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2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2019.01.14 09:19:42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컨템포러리 미술연구소 리포에틱 소장)) 영화 ‘아워 소울즈 앳 나이트(Our Souls at Night)’(2017)는 노년의 삶을 다룬 영화다. 나를 포함한 누구나 처하게 될 노년의 현실과 심리가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어 무거운 울림을 준다. 영화에 대한 검색을 하던 중 작년 8월 ‘아워 소울즈 앳 나이트’에 출연했던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가 배우 은퇴를 선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의 내용과도 이어지는 것 같은 현실 속 기사였다. 과거에 비해 나이 듦이라는 주제를 다룬 영화가 자주 눈에 띤다.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아 외로움에 슬퍼하는 모습, 투병기, 자식들과의 갈등 혹은 희생, 남은 인생을 위한 도전기 등, 영화의 내용도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해는 늘 희망차고 밝다.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시작은 우리가 한 살 더 나이를 먹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이 든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원리다.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새해 첫 칼럼에서 이야기하기에 조금은 슬프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나이 들고 언젠가 죽을 것이다. 동안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젊어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바탕에는 종착지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심리가 깔려 있을지 모른다. 이전의 칼럼에서 이야기했듯, 오늘날의 미술에서 노화와 죽음은 예상보다 많이 다뤄진다. 영원한 미와 가치를 이야기하던 미술은 이제 영원하지 않음도 포용하게 되었다.
순간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 듦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 주변의 미술인들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질문은 두 가지였다.
1. 나이 듦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2. 한 살 한 살 나이 들면서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미술(예술)을 대하는 본인의 태도(관점)에도 영향을 줄 것 같다. 스스로 느끼는 변화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김경민(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몸의 상태, 만나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들, 특정한 상황에 대처하는 반응 등이 변했을 때 나이 들었음을 느낀다. 분명 여유롭고 편해진 부분이 있다. 최근 들어 이전의 삶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막연한 미래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지금은 남아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이 주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간다. 개인적 견해로는,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늙음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인생이란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이고 그 과정이 나이 듦이다.
무언가를 터득할수록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전에는 시각적인 독특함과 흡입력, 반짝이는 아이디어 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제는 작가가 어떤 인생의 과정을 거쳤는지 작품의 이면을 보게 된다. 시각적인 감동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어떤 삶의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또한 작품을 조금 더 넓은 시각으로 보려 노력한다. 예를 들어, 이경미 작가처럼 삶의 과정을 작품에 오롯이 녹여낸 작가들에게 시선이 간다. 개개인의 삶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특별하다. 한 사람(작가)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으면 작품에 대한 미학적 분석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전시를 기획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인생에 점점 더 관심 커져”
김나연(진화랑 큐레이터/디자이너): “연말연초, 주변 사람들 신상의 변화를 확인했을 때, 아니면 내가 관심을 갖는 이슈가 나도 모르게 바뀌어 있을 때 시간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나이 듦은 내가 선택하고 책임 질 영역이 넓어졌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어른이 되는 것, 즐겁게 늙는 것이 꿈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저 숫자 나이가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생각이 점점 바뀌게 되었다. 그게 어른이 되는 과정인 것 같다.
아직 큐레이터로서 나이가 많지 않아서인지 미술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취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예전부터 좋아했던 작가인 김주현, 리슨 투 더 시티(Listen to the City)의 작업은 지금도 흥미롭게 느껴진다. 취향이 유지되면서 관심 영역이 다양해진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지금은 미술을 통한 심리 안정과 치유에 주목하고 있다. 예전에는 관심 갖지 않았던 영역이다.”
이민영(아르코미술관 시각예술부 대리): “평상시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지는 않는 편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처음 만났을 때 나이를 묻는 경우가 아직도 많아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나이 들었음을 인지한다. 단어 그 자체로 나이 듦을 생각하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 예를 들어 대학 입학과 졸업, 취업, 결혼 등이 떠오른다. 나이가 들면서 나를 둘러싼 환경, 나의 사회적 위치가 변하면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도 당연히 바뀌게 된다. 나이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 중 무엇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바뀌는 것은 사실이다.
