한 로동신문의 사설 내용을 보도한 KBS TV 화면. 북한 당국의 선전은 '2차 고난의 행군'이었지만, 북한 주민에겐 그냥 '배급 끊김'이었고, 남한 언론은 북한 선전선동 당국을 따라 당시 아사 사태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거대한 거짓말을 

우리는 왜 그대로 받아쓰나?

 

여기서 사족 한 마디. 우리는 북한의 90년대 후반 기아 사태를 '고난의 행군'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세월호 사건을 남한 국민들은 '있어선 안 되는 참사'로 받아들였지만, 박근혜정부는 '있을 수 있는 교통사고'로 규정하려 했고, 결국 그런 규정이 성공한 것과 같은 결과다.

 

그에 해당하는 장 작가 책의 한 부분을 보자. 

 

북한 사람들은 1990년대 중후반 당시 그들이 겪던 대기근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미공급'이라고 불렀다. 식량배급이 끊어졌다는 의미다. 이 참사에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북한 당국자들이었다.(54쪽) 

 

만일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로 규정하려는 박근혜정권의 노력이 안팎에서 모두 성공을 거둬 국민의 뇌리에나 외국인들에게나 모두 '그 해운 사고'라고 지칭하게 됐다면, 그게 바로 90년대 기아 사태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다. 

 

고난의 행군이란 무엇인가? 김일성 빨치산 부대가 1930년대 후반 일본 관동군의 토벌 작전에 밀려 소련 영내로 대피했음에도 불구하고(팩트. 그래서 김정일의 실제 출생지는 러시아의 하바롭스크), 북한의 선전선동 당국은 "김일성 수령은 고난에 빠진 동포들을 내버려두고 조국을 떠난 적이 없다. 깊숙한 백두산 산중에서 마오쩌둥의 대장정과 같은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일본군과 싸웠고 그래서 1945년에 김일성 수령의 지시로 일본군에 대한 대공격을 감행해 결국 일본군을 몰아냈다"고 북한 국민들을 교육시켰다(선전선동 거짓말). 

 

이른바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 거리의 아사자 모습. 그러나 표정이 없고 스토리가 없는 이 정도 사진 갖고는 인간의 '거울 신경'을 자극하기 힘들다.  

 

90년대 후반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북한 당국이 이를 '김일성 수령이 고난의 행군을 해냈듯, 이번에는 식량난을 제2차 고난의 행군을 하듯 이겨내자'고 선전선동하면서 '기아 = 고난의 행군'이란 공식이 생겨났고, 이를 우리 언론들이 그대로 받아쓰고 있다는 결론이 된다. 1차 고난의 행군이 거짓이라는 게 팩트라면 도대체 그 1차 거짓을 따라서 기아 사태를 이겨내자는 북한 당국의 선전 문구를 그대로 되뇌고 있는 우리는 뭔가? 우리 스스로의 가치 판단을 생략한 용어를 우리 언론과 당국이 그대로 쓰고 있는 현실이 또 한 번 참담할 뿐이다. 용어 정리부터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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