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그림을 따라 찾아온 행주산성을 떠나 옛 양천현아(陽川縣衙)가 자리잡았던 강서구 가양동 궁산으로 향한다. 9호선 양천향교역 1번 출구를 나서면 마을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직선도로가 끝날 즈음 양천현아지(陽川縣衙址, 사진 1)를 알리는 표지석을 만난다. 당황스러운 것이, 현아 터를 알리는 표지석 이외에는 어디에도 현아의 흔적은 없다는 점이다. 근래에 세워진 절 홍원사 골목으로 들어서면 ‘읍내경로당’이라는 예스러운 이름을 만나 반갑다. 그러나 반갑기도 잠시 문은 꽁꽁 잠겨 있다. 옛 현아 터는 다세대 주택이 거의 전부를 점하고 있다. 우리가 가난하던 시절을 거치면서 밥 먹고 사는 일과 이어지지 않은 옛 흔적은 이렇게 사라져 간 것이다. 그나마 유림(儒林)이 지킨 향교(鄕校, 양천향교)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사진 2).
양천현아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곳일까? 1740년(영조 16년)도 저물어 가는 때에 65세의 화가이며 유학자인 어떤 이가 이곳 현령으로 부임해 온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우리 그림 세계를 윤택하게 장식한 5년이란 기간이 펼쳐졌다. 그는 겸재 정선이었다. 그는 이 5년간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연강임술첩(連江壬戌帖)이라는 걸작을 남겼다. 오늘 양천현아가 자리 잡았던 주산(主山)인 궁산(宮山) 주변을 돌아보면서 겸재가 남긴 그림들의 배경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때 겸재가 남긴 궁산 주변 그림들은 시화상간(詩畵相看), 양천현아(陽川縣衙), 소악루(小岳樓), 소악후월(小岳候月), 종해청조(宗海聽潮), 금성평사(錦城平沙), 설평기려(雪坪騎驪), 빙천부신(氷遷負薪)이다.
겸재는 청하현감을 지내면서 60세에 노모를 여의고 3년상을 치른 후 옥인동 인곡(仁谷)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요즈음도 기용되기 어려운 65세에, 더우기 종5품 양천현령으로 승진되어 발령받았으니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모두 축하해 주었겠지만 가장 살갑게 축하해 준 것은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이었던 것 같다. 이때 사천이 겸재에게 지어주었다는 축하의 송별시가 여러 곳에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 옮겨 본다.
迎吏楊花渡 마중 나온 아전들과 양화나루를 건너니
津頭是縣衙 나루 끝이 바로 현아라네
去都三十里 서울에서 삼십 리,
闔境百餘家 경계 내에는 백여 가구
政事元無獄 일을 맡아보니 죄인들은 없고
樓臺但有茶 누대에서 차(茶) 마시는 일 뿐
時時覓團領 때때로 관원이 찾아와도
星蓋入江華 관원 행차는 모두 강화로 들어가는 거지.(기존 번역에 준함)
이렇게 축하와 격려를 받으며 겸재는 양천에 부임해 왔다. 이제 겸재의 그림을 생각하며 궁산을 둘러본다. 그림 1은 오늘의 답사길이다. 양천향교역(1로 표시), 양천현아터 안내 표석(2), 양천현아가 자리했던 다세대 주택 골목길을 지나 양천향교(3)를 둘러본다. 이곳을 그린 겸재의 그림이 양천현아도이다(그림 2).
좌청룡 우백호처럼 팔 벌린 양천현아
간송의 최완수 선생에 의하면 이 그림의 한가운데 건물이 동헌(東軒)인 종해헌(宗海軒)이라 한다. 곧 양천현 행정의 중심 건물인 셈이다. 앞으로는 외삼문과 내삼문 두 개의 삼문(三門)이 위용을 자랑한다. 양천현 읍지(邑誌)대로 건물이 앉은 방향은 건좌손향(乾坐巽向: 24방위에서 乾은 서북, 巽은 동남 방향)으로, 건물의 뒤쪽은 서북으로 앉고, 바라보는 향은 동남인 건물이었다. 향교의 앉은 방위는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정남을 바라보고 있으니 향교와 동헌은 45도 비껴 앉은 셈이었다.
