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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36) 안산 무악재 ②] 독립문을 일제가 그냥 놔둔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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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44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9.07.23 07:53:36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지난 호에 이어 옛 그림과 자료를 따라 의주대로 길을 통해 무악재 방향으로 향한다. 오늘 길을 가며 참고할 그림은 옛 도성지도(都城地圖, 사진 1),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 사진 2), 경자관반계첩(庚子 館伴 契帖)의 계회도(契會圖, 사진 3)이다.

우선 도성지도를 보자. 녹색으로 표시한 랜드마크는 이미 알고 있는 곳이다. 지도의 맨왼쪽 아래에 돈의문(敦義門)이라 쓰여 있으니 서대문 자리로,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앞 고개임은 대체로 아는 사실이다.

그곳에서 한양도성길을 따라 가면 홍난파 가옥을 만나는데, 그 위쪽 언덕에는 옛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여 조선민을 대변해 주었던 영국인 베델(Bethell, E. T. 한국명 배설/裵說)의 집터가 나온다. 이 주변이 월암근린공원이다.

그 뒤 작은 봉우리 정상에는 기상청 서울관측소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어렸을 때 중앙관상대였던 곳이다. 아마도 이 주변에 달을 바라보기 좋은 바위가 있었던 모양이다. 옛 지도에 한결같이 월암(月岩)이 그려져 있다.

의주대로 좌측으로는 안현(鞍峴)이 그려져 있고, 아래쪽 길옆으로는 푸른 동그라미 속에 서지(西池)를 표시하고 있다. 금화초등학교 자리다.

서지의 바로 위에는 길이 개울(蔓草川/만초천)을 가로지르면서 그 위에 석교(石橋)라고 다리 이름을 적어 놓았다. 석교(돌다리)는 일반명사이지만 서교(西郊, 모화관 마을)에서 석교라 하면 오직 이 다리를 말하는 고유명사이다.

서울에서 ‘남산(南山)’이라 하면 남쪽 산이 아니라 목멱산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이고, 대구에서 ‘앞산’이라 하면 시(市)의 남쪽을 지나는 그 산줄기를 칭하는 고유명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다리는 기록이나 지도나 모두 석교라고 쓰고 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아예 교(橋)라고만 쓰고 있으니 이 지역의 다리 중 다리였다.
 

사진 1. 도성도 지도.
사진 2. 경기감염 병풍. 
사진 3. 경자관반계첩(庚子 館伴 契帖)의 계회도. 

‘뫄관’과 ‘다리 남쪽’의 의미

필자의 고모님 중 두 분이 이쪽 서교에 살고 계셨다. 우리 집에서는 한 분은 ‘뫄관 고모’라 불렀고, 한 분은 ‘교남동 고모’라 불렀다. 중고등 학생쯤 되었을 때 참으로 궁금했었다. 그래 어머니께 물으면 가방 끈이 짧은 어머니는 “그 동네에 뫄관이 있었다더라”, “옛날에 다리가 있었다더라” 하는 대답이 전부셨다.

아예 그 동네 아낙들을 다른 곳 사람들은 ‘뫄관댁’이라 불렀다. 뫄관이 ‘모화관’임을 알게 된 것은 대학입시 준비를 하면서 모화관과 영은문을 배우게 되면서였다.

그래도 교남동의 교(橋)는 알 수가 없었는데 철이 좀 날 때쯤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교남동과 교북동을 가르는 다리는 어디였을까? 바로 이 석교였다. 경기감영(지금의 적십자 병원) 뒤 돈의문으로 가는 경교(京橋) 북쪽으로 번듯한 다리는 이 석교뿐이었다.
 

