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0-621합본호 김금영⁄ 2018.12.26 17:21:51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나는 50년 혹은 100년 후의 대중을 기다리고 싶다. 이들이야말로 내 관심을 끄는 이들이다.”
생전 마르셀 뒤샹이 전했다는 이야기다. 변기를 예술품이라며 전시장에 내놓고, 전통적인 캔버스에서 벗어나 유리에 작업하고, 젠더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기 전 이미 제3의 성을 이야기하는 등 고정된 틀에서 벗어난 작업으로 ‘현대미술의 선구자’라 불려 온 뒤샹. 그의 시선은 이미 그가 살던 당시대를 벗어나 다양한 예술 담론이 펼쳐지는 미래에 와 있었다.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국립현대미술관이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공동 주최로 뒤샹의 삶과 예술을 집중 조명하는 ‘마르셀 뒤샹’전을 12월 22일~2019년 4월 7일 연다. 티머시 럽 필라델피아미술관 관장은 “오늘날 미술을 공부하는 학자들, 예술가들에게 뒤샹은 중요한 존재다. 뒤샹 컬렉션을 전 세계와 공유할 필요성을 느껴 일본, 호주 등의 기관과도 협력하고 있다”며 “뒤샹이 남긴 중요한 유산들에 대해서는 아직 토론의 여지가 있으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예술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번에 한국에 뒤샹의 다양한 작품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전시는 뒤샹의 회화, 조각, 드로잉, 판화, 레디메이드 등 작품 150여 점을 선보인다. 작품을 소개함과 동시에 뒤샹의 삶을 함께 따라가도록 그의 유년기 시절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 순차적 흐름에 따라 전시 섹션을 4부로 구성했다. 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 미술관 큐레이터는 “‘샘’ 등 뒤샹의 작품은 너무도 유명하다. 하지만 한 작가, 한 인간으로서의 뒤샹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이번 전시는 미술계 관례를 따르지 않은 독창적인 그의 작업관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의 삶을 함께 살피면서 예술의 영역까지 아우른다”고 밝혔다.
1부는 뒤샹이 청소년 시절부터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 등 당시 프랑스의 화풍을 공부하며 제작했던 그림과 드로잉을 선보인다. 특히 뉴욕 아모리 쇼에 전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1912년 작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가 전시돼 눈길을 끈다.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1912년 봄 파리에서 열린 현대미술 전시회인 살롱데 쟁데팡당에 출품된 이 작품은 뒤샹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작품이다. 누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굉장히 주체적인 움직임을 담은 데다, 이 누드 형상을 움직이는 기계로 묘사하는 등 기존 미술계 관례에서 보면 터무니없어 보일 수도 있는 작품이었다”며 “입체파 동료 몇몇이 뒤샹에게 작품에서 몇 부분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하는 등 논란이 있었지만, 이 작품으로 뒤샹은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고 설명했다.
평범하지 않았던 뒤샹의 예술 세계는 2부에서도 이어진다. 뒤샹이 회화 기법과 화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예술가로서 작업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안했던 1912년 가을 이후의 시기를 조명하는 섹션으로, 뒤샹이 미술계 기존 상식에 도전한 ‘레디메이드’ 개념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샘’과 ‘자전거 바퀴’를 볼 수 있다. 이조차도 오리지널이 아닌, 1950년 복제된 레디메이드 작품이다. 오리지널 ‘샘’은 1919년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매슈 애프런 큐레이터는 “원본의 희소성의 개념을 뒤튼 뒤샹의 성향”이라고 짚었다.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뒤샹은 붓을 손에서 놓고 캔버스를 재봉실로 꿰매는 ‘초콜릿 분쇄기’, 캔버스를 벗어난 구조물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 등을 통해 전통적인 회화 작업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했다”며 “또한 이 시기 그는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가졌고, 그 결과물로 기성품을 예술로서 활용하는 레디메이드 개념을 선보였다”고 밝혔다.
