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9-650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19.09.09 09:19:41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데오도란트 타입(Deodorant Type)에서부터 뉴 스트럭쳐(New Structure)에 이르기까지 조각가로서 조각을 이야기하던 권오상이 이번에는 김민기와 함께 가구라 명명되는 오브제들을 발표했다. 장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조각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냈던 그의 이전 시리즈들이 그렇듯 이번 작업 역시 종착지는 조각처럼 보인다. 티 테이블(tea table)로,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사용 가능한 이 다재다능한 의자는 조각으로서의 위용을 뽐낸다. 위트 넘치는 모순처럼 회화적 붓질도 오브제가 조각처럼 보이는 데에 힘을 보탠다.
전시 ‘가구(Furniture)’에 놓인 가구+조각의 제작 과정은 역설의 반복이었다. 권오상은 단어 뜻 그대로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가구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김민기와의 협업을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남은 부산물을 제공한 조각가는 조각이 아닌 가구 제작을 의뢰했다. 그러나 전시장에 놓인 것은 가구 같은 조각이다. 가구의 일차적 형태를 만들어낸 김민기가 가구처럼 보이지 않길 원했기 때문이다. 권오상 역시 원인 제공자다. 가구를 만들기 위해 제공된 것은 권오상의 시그니처(signature)로 가득 찬 합판이다. 작가의 예술적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재료다. 합판을 손에 넣은 또 다른 작가는 가구를 만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며 가구를 만들었다. 가구를 만드는 행위가 익숙해질수록 가구로서의 정답에서 멀어지는 가구가 완성되었고, 상품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만큼 예술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었다.
꽤 오래전부터 예술 작품과 같은 실용품들이 있었다. 모리스 회사(Morris & Co)의 가구들은 사용한다는 차원을 넘어 감상하게 만든다. 찰스 레니 맥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의 의자와 캐비닛은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미스 반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와 리트벨트(Gerrit Rietveld)의 의자도 빼놓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순수한 미적 체험을 제공하는 예술적 오브제들이다. 스튜디오 알키미아(Studio Alchimia)를 떠올려보면 실용성보다 실험이 앞선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실용품이라는 규정된 범주를 벗어나 기능으로부터 자유로운,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개념과 표현을 담아내는 제품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반대의 경우라 칭할 수 있는, 작가들이 제작한 실용품들도 우리의 시선을 끈다.
권오상은 조각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가구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체불명의 또 다른 오브제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 김민기는 조각적이고 가구적인 무언가라 말한다. 훌륭한 가구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의 선택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디자인(실용품)과 예술(조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예술과 일상의 교차 역시 ‘가구’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실제 사용되기도 한 ‘녹색 스툴(Green-colored Stool)’은 실용품인가? 작품인가? 일상 공간과 예술 공간이 겹쳐진다.
권오상의 작품은 담백하다. 그 안에 많은 메시지를 담아내지만 의미가 넘치지 않는다. 관객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여지를 남겨둔다. 김민기와 함께한 이번 작업도 그렇다. 협업하는 서로의 생각이 달라 서로를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성의 영역은 더 넓어졌다.
하나의 합판에서 예술가의 작품이라 불리는 조형물이 나왔다. 전통적인 조각이라 할만한 조형물은 아니다. 똑같은 하나의 합판에서 실용품이라 불릴만한 가구도 나왔다. 역시 일반적인 가구의 모습은 아니다. 다른 듯 닮았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또 한 겹의 층이 쌓인다.
“가구 만들려 했는데 예술 된” 사정
이번 대화는 작가 권오상, 김민기, 아라리오뮤지엄의 장연우 큐레이터와 함께 했다.
Q. 어떤 설명도 없이 작품을 봤을 때 그 자체로 조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시바툴 의자(Sibatool Chair)’(2019)나 ‘파티션(Room Divider)’(2019), ‘콘솔(Console Cabinet)’(2019) 등을 보면 실제로 사용하기 어려워 보이는, 실용성이 떨어지는 가구들이다. 가구라 명명되는 오브제를 두 작가가 협업이라는 타이틀 아래 함께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조각가로서 각자 작업을 진행할 수도 있었다.
A. 권오상: 거창한 의도를 갖고 시작한 작업은 아니었다. 첫 시작은 단순했다. 작업실을 방문한 손님들이 앉을만한 예쁜 가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가구가 나의 작품에서 파생된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김민기 작가에게 가구 제작을 의뢰했다. 김민기 작가가 ‘녹색 스툴’을 만들어왔고 자연스럽게 다음 작업으로 이어졌다. 여태까지 발표했던 시리즈들은 모두 어시스턴트 없이 내가 직접 다 만들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가구는 조금 다르다. 그동안 가구를 만들어본 적이 없었고 관심을 가진 분야도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작업하고 싶었다. 김민기 작가는 가구를 만들었던 경력도 있고, 나의 작업실에서 꽤 오랫동안 어시스턴트로 일을 했었기 때문에 작업 과정에서 편하게 주고받음이 가능했다.
김민기: ‘녹색 스툴’을 만든 뒤 아라리오갤러리 라이즈호텔에 놓기 위해 ‘뉴 스트럭쳐 체어(New Structure Chair)’(2018)를 제작하게 되었고, 이번 전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작가가 만든 가구가 가격과 실용성에서 기성 상품들을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능성보다 조형성에 집중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약간의 기능을 보유한 조각적인 무언가를 제작해 가구라 부르기로 했고, 권오상 작가의 작업을 근간으로 가구 형태를 가진 조형물이 나오게 되었다.