맨홀의 위치로 만초천과 그 위를 가로질렀던 석교 자리를 가늠해본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규모를 갖춘 다리로는 유일했으니

그러면 이 석교는 어디에 있었을까? 금화초등학교(西池)로 들어가는 만초천의 물줄기를 맨홀을 따라 나서면 지도와 옛 그림에 그려져 있는 석교의 위치가 바로 영천시장 남쪽 입구 아래쯤 되는 곳임을 직감할 수 있다. 지도에서나 옛 그림에서처럼 길과 물길이 엇갈려 있는 맨홀 위치들을 만난다. 그렇지! 길과 물길이 엇갈리는 곳에 다리가 있었겠지. 지금의 찻길을 낼 때 이 다리 부재들은 어찌했는지 궁금해진다. 도로 밑에 매몰했다면 언젠가 그 흔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경기감영도에는 석교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제법 규모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수성동에 기린교로 여겨지는 돌다리가 다시 나타났듯이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현재의 영천시장. 석교의 위치는 영천시장 남쪽 입구 아래쯤으로 추정된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이제 영천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지도를 보면 아마 만초천 줄기이거나 그 천변(川邊)에 생긴 시장일 것이다. 잘 정리되어 있는 재래시장이다. 꽈배기가 하도 유명하다기에 한 봉지 사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어 보았다. 애들 때 그 맛이다.

시장 북쪽 출입구를 나서면 공중화장실 옆에 독립관 터(모화관 터) 표지석이 있다. 시장 안이나 골목 안에 세울 수 없어 그런 것 같은데 지도나 옛 그림, 옛 사진을 보면 위치가 조금 북쪽이면서 길가에 세운 것 같다.

옛 지도에는 개울 옆으로 연자루(燕子樓)로 보이는 글씨를 써 놓았다. 그 뒤 금화산 줄기에는 옥계동(玉溪洞)이라 썼고 그 북쪽이 모화관(慕華館)이다.

모화관 동쪽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해진 영은문(迎恩門)이 지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영은문 바로 곁에는 비각(碑閣)이라 쓴 작은 집 한 채가 보인다. 대체 무슨 비(碑)가 있었던 것일까?

이 비각을 이해하려면 정유재란 당시 명(明)나라에서 파견된 양호(楊鎬)라는 장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임진왜란 발발 후 여러 전투를 거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왜군이 경상도 일대로 후퇴하였는데, 1597년 다시 20만 대군이 재침해 한반도 남쪽 지방에서 참혹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영천시장의 뒷골목에는 서울 길의 옛 모습이 남아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명 장군 양호를 극진히 모신 조선

이때 명(明)은 1597년 1월 형개를 총독으로, 양호(楊鎬)를 도찰원우도첨어사 경리조선군무로 삼아 5만 원군을 파견했다. 양호는 평양에 도착해 선발대로 보낸 조명(朝明) 연합군이 8월 4일 남원성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9월 3일 서울에 입성한 뒤 선조를 모시고 동작진(銅雀津)을 건너 조명 연합군의 전투 준비 상태를 살피고 9월 7일 직산에 나타난 왜군을 선봉에 서서 물리친 후 여세를 몰아 남원성을 탈환, 조령(鳥嶺) 넘어 의성·경주에 진격하였다.

12월 예하의 마귀, 양원 장군과 함께 반구정과 태화강의 적진을 공격해 왜장 가토(加藤靑正)를 단신으로 도산(島山)까지 도망가게 하였다. 이듬해 1월 울산성을 수차 공격하고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도요토미(豊神秀吉)의 사망으로 7년 전쟁이 끝났다. 그는 비교적 겸손하고 용감하면서도 책임을 다하는 장군으로 선조 이하 조선 조정으로부터 존경과 호감을 받았다.

양호는 상당히 객관적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명량대첩의 승전이 전해지자 크게 기뻐하며 이순신에게 붉은 비단 두 필을 보내면서 본인이 직접 이 비단을 승리의 상징으로 배에 걸어주고 싶으나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만 보낸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기뻐했다 한다. 선조는 그와는 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전하는 이야기로는 낙산 아래 살던 선비 남상문(南尙文, 1520~1602)의 집 뜰이 아름다웠는데, 이에 끌려 놀러 왔다가 우연히 경학을 서로 논하는 과정에서 남상문의 뛰어난 학식에 감동되어 그의 문하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니, 양호는 학문의 수준도 상당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운명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그의 부하였던 군교(軍校) 정응태(丁應泰)의 무고로 파직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때 선조는 홍제원까지 나아가 눈물로 그를 전송했다.

 

‘국조보감’의 양호 관련 내용이 실린 페이지. 

