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라면 사랑은 특별하다. 비록 인스턴트 음식이지만, 뜨거운 국물에 중독성 있는 스프 맛은 외국에서도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한국인의 ‘소울푸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HMR(간편가정식) 시장이 성장하는 반면 라면 시장의 규모는 2조 원 언저리에서 맴돌아 ‘위기설’이 대두되고 있다. 이에 업계가 내놓은 카드가 바로 ‘건면’이다. 건면은 과연 라면이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을 개선하고, 다시 라면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1등 농심 신라면, 건면으로 돌아왔다
건면이 라면 시장의 새로운 승부처로 떠오르고 있다. 건면은 말 그대로 튀기지 않고 ‘건조시킨’ 면이다. 최근 라면 업계 부동의 1위 농심이 신라면 건면 제품을 출시하면서, 건면이 정체된 라면 시장을 반등시킬 비장의 카드가 될지 주목되고 있다.
농심은 지난 9일, 8년 만에 신라면의 신제품을 내놨다. 신라면-신라면블랙에 이은 세 번째 시리즈는 ‘신라면 건면’이었다. 농심 관계자는 “신라면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몸에 좋은 건면으로 진화한 3세대 신라면”이라고 전했다.
농심은 3세대 신제품 개발에 앞서 스프부터 새롭게 조정했다. 면의 속성이 바뀌면 국물 맛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농심은 기존 신라면 국물 맛을 유지하기 위해 소고기 농축액과 표고버섯 등을 보강했고 풍미는 조미유로 완성해 면과 국물의 어울림에 신경 썼다.
기존 맛은 유지하되, 면발은 건면으로 바꾸면서 더욱 쫄깃하고 가벼워졌다는 것이 농심 측의 설명이다. 칼로리도 일반 라면의 70% 수준인 350㎉로 낮췄다.
농심 관계자는 “2년의 개발 기간 동안 핵심 연구진들이 심혈을 기울인 노력과 2000여 회의 관능평가 끝에 신라면 본연의 맛을 살리면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신라면 Light 프로젝트를 완성해냈다”고 말했다.
출시된 건면 라면 종류는?
사실 건면은 갑자기 등장한 상품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건면의 제품화가 이뤄졌다. 농심이 지난 1997년 출시한 ‘멸치칼국수’가 대표적이다. 현재까지도 매니아 층이 두텁지만, 주류로 성장할 만큼 큰 관심을 받진 못했다. 하지만 최근 프리미엄·웰빙 트렌드가 떠오르면서 건면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기업들이 생겨났다.
농심은 이 분야에서도 강자다. 멸치칼국수 외에 둥지냉면, 콩나물뚝배기, 건면새우탕 등 총 10여 종의 다양한 건면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국내 건면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으며, 건면 전용 생산 라인까지 갖추고 있다.
이 가운데 대표 제품은 ‘둥지냉면’이다. 이탈리아의 파스타 제조기술과 농심의 면 제조 노하우가 결합된 ‘네스팅(Nesting) 공법’이 사용된 이 제품은 면발을 새 둥지처럼 말아 바람에 그대로 말려 냉면 특유의 쫄깃한 맛을 살리고 편리하게 조리할 수 있게 했다.
올해 약 1400억 원 정도로 예상되는 건면 시장의 나머지는 풀무원·오뚜기 두 기업이 양분하고 있다. 특히 풀무원은 건면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2011년 비유탕면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라면 시장에 진출한 풀무원은 2016년 ‘생면식감’으로 라면 브랜드를 개편한 뒤 ‘육개장칼국수’, ‘생면식감 돈코츠라멘’, ‘생면식감 비빔쫄면’ 등을 출시했다.
생면식감의 첫 제품 ‘육개장칼국수’는 ‘면과 국물이 따로 논다’는 평을 받았던 건면 특유의 단점을 극복하고 큰 호응을 얻었다. 출시 6개월 만에 1000만 개가 팔리며 저력을 보였다. 현재 풀무원이 내놓은 건면 상품은 12개에 달한다.
농심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는 업계 2위 오뚜기의 대표 건면 제품은 지난 2004년 출시한 ‘컵누들’이다. 역시 튀기지 않은 건면이다. 컵누들 한 컵의 열량은 120㎉로 기존 봉지면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전분을 사용했던 기존 컵누들을 비롯해 쌀국수 면을 활용한 ‘컵누들 똠얌꿍 쌀국수’, ‘컵누들 베트남 쌀국수’까지 출시됐으며, 각각 140㎉·145㎉의 낮은 칼로리로 여성들이나 1인 가구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라면 업계가 건면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처럼 건면은 침체된 라면 시장을 재편할 ‘구원 투수’로 주목받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최근 소비 트렌드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건면은 튀기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 라면보다 칼로리가 낮다. 저칼로리·저나트륨 등 건강을 중요시 여기는 소비 흐름과 일치한다.
아직은 라면 시장 전체에서 건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5%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지만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건면 시장은 1178억 원으로, 2016년(930억 원)에 비해 무려 20% 이상 성장했다.
이에 따라 업계 관계자들은 건면이 정체된 라면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해외에서 반응이 좋은 것도 고무적이다. 코트라(kotra)에 따르면 일본의 논 프라이(튀기지 않은) 라면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40%까지 올라섰다.
중국에서도 건면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고 있다. 세계 최대의 라면 시장인 중국은 최근 도시화와 건강에 대한 관심 증대로 인해 패스트푸드로 분류되는 라면의 인기가 다소 주춤했지만, 프리미엄 라면·웰빙 라면 등을 필두로 라면 시장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중상정보망(中商情报网)에 따르면, 중국 내 웰빙 라면 판매액은 지난 2012년부터 5년간 꾸준히 증가해왔다. 일반 봉지 라면의 성장은 둔화되고 있는데 비해 웰빙 라면은 향후 5년간 연간 11.7%의 성장률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웰빙 라면 시장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중국에서 한국 라면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중국의 라면 수입국 가운데 압도적 1위는 한국이다. 2015년 중국 라면 수입액 1위는 대만이었지만 2016년부터 한국 라면에 추월당하기 시작했다.
한국 라면은 사드 사태에서도 별 악영향을 받지 않았고, 농심은 중국 10대 라면 브랜드 중에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건면을 필두로 한 건강한 라면 생산은 국내 라면 시장은 물론 해외 시장에서도 유리한 지점을 차지할 계기가 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건강은 물론, 면의 식감 때문에 건면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늘어났다”며 “건면을 둘러싼 업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