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2호 최영태 기자⁄ 2018.10.31 16:10:02
심리학 책을 보고 이광수 책을 떠올리게 되는 건 이상한 연상 작용이랄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 심리학 전문가 크리스텔 프티콜랭이 쓴 신간 번역서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를 읽으면서 필자에겐 내내 이광수가 떠올랐다. 여기서 이광수는 조선 신문학의 기수로서 젊어서 벌써 ‘조선의 3대 천재’(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중 하나로 불리며, 일제 치하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역임했던 바로 그 대단했던 이광수다.
프티콜랭 책의 주요 구절들을 보면서 이런 구절들이 왜 이광수를 떠올리게 하는지 한 번 점검해보자.
내게 상담을 받은 사람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중략] 자기가 들어갈 불구덩이를 제 손으로 열심히 파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중략] 명백한 상황을 왜 못 볼까? 너무 남을 쉽게 믿어서? 너무 관대해서? 아니면 사랑받고 싶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21쪽)
지식인의 특징 중 하나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일 게다. 이른바 좌파 또는 진보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보면 이처럼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신을 피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광수도 그랬다. 그의 나이 27살 때, 그는 3.1운동의 전조가 된 1919년 도쿄(東京)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2·8 독립 선언서’를 직접 썼다. 그리고는 곧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한 열혈 독립운동 청년이었다.
열혈 독립청년 이광수는 어떻게 ‘골수 친일파’가 됐는가
그러나 일제가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들어 이른바 ‘문화 통치’를 펼치고, 이어 1930년대 들어서는 일본 군대가 이른바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면서 중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전선에서까지 승전보를 계속 울리자 그는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사랑받고 쓸모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광수는 일본을 너무 믿었고, 너무 관대했고, 일본 제국주의(천황)에게 사랑받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불타올랐다.
과민한 감각을 타고난 사람은 예민할 수밖에 없다. [중략] 심리 조종자는 피해자의 지나친 감수성을 가지고 논다. 당신을 동요시키기란 너무나 쉽다. 투우장에 있는 황소처럼, 당신은 심리 조종자가 흔드는 빨간 천에 감정적으로 돌진한다!(‘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144쪽)
일제시대에도 바로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제는 당시 조선의 양반계급을 쉽게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조선 양반의 행태를 알아보니, 양반에게는 자신의 가문과 가족의 재산만이 중요할 뿐이고, 조선 양반에게 이런 특권만 적당히 보존해주면 과거 중국을 절대적으로 섬기던 자세를 일본 섬기기로 바꾸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사실을 일제 당국은 쉽게 간파했다. 그래서 보수 양반들에게 일본 작위를 줍네 또는 그들의 지주권을 보장합네 하면서 양반 가문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도쿄 유학생 등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아가고 감수성이 예민한 조선 청년에게 ‘빨간 천’을 흔드는 작업에서도 일제는 성공했다. 그 대표작인 바로 이광수의 친일이다.
생각 많은 지식인들이 잘 빠지는 함정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들은 상상력이 차고 넘친다. [중략] 이런 특성에 기대어 당신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당신이 알아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쓰게끔 내버려 두면 게임 끝이다.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78쪽)
이광수도 그랬다. 그는 생각이 많고 상상력이 넘쳤기에 “신라-고구려 시대에는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한 민족이었다”는 일제의 이른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일본과 한국의 조상이 같고 뿌리가 같다는 논리)’이 나오자마자 이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이 현실에서는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애쓰면서, 또 한편으로는 일본 학자들을 동원해서(물론 일본 학자들은 자신이 ‘성실한’ 연구를 한다고 자위했겠지만) 내놓은 동조동근론을 이광수를 비롯한 친일 지식인들은 애타게 갈망하던 학술 이론이라도 나온 것처럼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동조동근론은 쉽게 말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위대한 고구려, 위대한 신라는 일본과 같은 뿌리의 문화여서 일본만큼이나 융성했지만, 고려 때부터 중국의 유학을 숭상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한반도는 망가지기 시작해 식민지가 됐다’는 내용이다. 즉 중국의 영향을 뿌리치고(즉, 중국에 대해 조선은 독립을 선언하고), 새로운 ‘형님 나라’로 일본을 모시면 예전의 위대했던 고구려 만큼의 한민족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바로 동조동근론의 내용이었다.