뒤샹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샘’
앞선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도 대중에게 충격적이었지만 ‘샘’ 또한 미술계를 발칵 뒤집었다. 뒤샹은 알 머트라는 가명을 사용해 변기 작품 ‘샘’을 1917년 열린 독립예술가협회의 전시에 출품했고, 논쟁의 결과 결국 ‘샘’은 전시되지 못했다. 이지회 학예역구사는 “뒤샹이 협회의 결정에 반발하며 강조한 글에서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뒤샹은 변기를 본래 지니고 있던 기능적 의미를 상실시키는 장소에 갖다놓는 선택을 했다. 즉 선택에 의해 새 오브제를 창조한다는 개념으로, 단순 물질이 아닌 아이디어 자체를 앞세우려 한 것이다. 이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현대 미술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짚었다.
3부는 1920년대 1930년대 뒤샹이 파리로 다시 돌아와 작업하던 시기를 살펴본다. 여기서 강조되는 건 뒤샹의 또 다른 정체성인 에로즈 셀라비로, 제3의 성을 추구한 그의 삶이 드러난다.
뒤샹은 예술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보였는데 체스도 그 중 하나였다. 미술에서 체스로 직업을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20년 동안 체스 활동을 이어갔으나, 예술을 완전히 손에서 놓은 건 아니었다.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만들어 새로운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뒤샹은 장 크로티와 쉬잔 뒤샹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로즈 셀라비는 1920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성전환을 한 것이다. 내 개인적 취향에는 로즈는 가장 ‘추한(醜漢)’이고 셀라비는 ‘세라비(C’est la vie, 그것은 인생)’의 단순 말장난”이라고 셀라비를 소개하기도 했다. ‘에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은 여장을 한 뒤샹을 만 레이가 카메라에 담은 작업이다.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이 시기부터 뒤샹의 많은 작품에 그의 본명과 함께, 혹은 단독으로 에로즈 셀라비의 이름이 단독으로 새겨졌다. 뒤샹과 셀라비가 같이 활동을 시작한 셈”이라며 “뒤샹은 젠더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기 오래 전 이미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예술을 펼쳤다. 상반된 것의 조화를 즐긴 그의 삶이 예술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섹션에서 뒤샹이 만든 이동식 미술관 ‘여행가방 속 상자’도 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샹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 속 미국과 프랑스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작품이 전쟁으로 훼손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중요한 작품들을 2차원과 3차원의 미니어처 복제품으로 만든 뒤 전시용 상자에 넣어 보관했다. 이 상자는 300여 개가 제작됐다.
마지막 4부는 뒤샹의 생애 마지막 20년 시기를 따라간다. 1950~60년대 이미 유명 작가가 된 뒤샹에게 더 이상의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하지만 1946~1966년 무려 20년 동안 뒤샹은 마지막 역작인 ‘에탕 도네’에 열중해 있었다.
필라델피아미술관에 영구 설치된 조각-건축물인 ‘에탕 도네’는 이번 전시에서 디지털로 구현된다. 큰 문에 뚫려 있는 두 개의 구멍을 들여다보면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마네킹의 포즈가 보이는 작품으로, 에로티시즘과 섹슈얼리티가 녹아 들어가 일상의 경험을 뒤흔들었다. 결국 뒤샹은 생애 첫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예술에 몰두한 것. 그가 과거에 보낸 편지가 현재의 우리에게 도착한 느낌이다.
한편 전시실 앞 열린 공간에서 한 달 동안 전시와 연계한 교육·문화프로그램이 열린다. 미술관이 마련한 기성품을 활용해 레디메이드 작품을 만드는 ‘레디메이드 워크숍’, 작품 카드로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갤러리를 구성하는 ‘마르셀 뒤샹 작품카드’ 등 참여형 워크숍이 운영된다.
또한 예술적 정체성을 의상과 소품으로 표현하는 문화 프로그램 ‘마르셀 뒤샹 그리고/혹은 에로즈 셀라비’ 상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겨울방학 기간인 1~2월은 큐레이터 토크와 뒤샹 연구자들을 초청해 학술 대담회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