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5호 이문정(미술평론가, 리포에틱 대표)⁄ 2019.04.29 09:56:30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리포에틱 대표)) 처음 백현진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전 정보가 있든 없든 보통 작품 앞에 서면 어떤 식으로든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작품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하고, 내가 간직하던 이야기들과 연결 짓기도 한다. 그러나 백현진의 작품 앞에선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이해가 된다, 안 된다의 문제도 아니었고 호불호의 차원도 아니었다. 사고와 가치 판단이 중지된 어떤 경험이었다. 모든 것이 텅 비어버렸다. 이 표현도 완벽하지 않은 것 같다. 순간적 정지 상태와 비슷한 무엇이었다. 나는 작가와의 소통에 실패한 것인가? 미미한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그 뒤로 백현진의 작품을 볼 때마다 그 강도는 조금씩 달랐지만 비슷한 경험이 되풀이되었다.
작품을 감상할 때 항상 무슨 생각을 떠올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나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연상과 상상의 작용이 일어나고 어떤 심리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떠오르는 이야기 혹은 이미지들을 토대로 살을 붙여나가기도 하고, 내가 갖고 있던 정보들을 재조합하기도 한다. 그런데 백현진의 작품은 익숙했던 감상법을 낯선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에게 백현진은 물음표로 기호화된 작가였다. 인터뷰나 작가에 대한 자료들을 바로 찾아볼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묘한 경험을 지속시키고 싶었나 보다.
PKM갤러리에서의 개인전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2019)에 전시된 작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낯섦 또한 친근한 것이 되었다. 꽤 오랜 시간 작품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미지들, 그리고 흔적들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작품과 시선을 맞추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했다. 이야기를 떠올려 보려 노력했다. 의식적으로 노력했으니 무언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각들은 정돈되지 않았다. 엉킨 실몽당이 같았다. 퍼포먼스 ‘뮤지컬: 영원한 봄’이 진행되었던 갤러리 2층에 들어섰을 때 나는 무언가 의미를 만들어내길 포기하고 그냥 서 있었다. 읊조리는 듯한 노랫소리가 흘러내리는, 정돈되지 않은 느긋한 공간이 나를 둘러쌌다. 그뿐이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생각한다. 꿈속에서도 생각하는 것 같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하루하루다. 그 생각들 사이에는 내가 만든 규칙들이 있다. 그리고 그 규칙들 사이에는 나를 지배하는 사회의 규칙들이 겹겹이 채워져 있다. 그래서 생각이 멈춘다는 것은 잠시 동안 자유를 만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백현진의 작품은 조금은 불편하면서도 나른한 휴식의 시간을 제공한다.
느슨하지만 단호하다. 작가를 만난 뒤 내게 남은 인상이다. 당분간 백현진의 작품 앞에 섰을 때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을 마음 놓고 해도 되겠다. 작가를 만난 뒤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작가가 의도를 덜어내며 그린 그림, 그러나 깊은 잔상을 남기는 그림을 마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백현진 작가와의 대화
“오독은 없다. 내 작품에 여러 해석 나올수록 좋아”
Q. 본인의 작품을 설명하길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작가의 설명이 누군가에게는 작품의 의미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단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생성하게 도와주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연구자가 다양한 관점에서 작품을 분석하려면 작가의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다. 아무리 그 안에 담긴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A. 내 작업에 대해 절대 말 안 하는 건 아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성의껏 한다. 일방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작업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 이뤄진 대화를 원한다. 대학교 중퇴 이후 나는 어떤 식으로든 제도권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다. 그런데 운이 좋게 지명도 있는 기관들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고 말 그대로 경력이 생겼다. 요즘은 작가로 활동하려면 어려서부터 자신의 작업을 텍스트로 번역해서 발표해야 한다. 나에게는 그런 과정들이 없었다.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나의 작업을 분석한 글을 부정하고 안 보는 건 아니다. 또한 객관적 사실이 굉장히 잘못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오독은 없다고 본다. ‘내 작업을 정말 잘 해석했다 혹은 잘못 읽었다’와 같은 것은 없다. 만약 여러 명의 평론가가 내 작업을 모두 다르게 해석한 글을 내놓는다면 나에게는 굉장히 좋은 신호다.
Q. 질문이 있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거다. 혹시 본인의 작업에 관심이나 애정이 있는 사람들과만 대화를 하겠다는 이야기인가?
A. 아니다. ‘이게 어떤 작품(물건)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할 만한 이야기가 없다는 거다. 그냥 그린 것이기 때문에 내 개별 작품들을 단정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작가로서 감상자가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대답해야 한다.
Q. 이번 전시에서 진행한 퍼포먼스 ‘뮤지컬: 영원한 봄’은 잔잔하고, 평온하고, 조금은 무난해 보였다. 백현진 작가에 대한 편견을 한 번 더 깬 것인가? ‘영원한 봄’이라는 부제가 여러 가지로 뮤지컬의 특징을 담아내는 것 같아 의미심장하다.