동조동근론을 일본인보다도 더 숭상한 이광수였기에 그는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 명령이 내려진 바로 다음날인 1940년 2월 11일에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郎)로 바꿔 당국에 신고하고는 이런 궤변을 내놓는다. “원래 우리 조상은 일본식 네 글자 이름을 썼었는데 중국을 사대하면서 중국식 세 글자 이름으로 바꾸게 된 것이므로 일본식 네 글자 이름을 쓰는 것이 오히려 민족적”(이경훈 저 ‘이광수 친일소설 발굴집’ 105쪽과 444쪽에서 인용)이라는 주장이었다.
심리 조종자를 피해자가 지켜주고 그들의 파괴력을 증폭시켜서야
악당을 도와주고 그에게 수단, 핑계, 알리바이, 보호를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공모자’ 소리를 들어 마땅하다. 자, 이것이 여러분의 친절, 악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 화합하며 살고 싶은 욕구, 누구나 알고 보면 좋은 면이 있다는 신념, 남에게 도움이 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 결국은 사랑으로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화신이 이우러져 빚어낸 결과다. [중략] 결과적으로는 여러분이 그들의 대의를 지켜 주고 그들의 파괴력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239~240쪽).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집어삼킬 때는 일-한의 선조-민족이 같다는 동조동근론-내선일체론(內鮮一體: ‘내지/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주장)을 주창하더니, 조선 정복을 완결짓고 이어 중국-만주를 먹으러 쳐들어가면서는 이른바 만선사(滿鮮史: 만주와 조선의 조상이 같고 역사가 긴밀히 연결된다는 이론)를 내세운다. 먹고싶은 대상에 따라 학설이 달라지는 전형적인 어용 학문의 모양새다.
이처럼 학문의 내용은 제국주의의 현실적 목적에 따라 춤을 추지만, 이광수 류의 모자란 조선 지식인들은 크리스텔 프티콜랭의 심리 분석 그대로 ‘내가 선하듯 그(일본제국주의)도 선할 거야’ ‘일본 제국주의도 알고 보면 좋은 면이 있어’ ‘내가 일본제국주의를 사랑하면 일본제국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야’라는 도착된 신념을 발전시키면서 결국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천황을 위해 죽어라. 그게 조선민족을 위하는 길이다”라는 궤변으로까지 나아간다.
프티콜랭의 분석대로 ‘머리는 좋되 심지는 굳지 못한’ 조선의 최고 지식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대의를 지켜주고 그 파괴력을 증폭시키는 ‘일본인보다 더 천황을 사랑하는’ 친일파로 거듭나게 되는 현상이다.
“목소리를 듣고 한계를 그어라”
저자 프티콜랭은 이렇게 남에게 조종을 받기 쉬운 예민한 사람(지식인),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 대한 치료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심리조종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즉 생각이 아니라 직감을 믿어야 하며) 2. 넘어와서는 안 되는 불가침권을 정해야 하고 3. 예의 없고 일관성 없게 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제를 조선인 지식인에 대한 심리조종자로 본다면(지식인의 마음만 얻으면 조선인 전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므로), 프티콜랭의 조언대로 이광수 등이 들었어야 할 ‘마음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크게 두 가지였을 것 같다. 하나는 이광수 자신의 마음 속 깊은 원한의 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이광수처럼 잘난 사람(大신문사의 편집국장이시면서 문학계의 큰별이신)이 만나기 쉽지 않은 민초들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우선 이광수 자신의 경험을 한 번 보자. 일본 연구 전문가인 김시덕 교수의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제1회 대동아 문학자 대회(1942년 도쿄에서 개최)에 참가한 이광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순응하고자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데에 고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 고뇌를 자기보다 어린 일본인 문학자에게 말했다가 호되게 비판 받기도 했다.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있다는 친일파 이광수의 소극적인 항거를, 동료 일본인 문학자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이광수는 천황의 이른바 일시동인(一視同仁: 모든 제국 신민을 천황이 똑같이 인자하게 사랑해준다는 의미) 구호에 감읍하는 척 하면서 ‘천황이 조선민족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도 천황을 사랑해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자’고 논리를 폈다. 그러나 대동아의 문학자가 단결하기 위해 모였다는 문학 대회에서는 조선 최고의 대문호인 자신이 일본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문인들로부터 비판을 당하는 우스운 꼴을 당하고 괴로워했다는 스토리다.