이곳 지형을 살펴보면 이내 알게 되는 것이, 궁산(宮山)의 품은 좌측 날개와 우측 날개 즉 좌청룡과 우백호가 둥글게 감싸고 있어 좌우의 건물은 자연스럽게 비껴 있는 방향으로 자리 잡게 된다.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김희성의 양천현아도(그림 3)나 겸재의 양천현아도(그림 2)에서는 이렇게 비껴 앉은 방위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규장각 소재의 1872년 양천현 지도(그림 4)에는 비껴 앉은 건물 방향이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겸재의 양천현아도에는 화제가 쓰여 있다. 역시나 천금물전(千金勿傳: 천금이라도 넘기지 마라)이라는 도장 옆으로, ‘莫謂陽川落. 陽川興有餘(막위양천락 양천흥유여)’라는 화제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연말(歲除)에 사천이 겸재에게 보낸 편지 시라 한다.
莫謂陽川落. 양천에 떨어져 있다고 말게
陽川興有餘. 양천에 흥이 넘칠 터이니.
妻孥上宦去, 처자를 데리고 부임해 가면,
桂玉入倉初 보배가 비로소 곡간에 들며.
雨後仙遊客, 비온 뒤엔 선유객(仙遊客) 되고
春來網稅魚. 봄이 오면 세어(稅魚)를 그물질할 걸
忽看鳧鷺迅. 오리와 백로들 바쁜 걸 보면
飛到似文書 날아와 이르는 것 문서 같으리. (기존 번역을 전재)
이제 겸재미술관(4로 표시)으로 향한다. 교육과 전시가 함께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미술관이 자리 잡은 언덕 높은 곳이 망동산(望東山) 터라는데 겸재의 붓을 상징적으로 조성하여 세워 놓았다. 야외에는 어린이들이 그린 겸재의 그림을 타일에 옮겨 모자이크 벽면을 조성해 놓았다. 거기에는 재미난 그림이 많으며,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은 겸재의 그림 시화상간도를 모티브로 해서 그린 그림이다. 시화상간도에 있는 두 노인 대신에 여자 아이 둘이 마주 앉아 있다. 여자 아이가 자신과 친구를 주인공으로 패러디하여 그렸으니 재미가 있다.
사천 시와 겸재 그림이 서로를 마주 보니
이제 다시 겸재의 시화상간도로 돌아간다. 그 그림에도 ‘천금물전(千金勿傳)’ 도장 옆으로 화제(畵題)가 쓰여 있다.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이 화제는 무슨 뜻이며 어떤 연유로 이 그림에 쓰여 있는 것일까? 너무도 유명한 그림과 이야기가 알려져 있어 필자가 굳이 부연할 필요도 없는 그림이다. 사천은 겸재가 양천으로 떠나기 전 약속을 했다. ‘나의 시와 그대의 그림을 바꾸어 보도록 하세.’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겸재가 부임한 이듬해 봄 겸재에게 편지를 보냈던 내용이라 한다. 그 내용인 즉,
“나와 정겸재 사이에는 시와 그림을 주고받자는 약속을 했는데 약속대로 왕복을 시작한다.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꿔보면 무슨 말로 경중에 값을 매기겠는가.
시는 간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두르니 어느 것이 쉽고 어려운지 모르겠구려.
신유 봄에 사제”
與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期爲往復之始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詩出肝腸畵揮手 不知雖易更雖難
辛酉仲春 槎弟 (기존 번역을 전재)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시화상간도를 보면 큰 소나무 아래로 신선 같은 두 노인이 마주 앉아 있다. 66세의 겸재와 71세의 사천이다. 누가 겸재이고 누가 사천일까?
이 그림의 결론을 내기 전에, 사천과 겸재는 어떤 사이였을까? 자못 궁금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깨벗고’(발가벗고) 지낼 만큼 절친(切親)이었을까? 우선 겸재와 사천은 5년의 나이 차이가 있다. 집안으로 볼 때 사천은 명문세가 집안으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었고, 겸재는 4대에 걸쳐 현관(現官: 현직에 있는 관리)을 배출하지 못해 양반에게는 면제되어 있는 군역을 치러야 할 정도로 한미해진 경화사족 출신으로 생원이나 진사도 되지 못한 상태였다. 과연 두 사람은 삼연(三淵)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했을까? 삼연이 고시(古詩)의 번창을 위해 열었다는 낙송루(洛誦樓)나 미사리 강 건너 있던 청음 김상헌을 배향한 석실서원 농문(濃門: 농암 김창협 문하)에도 겸재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논문에 언급되었듯이, 겸재 사후에 겸재를 애도한 관아재 조영석의 겸재정동추애사(謙齋鄭同樞哀辭)에도 겸재의 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觀我齋稿卷之四).
정공의 휘는 선이요 자는 원백이며 스스로 지은 호는 겸재, 광산인이다. 어려서는 서울 북쪽 동네 순화방 백악산 아래에서 살았고, 나 역시 순화방에서 살았는데 공보다 10세가 어리니 내가 유모차를 탈 때 공은 이미 엄연한 어른(冠者: 관례를 올린 사람)이었다. 따라서 항상 공을 공경하여 일찍이 “너, 자네”라고 한 적이 없었다. 공은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나 역시 그림을 좋아하는 벽이 있었다.
