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손가락 하나 까딱 하면 바로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는 세상. 디지털화된 시각 이미지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디뮤지엄이 ‘아이 드로(I Draw):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전으로 손으로 직접 이미지를 ‘그리는 행위’의 가치를 돌아봐 눈길을 끈다.
디지털 시대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SNS에 사용하는 각종 스티커, 또는 휴대폰 바탕화면 등 단순한 이미지를 통해서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 가운데 전시는 그리는 행위 자체에 담긴 정체성을 따라간다.
김지현 디뮤지엄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눈과 카메라가 미처 포착하지 못하는, 손끝으로 그려낸 일상 속 섬세하고 미묘한 감성을 담아 보여준다”며 “보이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고, 새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단순하면서도 멋진 행위, 즉 그리는 것의 특별함을 재발견하고자 한다”고 전시 기획 의도를 밝혔다.
참여 작가 16인의 작업 세계에 영감을 준 창문, 정원, 응접실, 박물관 등 공간적 모티브를 바탕으로 두 층의 전시장을 꾸린 것 또한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건축가 권경민이 전시장을 설계하고, 씨오엠과 크래프트 브로 컴퍼니가 시노그라피(scenography, 배경화)에 참여했다.
더불어 최재훈은 전시장 입구에 그림이 그려지는 애니메이션을 구현했고, 전시 공간엔 탬버린즈의 전문 조향사들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향과 뮤직 크리에이티브 그룹 스페이스오디티가 선별한 아티스트의 사운드가 어우러진다.
전시의 본격적인 시작은 엄유정 작가가 ‘드로잉, 모든 것의 시작’ 공간이 연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엄유정은 주변 환경에서 마주친 인상 깊은 장면이나 대상을 드로잉과 페인팅으로 그려냈다. 아이슬란드의 광활한 설경에서부터 자신에게 감흥을 준 인물들, 주변의 동식물, 빵과 같은 일상의 것들에 이르기까지 그 결과물이 다양하다. 투박해 보이지만 정감 느껴지는 그의 드로잉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듬뿍 담고 있다.
뒤를 이어 피에르 르탕의 ‘낯선 사물을 찾다’와 언스킬드 워커의 ‘상상 속에 가두다’, 크리스텔 로데이아의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공간도 전시장 1층에 구성된다. 프랑스인 어머니와 베트남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피에르 르탕은 아시아적 감정을 담은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10대의 나이에 ‘뉴요커’ 매거진의 커버를 장식하기도 한 그는 연필과 인디언 잉크, 오래된 과슈만으로 단순하게 작업하는 것을 즐긴다.
크리스텔 로데이아 또한 연필과 잉크를 사용해 세밀한 밑그림을 그린 뒤 디지털로 채색한 그림들을 보여준다. 언스킬드 워커의 공간은 다소 분위기가 어둡게 반전된다. 48세에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한 그는 최근의 초상화 시리즈를 통해 자신이 보고 읽은 것, 선입견이나 부당한 사건 혹은 분리된 가족과 같은 이야기를 그리며 자신의 서사를 그림으로 풀어낸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페인팅이 혼합된 공간들
앞선 작가들이 다소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그린 그림들을 주로 선보였다면 오아물 루의 ‘낭만적인 계절을 걷다’와 하지메 소라야마의 ‘판타지의 문턱을 넘어서다’는 디지털 시대에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중국의 차세대 일러스트레이터로 꼽히는 오아물 루는 1988년생으로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다. 스케치북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부터 시작해 이 이미지를 동영상 GIF 파일로 바꾸기도 하는 등 매체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한 결과물을 전시장에서 한데 모여 보여준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페인팅이 혼합된 수많은 빛깔의 자연 경관이 눈길을 끈다.
하지메 소라야마의 공간은 갑자기 미래로 시간 이동을 한 느낌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메탈이라는 매끄러운 소재에 끌려 그 텍스처를 손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 40여 년 동안 메탈을 소재로 한 다양한 로봇 일러스트레이션과 조각을 제작해 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도 공 상과학적 공간을 구축해 보여준다.
전시장 2층은 람한, 케이티 스콧, 페이 투굿, 해티 스튜어트, 구슬모아당구장 디프로젝트 스페이스(무나씨, 김영준, 조규형, 신모래), 슈테판 마르크스, 쥘리에트 비네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람한 또한 디지털 시대가 익숙한 작가로, 태블릿이나 PC를 이용한 디지털 페인팅 작업을 선보인다. 화면 속 다양한 오브제들은 작가의 유년 시절 기억에서 건져 올린 단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이미지들을 람한은 지면이나 오프라인뿐 아니라 SNS를 이용해 자유로운 프레임 편집과 함께 포스팅 해 온라인 사용자들과 유연하게 소통하며 함께 그림을 즐긴다.
자연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케이티 스콧은 움직이는 그림을 전시장 한 공간에 크게 구성했다. ‘꽃의 이야기’는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 제임스 폴리와 플라워 아티스트 아즈마 마코토와 협업해 꽃의 생활 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으로, 자연 세계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담은 그림 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림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은 페이 투굿과 해티 스튜어트, 그리고 슈테판 마르크스의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두 공간 모두 전시장 높은 벽까지 그림이 그려졌고, 공간에 들어선 이는 이 그림 속 세계에 초대받은 방문객이 된다. 페이 투굿의 ‘드로잉 룸’은 전통적인 영국식 시골집의 응접실을 의미하는 단어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그려진 방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녔다. 이 공간은 사면의 벽에 걸린 천위에 천장, 창문, 액자, 식물 등 모든 사물들을 손으로 그린 하나의 대형 설치작품과도 같다.
페이 투굿의 공간이 차분한 색조로 이뤄졌다면 해티 스튜어트의 공간은 화려한 색상의 패턴으로 가득하다. 스스로를 ‘전문 낙서가’라 칭하며 광고와 현대미술, 패션 등 다양한 분야를 유연하게 아우르며 활동해온 그는 전시장에 낙서폭탄과도 같은 공간을 구현했다. 슈테판 마르크스의 그림도 전시장 벽을 가득 채웠다. 사람과 동물, 풍경에 대한 유머러스한 드로잉을 선보여 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 일요일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담은 ‘일요일ㄹㄹㄹㄹ Sundaayyyssss’(2014)의 확장 버전을 선보인다.
또한 디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당구장에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는 무나씨, 김영준, 조규형, 신모래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전시장의 마지막은 쥘리에트 비네의 ‘이제 느린 그림의 일부가 되어’가 장식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느린 속도로 정교하게 그려 손의 움직임에 따라 이미지를 읽을 수 있는 작가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김지현 큐레이터는 “익숙한 듯 새로운 풍경을 펼치거나 내면으로의 여정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이번 전시는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했다”며 “각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기록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상상을 시각화해 표현해 온 작가들의 그림을 통해 ‘그리는 것’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디뮤지엄에서 9월 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