A. 20~25분 정도 되는 매우 적막한 어떤 신(scene)을 만들고 싶었다. 그 정도다. 그런 분위기만 생각했다. 의도를 최대한 제거하려는 회화 작업이 그렇듯 퍼포먼스를 실행할 때 적막한 걸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그저 붓질하고 소리를 내면서 시간이 흐르는 거다. 뮤지컬은 잘 즐기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뮤지컬의 발성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뮤지컬은 상당히 인위적인 신을 제공하는 쇼이다. 그래서 약간 짓궂은 농담처럼 ‘뮤지컬’이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나에게 재미있는 뮤지컬, 우리가 생각하는 뮤지컬의 반대말 같은 뮤지컬을 만들고 싶었다.
Q. ‘뮤지컬: 영원한 봄’에서 초록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A. 큰 의미는 없다. 그냥 초록색을 온통 칠하고 싶었다. 봄도 되었고 나이가 들수록 초록색을 보면 참 좋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초록색을 칠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고, 전시 오프닝 직전에 작업실의 물감들 중 초록색을 골라 가져갔다. 특정한 색을 선호하거나 하진 않는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 설치된 ‘방’(2019)에서는 빨간색을 선택했다. 100헤르츠(Hz) 미만의 저음이 흐르는 공간에 어울리는 색이다. 특별히 거창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파장이 제일 느린 소리와 색을 사용하고 싶었다.
Q. 작품 ‘제곤스키(Zegonski)’(2018)의 제목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A. 나랑 같이 연주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가 이름이 전제곤인데 그 친구 별명이 제곤스키다. 동유럽에 갔을 때 친구들이 제곤스키라고 계속 불렀었다. 65점의 회화가 작업실에 빼곡하게 펼쳐져 있을 때 작업실에 올라왔길래 어떤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드냐고 물어보니 그 작품을 선택했다. 그래서 제목을 ‘제곤스키’로 지었다. 65점 중 유일하게 사람 이름이 제목이 된 작품이다. 제목을 짓는 규칙이나 체계가 없기 때문에 단어 하나의 의미가 재미있어서 선택할 때도 있고 무심하게 연결시킬 때도 있다.
Q. 자존감이 높은 편인가? 나는 내 마음대로 작업할 테니 보고 싶으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봐도 괜찮다는 분위기인 것 같다. 상당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A. 그건 아니다. 그냥 각자 원하는 대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할 뿐이다. 젊어서는 자존심은 있고 자존감은 낮은 콤플렉스 많은 청년이었다. 그래서 젊어서 했던 ‘마음대로 보라’는 말에는 화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 그렇다. 말 안에 담긴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Q. 자유로운 예술가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게 고도의 치밀한 전략 아니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은 없는가?
A. 젊었을 때는 그런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다. 지금은 전혀 아니다. 나는 작전이나 계획 없이 살고 싶다. 음악가로 1995년 처음 공연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일부러 특이해 보이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거다. 그러나 작가로 활동한 지 20년이 지났다. 내 이야기가 정리되어서인지, 내 태도의 지속성 때문인지 이제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받아들여 준다.
Q. 백현진 작가 스스로는 규정되는 것, 한정된 의미를 거부한다. 그런데 백현진의 행적을 보면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예술가의 스테레오타입에 부합한다. 누군가는 대리만족을 할 것도 같다. 현대인들은 규칙과 규범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만 그것을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백현진은 그런 것들을 실행한다.
A. 요즘의 예술가상은 아닌 것 같고, 전통적인 예술가상을 갖고 사는 것 같다고 반응할 수는 있겠다. 예술가상을 규정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란 자신의 삶과 작업이 최대한 일치하는 존재다. 작가인 나의 삶과 태도, 실천이 그냥 작품에 반영되는 거다. 누군가가 대리만족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다. 들어본 적도 없다.
Q. 마지막으로 조금은 다른 느낌의 질문을 하나 하겠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작가이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표현은 아니지만 현재로서 다른 적합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작가로서 살아가기에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남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본인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A. 예술가는 아무래도 삶과 죽음이나 존재의 원리, 세상의 질서 등에 관심이 많다. 예전에 책들을 많이 찾아보기도 했고, 작가들과 이야기도 많이 했었다. 입자물리학까지 들여다 본 적이 있지만 여기에서 과학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죽음이란 남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인 것 같다. 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그 사람의 죽음 때문에 내 삶과 관계들이 어떻게 변하는가와 관련되는 문제다. 내 사전에 영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나 자신에게는 끝(the end)인 거라 생각한다.
Q. 스스로에게 끝인 죽음을 생각하다 순간적으로 공포나 불안이 엄습해온 적은 없는가?
A. 나이를 먹다 보면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할 일이 늘어난다. 각별했던 사람들의 죽음일수록 몇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굉장히 힘들다. 그와 나 사이의 기억들 때문이다. 죽음에 가까워진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실적인 걱정을 할 때도 있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고 시뮬레이션을 꼼꼼히 한다고 내가 정신적으로 더 튼튼해질 것 같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