Q. 기능성은 어느 정도 있는가? 어떤 것은 실제 사용이 가능해 보이지만 일부는 불가능해 보인다.
A. 권오상: ‘녹색 스툴’과 ‘뉴 스트럭쳐 체어’는 사용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후의 작업들은 조각으로 접근했기에 가구로서의 마감을 추구하지 않았다. 나사나 이음새를 드러내면서 자유롭게 작업했다.
김민기: 시판되는 가구에 비하면 기능성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목적 자체가 시판되는 것과 같은 가구를 만들자는 게 아니었다. ‘뉴 스트럭쳐 체어’는 조형성만을 생각하며 제작했다. ‘시바툴 의자’는 처음 볼 때 받게 되는 인상과 달리 편안하게 앉을 수 있다.
Q. 몇몇 작업은 회화적이다. 가구라는 영역을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나? 색 선택의 기준이 있었다면 말해주길 바란다.
A. 김민기: 작업의 소스(source)는 모두 권오상 작가에게서 나온다. 색은 권오상 작가의 ‘스몰 스컬프처스(Small sculptures)’의 색과 배색을 차용해 새롭게 배합했다. 한 가지 색으로 빈틈없이 채색하면 플라스틱처럼 보인다. 그러면 양산된 가구 같은 느낌이 날 것 같아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며 색을 칠했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할수록 굳이 회화적 표현으로 가구처럼 보이는 요소들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재료의 물성이 드러나게 그냥 두었다. ‘녹색 스툴’ 같은 경우엔 페인트를 여러 겹 바른 후 앤티크(antique)한 느낌을 주려고 모서리 부분을 샌더(sander)를 이용해 처리했다.
Q. 권오상의 작품을 제작한 뒤 남은 부산물을 토대로 일차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김민기 작가가 담당했다. 이후 의견을 주고받으며 완성했다. 부산물을 선택하고, 자르고, 조합하는 데에 규칙 같은 것이 있었나? 즉흥적이었는지, 계획적이었는지 궁금하다.
A. 권오상: 나의 경우 ‘더 플랫(The Flat)’, ‘릴리프(Relief)’와 같은 작업에서 잡지 ‘월페이퍼(Wallpaper)’의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했고, 평상시에도 자료 조사와 수집을 많이 하는 편이라 수많은 가구 이미지들을 접해왔다. 그러다 보니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구 이미지가 보편적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김민기 작가는 작업할 때 조사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낯설면서도 신선한 형태를 가진 가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김민기: 부산물 합판 여러 개를 바닥에 깔아놓은 뒤 선택, 조립했다. 철저히 비계획적이고 개인적인 취향을 따른 것이다.
장연우 큐레이터: 가구를 만들 재료에 이미 권오상 작가의 색이 묻어 있다. 그런 재료로 권오상 작가가 가구를 만든다면 기존의 작업과 유사한 정도에서 끝났을 것이다. 권오상 작가가 제공한 작업 부산물로 김민기 작가가 형태를 만든 뒤 서로 의견을 조율하며 완성하니 새로운 결과물이 나왔다.
Q. 권오상의 작업은 풍부한 레퍼런스를 담고 있다. 이번 작업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파티션(Room Divider)’, ‘콘솔(Console Cabinet)’ 등을 보고 디자인의 오브제화 등이 떠오르기도 했다. 리포에틱(Leepoétique)과의 인터뷰에서 ‘미술사의 주된 전환점들을 염두에 두고, 조각사의 끝에 나의 점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었다. 혹시 이번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듣고 싶다.
A. 권오상: 다양한 영향을 받았겠지만, 이번 작업을 진행하면서 특별히 염두에 두었던 사조나 작가는 없다. 굳이 꼽는다면 도날드 저드(Donald Judd)의 가구를 들 수 있겠다. 조각가가 자신의 작업 특징이 드러나는 가구를 만든다는 점에 영감을 받았다. 알려진 조각가들 중 많은 수가 가구를 제작했다. 그들이 만든 가구를 보면 모두 해당 작가의 작업이 떠오른다.
Q. 장르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조각의 정체성을 향한다는 점에서 권오상의 이전 작업들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실용품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지만 조각이다. 전시 제목이 ‘가구’인데 작품을 보면 가구인 척하는 조각 같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조각인가 가구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그동안 권오상이 자신의 작업을 조각이라 명확히 말해왔기 때문이다.
A. 권오상: 처음에는 분명 가구를 원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조각이 되었다. 원래 의도는 아니었으나 조각이 되었다.
김민기: 가구도 조각도 아닌 어떤 것이라 생각한다. 조각+가구의 원형을 만들어보고자 했다.
장연우 큐레이터: 처음 전시를 기획하고 작가에게 가구 제작을 의뢰했다. 예상과 다르게 제작된 결과물을 보고 그것이 조각인지 가구인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고, 가구의 형태를 취한 조각이라 규정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아트 퍼니처(art furniture)보다 퍼니처 아트(furniture art)에 가까운 작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전시 제목은 역설적인 면을 부각시켜 다른 수식 없이 ‘가구’라고 정했다. ‘이것은 가구인가 조각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