그때의 일이 국조보감 (제33권 선조 31년, 1598)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 경리 양호를 파직하고 만세덕(萬世德)으로 대신하였다. 양호가 돌아가려고 하니, 상이 홍제원(弘濟院)에 나가 전송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양호도 슬퍼하며 안색이 변하였다.”(원전은 국조보감의 사진을 참조)

이때 조선 정부에서는 그에게 무훈장군이라는 칭호를 준 뒤 그의 높은 공을 찬양해 잘못된 무고임을 알리고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한다. 그 결과 양호는 재등용되어 요동도어사(遼東都御史)가 되었다. 그러나 청(淸) 세력이 욱일승천하던 때였으니 양호의 운명은 어둡게 끝을 맺었다 한다.

 

영은문 동쪽에 세워졌던 명나라 양호 장군 거사비. 사진 = 이한성 교수 

한편 양호가 떠난 후 조선 조정은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게 해 준 은혜)을 못 잊어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공이 많았던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형개(邢玠)의 위패를 모신 선무사를 (현재 명지대의 서소문 캠퍼스 자리에) 세웠고 그 해 8월에 양호거사비도 이곳에 세웠다.

1604년(선조 37)에는 양호의 위패도 선무사에 같이 모셔 매년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냈다. 그 뒤 1764년(영조 40) 왕이 선무사에 제향을 지낸 뒤 비의 훼손을 염려해 다시 7척 높이의 새 비를 선무사 앞뜰에 세우고, 본디 사현(沙峴: 무악재)에 있던 양공거사비도 이곳에 옮겨오게 하였다 한다.

사현에 있던 비는 1610년(광해군 2년) 양호의 초상화를 중국에서 구해와 선무사에 걸면서 월사 이정구(李廷龜)가 글을 짓고, 선원 김상용(金尙容)이 전자(篆字)를 썼으며,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쓴 또 하나의 ‘경리조선군첨도어사양공거사비’로 우리가 지금 보는 지도의 비각처럼 영은문 동쪽에 세워졌다.

발견됐으나 누가 이 비석을 보랴?

그러나 이 비는 1835년(헌종 1)에 불이나 훼손되어 비문을 읽을 수가 없게 되어 이전의 비문을 모각해 다시 세웠다 한다. 이때 음기는 홍문관대제학 신재식(申在植)이 짓고, 호군 신위(申緯)가 썼다. 이 비는 비각이 없어지면서 행방을 몰랐는데 근래에 독립문사거리 근처의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한다.

오늘은 이 비(碑)를 찾아간다. 예전 모화관 동쪽 반대편 언덕 지역을 연향대(宴享臺)라 했다는데 샘물 좋고 풍광이 좋아 많은 이들의 놀이터였다 한다. 지금 사직터널로 오르는 길 능선 지역이다. 이곳 한 부분에 대신고등학교가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화산기념관(和山記念館)이 있는데 이 건물 끝 화단 후미진 곳에 이 비석은 버려진 채로 서 있다. 설명문은 물론 하다못해 어떤 기념물로도 지정받지 못하였다.

그렇기는 하다. 21세기에 500년 전 명나라 장수를 기억하는 거사비(去思碑)에 누가 관심 두겠는가? 한편 서소문 선무사(宣武祠)에 있던 또 다른 거사비는 학교 이전에 따라 남가좌동 명지대 캠퍼스로 이건되었다(서울시 유형문화재). 본래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 추모비)는 모두 4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60년대까지 3개는 전해졌는데 이제는 2기(基)만 남았다.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우리처럼 무심했을까? 사실 우리 시대에는 듣도 보도 못한 양호를 기리는 그 시대 기록들이 남아 있다. 재조지은의 은혜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일성록, 승정원일기, 동국여지승람 등에 남은 양호 관련 기록들을 보자.

1766년(영조 42년) 8월의 기록에는, “대가(大駕, 임금의 가마)가 양 경리(楊經理, 양호)의 비각(碑閣)이 있는 곳에 나아갔는데, 내가 따라 나아갔다. 상께서 직접 비문을 본 다음 관소(館所)에 나아가셨다. (大駕詣楊經理碑閣所. 余隨詣. 上親覽碑文. 仍詣館).” 이렇듯 영조는 무악재 아래 양호의 비각에 들렀다. 지금 대신고 안에 있는 그 양호거사비이다.