조선인이 아무리 천황을 사랑해도, 바꿔 말하면 이광수 자신이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일본 본토인에게는 그저 ‘머리가 좀 깬 토인’ 정도 대접 밖에 못 받는다는 사실을 자신이 스스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광수는 온갖 궤변을 동원해 ‘더욱 더 천황을 사랑하면 된다’, ‘조선인이 같은 일본제국주의 국민임을 일본인들에게 일깨워줘야 한다’는 궤변으로 나아간다.
이경훈 교수의 책 ‘이광수 친일소설 발굴집 -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선일체가 되는 것을 허락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은 천황의 대어심(大御心: 아주 크신 마음)이므로 내지인(일본인)이라고 이러쿵저러쿵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자유의 모습과 관련되어, 결국 한국인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일본인에게조차 내선일체를 설명하는 일종의 ‘계몽으로서의 전향’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즉 춘원은 내선일체를 논하며 피식민지인으로서 역설적인 당당함을 보여주는데, 이는 ‘무정’이나 ‘흙’으로 대표되는 춘원의 계몽적 자아가 친일문학에서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음을 의미한다.(442쪽)
즉 이광수는 조선인에 대해 궤설로 계몽을 하는 데서 한 발 더나아가, 이제는 일본인에 대해서까지 ‘너희는 아직 천황님의 진심을 몰라’라면서 계몽과 지적질을 하는 얼토당토 않은 단계로까지 갔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광수든 21세기 한국인이든, 제대로 목소리 듣고 한계 분명히 그을 줄 알아야
이광수가 들었어야 할 또 하나의 목소리는, 징용-위안부 등으로 고통받아 신음하는 조선 민중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동조동근이니 일시동인이니 만선론이니 하는 일제의 거짓말에 조선의 하층 민초들이 이광수만큼 120% 속아넘어가지 않았음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에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광수의 말대로 천황과 일본인들이 뿌리가 같은 민족으로 조선인을 대했고 조선의 민초들이 그걸 느꼈다면, 천황의 이른바 옥음(玉音)방송(천황이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미국에 대한 항복 선언을 라디오로 방송한)을 들으며 일본 국민들이 대성통곡을 했듯 조선인(당시 국적상 일본인) 역시 광화문 거리 등에서 대성통곡을 했어야 하지만, 웬걸,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조선인들이 신이 나서 겅중겅중 뛰었다. 이광수 류의 친일 지식인들이 얼마나 현실과 괴리된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반증이다.
여기서 퀴즈 하나. 이광수 류의 일제 치하 최고봉 지식인들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목소리를 외면했고, 거리의 시민 목소리도 듣지 않아서 결국 폭망했는데, ‘21세기 한국의 지식인들은 다른가?’ 하는 질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세금 도둑 大기획’인 4대강 사업에 대해 찬성하면서 박수를 치고 반대파를 겁박한 국토부의 관리들, 주요 대학의 토목공학 전문가들은, 이명박근혜 시대에 혜택을 봤음은 물론 지금도 버젓이 대학과 과천정부청사에 군림하고들 계신단다. 이들 역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의 ‘학자-공무원로서의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한 분들이며, ‘거리의 개-돼지 같은’ 백성과는 담을 쌓으신 분들이다.
이광수만도 못한 21세기 관변 지식인들
자신의 책에는 ‘국가보안법은 문제가 많다’고 써놓았으면서도 일단 박근혜 전 대통령의 눈에 들어(아니, 최순실의 눈에 들어서가 팩트일 수도 있지만) 관로(官路) 출세길에 접어든 이후에는 아무 설명도 없이 자신의 유명한 책의 내용들을, 아무 설명-변명도 없이 무시한 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의 행태에 이르러서야, “이광수만도 못하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족하다.