미술과 연결시켜 보면, 나의 경우에는 예전보다 작가의 삶에 관심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흥미로운 작품을 만나면 어떤 삶의 흐름이 있었기에 이런 작품이 나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또 하나의 변화는 오랜 기간 작가로서의 삶을 지속해온 분들을 향한 존경심이 커졌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처음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를 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긴 시간 동안 작가로서의 삶을 버텨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지속된 시간의 깊이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다급해지거나, 더 비워내거나
권화영(전시해설사): “조금 우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이 든다는 것은 앞으로 살날이 줄어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기억력과 체력이 조금이라도 나을 때 하고 싶은 것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가끔은 조급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더 바쁘게 지내려 노력한다. 살아갈수록 경험이 축적되기 때문에 책 한 권을 읽어도 그 이해의 깊이가 달라진다. 똑같은 상황에 놓여도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다. 이런 변화는 미술을 마주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단순히 어렸을 때보다 지식이 늘어나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미술을 대할 때 체감하는 차이라면, 독립적인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감상했던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작가의 내면이나 삶의 이야기를 더 깊이 있게 보려 한다는 점이다. 작가의 생애, 그리고 전체 작업의 흐름에 내가 마주하고 있는 작품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보다 입체적으로 감상하게 된 것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작품을 이해하는 것도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전주연(작가): “아직 어린 편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나이 듦 그 자체를 많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CNB 표지 작가로 선정된 것이 2016년의 일이니 벌써 3살 만큼 늙었다(웃음). 오히려 학교라는 시스템 안에 있을 때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라는 시스템에 맞게 학년별로, 학기별로 나에게 요구되는 정확한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시간을 조율하는 프리랜서이다 보니 지금은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졸업한 후 취직을 했다면 조금 달랐을 것 같다.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보이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한 살 더 먹을수록 더 인정받고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 반대로 점점 더 비워내고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나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자유로운 시선으로 봤을 때에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져서인 것 같다. 작업도 마찬가지다. 점점 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작업하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조금은 덜 걱정하면서 스스로 판단하며 작업하는 부분이 늘어났다.”
“더 많은 작가 알게 되고 더 공감도 넓어져”
김민아(조형예술학 박사): “나이 듦에 대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늙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자연스러운 일은 죽음과 직결된다. 젊었을 때는 늙음(죽음)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몸에서 일어나는 노화의 결과를 보면 잔인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나이 듦은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어린 나무가 해를 넘기면서 고목이 되고 그 시간의 흔적이 축적되듯 인간의 내면(삶)에도 그 흔적이 쌓일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결국 유한한 시간과 맞서는 일인 동시에 내 앞에 놓인 시간을 채워가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이 듦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이미지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 묘지(The Abbey in the Oakwood)’(1810)를 꼽고 싶다. 어렸을 때에는 이 작품에 공감하지 못했었다.
특정한 작가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다는 것은 이미 나의 관심이나 배경 등과 일정 부분 맞닿는 지점이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연구를 마치고 나면 작가의 세계가 더 소중해진다. 작가의 삶과 예술에 더욱 깊이 동화되기 때문이다. 연구한 작가의 수가 늘어나다는 사실은 그만큼 소중한 작가가 늘어났다는 것이자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취향이 변한다기보다는 깊이 공감하고 아끼는 작가가 늘어난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연구자라면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작가의 예술 세계를 공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다른 이들에 대한 공감도도 높아질 것이다. 궁극적으로 예술(미술)이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본 글에 실리지 않은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질문을 들은 사람들 중 일부는 당황했고 일부는 진지해졌다. 필자와의 만남 이후 어렸을 때의 사진첩을 찾아보았다는 메시지를 보낸 사람도 있었다.
나이 듦이란 무엇일까? 갓난아기가 자라 성인이 되었다. 점점 흰머리도 늘어갈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이 변해가고 생각이 변해간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들의 대화 주제가 바뀌어 간다. 돌발 상황에 조금은 능숙하게 대처하는 나를 포함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여유로워지기도 한다. 모두 나이 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가? 절대 늙지 않고 영생을 누리고 싶은가? 논리적으로 실현불가능한 일이기에 애초에 이런 상상은 쓸모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몇 살인지,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하루하루 너무 바쁘고 분주해 내 삶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나이 듦’을 생각하는 것은 그저 우울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여태까지 살아온 삶, 앞으로 살아갈 삶의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숨 고르기를 하는 중요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