또 몇 년 뒤에도 다시 들렀다. 영조 47년(1771) 8월에는 “이때 상께서 모화관에 나아가 시사(試射)하실 적에 추모현(追慕峴)에 나아가 걸어서 고갯마루에 이르셨는데, 내가 걸어서 나아가 시립(侍立)하였다. 이어 비각(碑閣)을 봉심하고 관소(館所)에 따라서 나아갔다.(時 上詣慕華館試射 詣追慕 步詣至峴上余步詣侍立 仍奉審碑閣 隨詣館所)”

또 영조 45년(1769) 승정원일기를 보면 사현(沙峴, 무악재)을 양호 장군을 추모하여 추모현(追慕峴)으로 고치도록 하고 있다.

또 1754년(영조 30)에는 선무사(宣武祠)에 거둥하여 전작례(奠爵禮)를 행하고 ‘수은해동(垂恩海東)’이라는 글씨를 써서 걸기도 하였다.

한편 명나라 경리(經理: 회계를 담당하는 이가 아니라 책임자)가 다 훌륭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양호의 후임으로 온 만세덕(萬世德)은 양호와는 달리 악덕 파견군 사령관이었다.

경기감영도가 보여주는 서울의 모습

이제 다시 독립문 주변으로 되돌아간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경기감영도(사진 2)로 다시 한 번 살펴보려 한다. 이 그림은 12폭 병풍으로 보물 1394호, 리움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 작품이라 한다. 상당히 사실적이어서 서교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번호를 붙여 보았는데, ①은 석교(石橋)다. 길손 하나는 석교 위를 지나고 있고 두 사람은 곧 석교를 지날 모양이다. 석교의 규모는 상당히 넓어 사신 일행이 지나기에 문제가 없어 보인다.

②는 모화관이다. 영은문보다 제법 남쪽 언덕 기슭에 있다. 이는 1900년대 전후에 찍은 사진들과도 일치한다. 모화관의 위치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③은 알다시피 영은문이다. 1900년대 전후에 찍은 사진의 모습과 같다. 영은문 동쪽으로 작은 건축물도 보이는데 아마도 양호거사비 비각일 것 같다.

④ 지역은 연향대 지역으로 지금의 대신고등학교가 있는 지역이다. 이때는 양호거사비가 이곳에 있지 않았다.

⑤는 서지(西池)다. 연(蓮)이 무성하고 네모 연못의 중앙에는 둥근 인공 섬이 자리 잡았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표현이다. 그 위에는 반송(盤松)일 듯한 나무가 있다. 연못 주변 저 멋진 나무도 반송일 것이다.

서지 왼쪽 ⑥은 경기중군영이다. 한창 군사 훈련 중으로 군기가 바짝 들었다. ⑦은 경기감영, ⑧은 무악재, ⑨는 인왕산, ⑩은 사직터널쯤 되는 곳이다.

그림에 보이는 여염집들은 기와는 많지 않고 반듯하게 이엉을 이은 초가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 그림은 상당히 사실적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경기감영 앞길은 석교를 지나면서 영은문 방향으로 90도 가까이 휘어져 있다. 지금 개념으로 말하면 서대문 로터리에서 출발한 길이 독립문쯤 와서 좌로 90도 가까이 휘면서 무악재를 넘어가게 그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화원(畵員)은 눈에 보이는 경치들을 제한된 12폭 병풍에 담기 위하여 이른바 현대인(現代人)인 우리가 한 자리에 빙 돌려 파노라마 사진을 찍듯이 빙 돌려서 화폭에 담은 것이다. 어찌 보면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나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의 한 부분을 연상시킨다.

모화관 주변에 석축 있었던 듯

이제 세 번째 그림은 경자관반계첩의 계회도(庚子館伴契帖의 契會圖)이다. 연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개한 그림이다. 임진란 직후 영은문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이 그림은 1598년 겨울 양호의 후임으로 오는 만세덕의 영접을 준비하는 경리도감 관원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경자(庚子)는 경자년을 뜻하고, 관반(館伴)은 관직생활을 함께 하는 동료를 뜻하는 말이라 한다.

