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참 전시 제목과 닮은 작가다. PKM갤러리는 3월 31일까지 백현진 작가의 개인전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을 연다.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전시명은 무슨 뜻인지 도통 종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궁금해서 자꾸 생각하고 들여다보게 된다. 백현진이 그랬다. 정석을 따르기보다 한계의 틀을 넘나들기를 즐기며 자꾸만 시선이 따라가는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
논리적인 설명보다 직접 느끼기를 바라는 작가의 성향이 읽혔지만 그럼에도 전시명의 뜻을 물었다. 일반적으로 노동요는 작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는 노래를 뜻한다. 그런데 작가의 노동요는 여기서 살짝 다르다.
그는 “뭔가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이 퍼뜩 그려질 때가 있다. 추울 때 봤던 흙바닥, 그리고 골목길에 버려진 가구들 중 매트리스가 떠올랐고, 그 이미지가 조금씩 변형되며 머릿속에서 영상처럼 재생됐다”며 “생각보다 단순하다. 흙을 봤고, 원체 눕는 것을 좋아해 매트리스를 가깝게 느꼈으며, 물 흐르듯 흘러가는 생각 속 물결이 떠올랐다. 이 제각기인 단어를 감쌀 수 있는 바구니가 없을까 생각하다 노동요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작가는 원래 작업할 때 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그는 “예전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노동요가 흘러나왔는데 자꾸 떠올랐다. 정확한 정의를 알고 싶어 찾아봤더니 ‘적막감을 벗어나서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는 노래’ 식으로 나오더라”며 “그런데 나는 적막감을 유지하면서 일을 하려고 흥얼거린다. 이런 노동요도 있으면 저런 노동요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적막감을 유지하는 노동을 위한 나의 노래’라는 측면에서 접근했다. 논리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전시명은 아니다”라며 웃었다.
작가는 “전시명이 딱 나 같다”라고도 했다. 그를 화가로만 정의내리긴 힘들다. 작가로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플라토, 아트선재센터, 성곡미술관, 상해 민생 현대미술관, 쿤스트할레 빈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2017년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7’ 후원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또한 그는 한국 인디밴드 1세대인 ‘어어부 프로젝트’와 프로젝트 팀 ‘방백’의 멤버이자 솔로 가수로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영화 ‘북촌방향’ ‘경주’ ‘그것만이 내 세상’과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 속 개성 강한 배우로도 등장한 바 있다. 화가, 설치미술가, 행위예술가, 음악가, 배우, 감독, 그래픽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백현진의 이름이 불린다.
이에 작가는 “내가 노래를 하면 저게 가수냐고 하고, 연기를 하면 저게 연기냐고들 한다”며 셀프 디스를 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건 그만큼 작가의 재능을 담은 수많은 바구니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각양각색의 바구니는 작가의 ‘즐거운 노동’이라는 공통점 아래 모여 있다. 즉 작가가 즐기지 못하면 애초에 이뤄질 수 없는 노동들이다. 작가 또한 “연기와 음악은 미술 활동에도 영향을 준다. 그림은 혼자 그리지만 음악은 작곡한 곡을 연주자들과 함께 구현하고, 연기하며 느꼈던 게 붓질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신작 페인팅 60여 점과 설치 작품, 그리고 퍼포먼스 ‘뮤지컬: 영원한 봄’까지 아우른다. 퍼포먼스는 전시 기간 매주 펼쳐진다. 전시장을 방문한 날도 작가는 작은 의자에 앉아 벽에 붓칠을 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바로 이것이 작가의 노동요. 퍼포먼스 제목엔 화려한 무대가 펼쳐질 것처럼 ‘뮤지컬’이라고 박아놓고, 정작 적막하고 단조로운 무드 속 흥얼거리는 노동요는 예상의 허를 찔러 오히려 강렬하다.
지금 작가에게 중요한 건 ‘꼰대가 되지 않는 것’
또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작품명이다. 전시명도 독특하다 느꼈는데 작품명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바로 ‘작품명’이 아니라 ‘별명’을 각각의 작품에 붙였다는 것. 작가는 “작품명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지어야 해서 짓는 경우도 있다. 작업에서 진짜 중요한 건 작품명이 아닌 내 생각과 마음을 담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 스태프에게 작품명이 아닌 별명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이 별명들이 서로 뒤바뀌어도 큰 상관은 없다”며 “그런데 이번엔 내가 굉장히 별명을 꼼꼼하게 잘 지은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암기 과목에 굉장히 애먹었는데 이번엔 작품 65점 별명을 다 외웠다. 오늘도 전시장에 하나하나 별명을 부르며 들어왔다”며 웃었다.
이 작품들의 별명은 ‘잘못된 제목’ ‘간신히’ ‘빙고’ ‘증기’ ‘쓸쓸한 정전기’ ‘하품’ 등 단순한 형태로, 작가의 직관이 반영됐음이 느껴진다. 이중 특히 인상적인 별명은 ‘패턴 같은 패턴’으로 작가의 작업관과도 꼭 닮은 별명이기도 하다.
작가는 “어떤 틀에 얽매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패턴 같은 패턴’은 패턴이 될 수 없는 패턴 같은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청개구리와도 같은 마음으로 그린 작업”이라며 “이 그림은 상하좌우를 돌려가며 그린 것으로 특별히 정해진 상하좌우가 없어 조합, 배열을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 세로로 쭉 길게 세워도, 바닥에 눕혀도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회화는 각각의 페인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도, 두 개 이상으로 조합되는 즉 전체이자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작가는 “관람객이 마음에 드는 그림이 각각 달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의 반응이다. 5~6사람 정도에게 65점의 그림 중 뭐가 좋은지 물어봤는데 지금까지는 다 다른 작품을 답해서 좋았다”며 “왜 좋은지 이유는 안 물어봤다. 나는 내 작업을 그림이든, 퍼포먼스든, 노래든 일단 직접 보라고 말한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 사람의 몫”이라고 말했다.
요즘 작가가 작업을 하면서 가장 경계하는 건 ‘꼰대가 되는 것’이라 한다. 20살 치기어린 청년 시절 그에겐 분노가 가득했다고 한다. 작가가 “나는 소위 주류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불안감과 불만이 컸던 것 같다. 당시의 어른들이 정말 싫었다”며 “어느덧 내가 마흔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나이가 됐는데 그때 싫었던 어른들, 꼰대가 혹시라도 될까봐 경계한다. 다행히 내 작업을 젊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소비하는 걸 보면 내가 아주 구려지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작가는 자신이 우위에 서서 설명하는 것을 내내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방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나는 이게 궁금하다”며 역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간담회’가 아닌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7’ 후원 작가에 이름을 올린 뒤 달라졌던 주변의 시선을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작가는 “예전엔 ‘홍대 앞에서 멋대로 하는 애’라고 보던 사람들이 ‘올해의 작가상’ 이후로 ‘미술신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다. 미술계 권위 있는 제도에서 인정받는 경력이 일을 할 때 조금 편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람을 홀리는 것일 수도 있다”며 “여기에 휘둘리기보다는 그냥 나는 나대로 꾸준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처음엔 작가의 너무나도 자유분방한 모습이 조금은 부담스럽고 독특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자신의 작업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자유롭게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걸 전시장을 나오면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