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0-621합본호 김수식⁄ 2018.12.19 17:31:08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유리 천장’을 깨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해외에서 여성 임원 비율 30% 확대를 위해 ‘여성이사 할당제’ 등 다양한 제도가 시행 중인 가운데 국내에서도 삼성, LG, 롯데 등 대기업들이 여성 임원 확대에 적극적이지만, 견고한 유리 천장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2019년 인사 시즌을 맞아 주요 대기업들이 얼마나 여성 임원을 늘렸는지 확인해봤다.
연말 정기인사에서 여성 임원 승진 줄지었지만…
주요 대기업의 연말 정기 인사에서 여성 임원 기용이 늘어나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최초 여성 부사장, 최초 임원 등이 잇따라 탄생했다.
삼성그룹의 IT 계열사인 삼성SDS는 지난 12월 6일 윤심 연구소장을 신임 부사장으로 승진 발탁했다. 삼성SDS가 여성 부사장을 발탁한 것은 1985년 설립 후 33년 만에 처음이다.
윤 부사장은 중앙대를 졸업하고 파리제6대학에서 석·박사를 취득했다. 1996년 삼성SDS에 입사해 2005년 인큐베이션 센터장, 2011년 전략마케팅 팀장을 역임했다. 2012년에는 전무로 승진했다. 당시 그는 모바일 정보서비스 개발 및 마케팅 전문가로 활약하며 수주율을 23%로 끌어올리고, 금융과 공공 부문 특화 플랫폼을 확보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13년부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분석, 블록체인, 보안 등의 신기술 개발 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윤 부사장 외에도 삼성SDS는 전무 1명과 상무 2명을 승진시켜 전체 여성 임원 수가 사상 최대인 10명으로 늘었다.
삼성전기도 같은 날 이정원 중앙연구소 기술전략팀장을 상무로 승진시켰다. 삼성전기 창립 이래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된 그는 재료·센서소자 개발과 기술기획을 담당하며 전사 개발전략 수립, 융복합 개발과제 리딩 등의 공을 인정받았다.
삼성화재에선 오정구 서울 송파지역단장이 상무로 승진해 ‘고졸 출신 여성 임원 1호’가 됐다. 삼성화재 관계자는 “고졸 출신 여성을 임원으로 발탁해 조직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확보하고 성별-학력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른 인사 철학을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롯데그룹은 2012년 여성 임원 3명을 처음 배출한 이후 올해 초 정기인사에서 여성 임원 30여 명을 승진시켰다. 6년 만에 10배 증가한 수치다.
또 롯데그룹은 올해 초 롯데쇼핑에서 분리된 드럭스토어 체인 ‘롭스’의 첫 대표이사로 선우영 상무를 선임, 처음으로 여성 최고경영자(CEO)급 임원을 배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여성 임원을 늘리고 있다.
당시 롯데그룹은 선우영 대표이사에 대해 “롯데하이마트에서 생활가전 상품 관리, 온라인부문 업무 등을 수행하며 옴니채널 사업 성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며 “섬세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롭스의 상품 소싱과 온라인 사업을 이끌며, 고객 니즈에 부응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LG그룹은 7명의 신규 여성 임원을 선임했다. 이번 인사를 통해 그룹 여성 임원 수는 지난 2014년 14명에서 29명으로 4년 만에 2배 이상 늘었다.
LG그룹이 계열사별로 선임한 여성 임원은 김경아 LG CNS(L&D담당) 상무와 이은정 LG전자(인사담당) 상무, 전경혜(CWM추진담당) LG유플러스 상무, 안정헌 LG화학(기초소재연구소) 수석연구위원(상무), 정혜윤(홈·미디어마케팅담당) LG유플러스 상무, 문선화 LG생활건강(M&A·IR부문장) 상무, 김이경 ㈜LG(인재육성담당) 상무 등이다.
이외에 LS그룹은 창립 이래 최초의 여성 임원으로 이유미 ㈜LS 이사를 발탁했으며, GS그룹은 공채 출신인 조주은 신임 상무를 배출했다.
세계 기업이 주목하는 ‘여성이사 할당제’… 국내 도입은?
이처럼 국내 기업들이 ‘유리 천장’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성 임원 수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국내 5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수는 454명으로 전체 임원의 3%에 불과하다. 전년(406명·2.7%)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21.8%)에는 한참 못 미친다. 심지어 500대 기업 중 328곳은 여성 임원이 단 1명도 없다.
반면, 글로벌 기업들은 여성 임원 비율 30%가 목표로 삼고 있을 정도로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많다. 아예 ‘여성이사 할당제’를 채택한 나라도 있다. 여성이사 할당제는 임원진에 일정 비율 이상의 여성이 포함되도록 의무화한 제도다.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할당제 목표를 맞추지 못한 기업은 벌금뿐 아니라 상장 폐지가 될 수도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주가 처음으로 여성이사 할당제를 도입했다. 이곳에 본사를 둔 상장기업은 2019년 말까지 적어도 여성 임원 한 명을 둬야 한다. 이를 어기면 최대 30만 달러(약 3억 4000만 원) 벌금을 물어야 한다. 또 2021년 말까지 이사회 규모가 5명일 경우 2명, 6명이면 3명의 여성 임원을 두도록 순차적으로 제도가 강화될 예정이다.
유럽에서는 노르웨이가 2003년에 가장 먼저 ‘40% 할당제’를 시행했다. 이어 아이슬란드(2006년), 스페인(2007년), 프랑스·이탈리아(2011년) 등으로 확산됐다.
아시아에서는 말레이시아와 인도가 먼저 움직였다. 말레이시아는 2011년부터 대기업 이사회의 30%를 여성으로 뽑아야 한다는 제도를 만들었다. 2016년 기준 대기업 여성 임원 비율은 16.6%로 5년 전(7.6%)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인도는 ‘모든 상장기업은 1명 이상의 여성 임원을 둬야 한다’는 정책을 펼치면서 여성 임원 비율이 12%를 넘었다.
기업 성장 위한 열쇠, 여성이 쥔 경우 많은데…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여성 임원 확대에 노력하는 이유는 여성 임원의 확대가 곧 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에 열린 세계여성이사협회(WCD) 한국지부 창립 2주년 포럼에서 김수이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아시아태평양 대표는 “이사회가 다양성을 갖추고 있을 때, 더 좋은 재무실적을 내고 가치 창출에도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세계 주요 연기금 가운데 올해 상반기 가장 높은 수익률(6.6%)을 기록한 CPPIB는 기업 지배구조의 핵심인 이사회에서의 여성 비율을 중시한다. 다양성과 전문성을 높여 장기 투자할 때 불필요한 위험을 줄이고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