왜냐면, 이광수는 그대로 궤변이나마 ‘나는 이래서 친일을 했다’고 구차스럽게 변명을 늘어놓고, 자기 나름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21세기 한국의 짝퉁 보수 쪽에 발을 디밀고 있는 이른바 폴리페서(정치 지향 교수 출신)나 전직 관료들은 이런 궤변-설명-이론세우기도 없이 그냥 입을 다문 채 누릴 것만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면 민족주의고, 친일이면 친일이지
어떻게 그렇게 줄을 그을 줄 모르나?
웃기는 현상은 또 하나 있다. 이광수의 논리를 ‘친일 내셔널리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바로 뉴 라이트 학자군의 대표로 꼽히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광수가 ‘나의 변명’에서 쓴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나온다.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나중에 발언권이라도 생길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 [중략] 만약 일본이 승전하면 협력으로 얻어낸 발언권을 토대로 내선(內鮮)차별(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르는 차별)을 제거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훈련을 받아 민족적 실력을 양성할 기회가 생길 것, 혹 일본이 패전하더라도 우리가 책임질 일을 없을 것이라는 계산 [중략] 협력하지 않았는데 일본이 승전하면 보복만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김욱 저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 박근혜 문제인의 사과가 말해주는 것들’ 64쪽)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해 중국-동남아-태평양까지 거머쥐면, 그 대일본제국 안에서 일본인은 1등 국민이요, 조선인은 2등 국민으로서, 중국인 등 3등 국민 이하 위에 군림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다는 것이 바로 ‘친일 내셔널리즘’의 알맹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실제로 일본이 만주에 세운 만주국(1932~1945년) 시대에 벌써 실현됐었다. 만주국에 진출한 조선인의 임금은 일본인보다는 훨씬 적었지만 중국인보다는 훨씬 높았기 때문이었다.
친일 내셔널리즘은 이런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한 대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지만, 우리 조선인은 중국인과 동남아시아인 등 3등 국민 이하를 두 대 때리면 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다.
하지만 이런 친일 내셔널리즘은 일본의 패망으로 처절한 최후를 맞았다. 물론 아직도 한국에는 일본이 심어 놓은 ‘왜정(일본 통치) 때가 좋았다’는 논리가 노년층을 중심으로 시퍼렇게 살아 있다. 물론 이런 심리는 마음속으로는 ‘왜정 때가 좋았다’지만 표면적으로는 숭미(崇美)로 나타난다.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서 성조기가 등장하는 이유다. 그들은 친일에서 숭미로 나라를 갈아탔을 뿐이다.
'외국을 믿는 우파 민족주의'가 가능한 지구상 유일국?
친일 내셔널리즘이란 게 글자 그대로 ‘외국을 믿는 민족주의’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일본에 그렇게 속았으면서도 아직도 일본을 믿듯(박근혜 전 대통령이 ‘일본에 불리한 판결을 대법원이 내리면 한일동맹에 지장을 준다’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지시를 내린 게 바로 이런 믿음에 근거한다), 아직도 특정 외국을 믿는 내셔널리즘들을 계속하고들 계시나고.
프티콜랭의 마음 치료법 두 번째 처방은 ‘넘어와서는 안 되는 불가침권을 정하라’였다. 이 처방을 이광수 류의 지식인 또는 21세기 한국의 외국 신봉 세력에 들이밀자면, 제발 모순에 빠지지 말라는 주문이 된다. 외국 신봉과 민족주의(내셔널리즘)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냥 어울릴 수 없는 두 주장이다. 외국을 도우면 돕는 거고, 한민족을 도우면 돕는 거지, 외국을 도움으로써 한민족에 도움을 준다거나 하는 건 그냥 궤변에 불과하다. 넘어서는 안 될 라인들을 제대로 그어서, 자신의 마음에는 물론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들을 좀 안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