1은 인왕산, 2는 영은문이다. 전호(前號)에서 영은문을 설명했듯이 임진란 직후의 영은문을 그린 것이라서, 얹었던 청기와는 모두 없어진 상태의 영은문이다. 다만 두 개의 문 석주(石柱)가 있어 영은문임을 알게 한다. 3은 연향대(宴享臺)인데 그 위에 천막을 치고 일하는 경리도감 사람들 모습이 분주하다. 4는 누군가가 타고 온 가마의 모습이다. 5는 빙 두른 석축인데 이른 시기에는 모화관과 영은문 주변에 석축이 있었나 보다. 후세의 그림이나 지도, 기록들에는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양호의 비각은 없다.

이제 독립문이 서 있는 독립공원으로 내려온다. 본래 독립문은 지금의 독립문 사거리에 있었는데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독립협회가 주축이 되어 1896년 착공하여 이듬해인 1897년 완공을 했다 한다. 1896년 7월에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기반으로 해서 독립협회가 창설되었는데 회장이 안경수, 위원장이 이완용이었다. 필립 제이슨은 고문이었고, 동농 김가진, 월남 이상재 등의 고위 관료와 명사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독립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만 짚어 보고 가려 한다.

 

독립문의 편액 글씨는 누가 썼는지가 아직도 논란 중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첫째는 “독립문의 편액 글씨는 누가 썼는가?”라는 질문이다. ‘독립문은 중앙에 아치형의 홍예문이 있고, 홍예문의 중앙 이맛돌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李花, 오얏꽃) 무늬가 방패 모양의 문양 판에 새겨져 있다. 이맛돌 상단 앞뒤에 가로쓰기로 ‘독립문’과 ‘獨立門’이라 각각 쓰여 있고, 그 양옆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이 글씨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동농 김가진 선생이라는 주장과, 매국노 이완용이라는 주장이 맞서 있다. 동농의 며느리 정정화 선생은 젊은 날을 모두 바쳐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은 분인데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독립문 글씨는 시아버지 동농이 썼다는 기록을 남겼다.

동농은 이 시기 최고의 명필 중 한 분이니 쓸 자격은 충분하다. 한편 이완용이 썼다는 설은 1924년 7월 15일 동아일보의 ‘내 동리 명물’이라는 연재 기사에 이완용이 썼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는 당시 위원장이었고 가장 많은 희사금을 냈으며 글씨도 잘 썼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아직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진정한 독립의 의미를 성취할 때다

또 하나 의문점은 왜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후에도 독립문을 없애지 않고 문화재로 지정하고 유지, 보수를 했는가 하는 점이다. 일제는 1928년, 독립문 보수를 위해 당시로서 거금 4100원의 예산을 써서 수리 공사를 벌이고 1936년에는 독립문을 조선의 문화재로 지정, 고적 제 58호로 등재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독립문이 가지는 독립(獨立)이란 말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1875년 일본의 운양호가 강화해협을 불법 침범함으로써 운양호 사건이 발생하였다. 전투에서 불리해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1조는 이런 것이다.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또 하나 조약이 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 후 청나라와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이다.

그 1조는 이런 것이다.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에 해가 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두 조약 모두 조선은 자주독립국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뒤집으면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앞으로 어떠한 간섭이나 권리를 행사할 생각을 말라는 내용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세워진 것이 독립문이다. 독립문의 ‘독립’은 청나라는 간섭 말라는 선언이자 경고다. 그러하기에 영은문을 헐고 그 앞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일본의 입장으로 보면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이제는 조선을 먹어치워도 귀찮은 청나라는 참견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선언을 조선인 스스로 해 준 문이 일본인들 눈으로 보면 독립문인 것이다. 돈 좀 들여 고치고, 조선 고적에 등재한들 무엇이 나쁠 일 있었겠는가? 교활한 것들이고 뒤집어 보면 딱한 우리다.

 

독립공원에 새겨져 있는 기미독립선언문. 사진 = 이한성 교수 
독립문역에는 이 땅에서 사용되었던 태극기들이 역사 순서에 맞게 그려져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임시정부는 강령에서 독립이란 말보다 복국(復國)과 건국(建國)을 사용하였다. 나라를 잃었느니 우선 회복해야 한다. 복국(復國). 그리고 나라를 세워야 한다. 건국(建國). 독립문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복국과 건국을 모두 이뤘으니 이제는 완전한 독립이다. 주변 열강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독립공원에는 기미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고, 독립문역으로 내려가면 이 땅에서 사용되었던 모든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훌륭한 자료관이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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