(鄭公諱歚字元伯. 自號謙齋. 光山人. 自少居于漢師之北里順化坊白岳山下. 余亦世居順化坊. 少公十歲. 余竹馬時. 公已儼然冠者. 故常敬之. 未甞爾汝焉. 公以畫名於世.余亦癖好畫.)
여기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겸재보다 어린 명문세가의 사람들이 겸재에게 너, 자네(爾汝) 같은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체가 낮은 지경이 된 것이리라. 이 같은 상황은 영조 때 문신 남유용의 뇌연집(雷淵集)에도 보인다. 겸재와 사천을 이야기하면서 사천은 이공(李公)으로, 겸재는 정군(鄭君)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사례들로 볼 때 아쉽지만 겸재는 사천을 깍듯이 대했을 것이고, 사천은 격의없이 대하는 사이였을 것 같다.
신분 낮아진 겸재와 업신여기지 않은 사천
그러면서도 사천은 겸재에게 예의를 지켰을 것이다. 앞 편지글 시를 보면 ‘내 시 그대 그림(我詩君畵)’으로 예의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서 잠시 한문의 2인칭 대명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而, 爾)나 여(汝, 女)는 ‘너, 자네’처럼 아랫사람에게 쓰는 2인칭 대명사임에 비해 군(君)은 ‘그대’로 상대를 대접하는 말이다. 혹시 제군(諸君)이란 말을 하대(下待)하는 말로 오해하여 군(君)을 낮추는 말로 오해하지 마시기를. 이렇게 볼 때 사천은 겸재에게 이여(爾汝)보다 군(君)을 써 높여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시화상간도에서 누가 겸재이고 누가 사천일까? 아마도 얼굴을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는 이가 사천, 등을 보이고 있는 이가 겸재일 것 같다. 방위를 볼 때 북쪽(뒤쪽)이 상석(上席)이고 남쪽(앞쪽)이 하석이다. 임금은 항상 북에 앉아 남면(南面: 남쪽을 바라본다)한다. 또 그림을 그리는 지필묵(紙筆墨)으로 볼 때 깔려 있는 종이 오른 쪽으로 붓과 벼루가 있다. 또 하나, 사천은 시를 쓸 때면 한 구절마다 수염을 몇 가닥씩 만진다는 글이 남아 있으니 북쪽에 수염을 잘 기른 이가 사천이리라.
시화상간과 관련해서는 다른 시(詩)도 전해진다.
나와 그대가 합해야 왕 망천이 되는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둘이 다 퍼덕이네
돌아가는 나귀 멀어져도 아직은 보이는데
노을이 지는 강서를 슬프게 바라보네
정선과 이별하며 (贈別鄭元伯)
爾我合爲王輞川
畫飛詩墜兩翩翩
歸驢已遠猶堪望
怊悵江西落照天
당나라 문인 왕유는 장안의 남쪽 종남산 망천(輞川)에서 시(詩)와 화(畵)를 벗삼아 살았기에 시불(詩佛)로 불렸다. 왕유는 혼자 시와 화를 결합하여 극치를 이루었지만 겸재와 사천은 둘이 합쳐져야 비로소 왕유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겸재미술관을 나서면 길 건너로 궁산 땅굴이 있다. 1930년대 일제가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파낸 인공 땅굴이다. 100여m가 된다고 한다. 낙석 위험이 있어 끝까지 가 보지는 못한다. 여기에서 파낸 토석은 김포비행장 건설에 쓰였다고 한다. 해설사 말씀이 이때 궁산의 북쪽 능선도 파내서 경사면이 많이 가팔라졌다 한다.
이제 궁산땅굴을 돌아 나와 산을 오르는 둘레길 코스로 들어서면 도중에 금호어울림 아파트 방향 아래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난다. 층계길 아래에 궁산 당집이 있다. 지금처럼 개발되기 이전 궁산 아래 자연부락민들의 안녕을 빌던 당집이었다 한다. 내부에는 위패만 있을 뿐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당집 아래에는 오랜 샘터가 있다. 이제는 아무도 돌아보는 이 없으니 잊힌 샘터가 되었다. 어느 때인가는 이곳 자연부락 사람들의 생명수였을 샘이지만 아파트촌으로 바뀐 이 지역에서 잊혀졌다.
이제 잣나무 조림지를 지나 궁산 정상으로 오른다. 높이 74m, 옛 양천고성(陽川古城: 사적 372호)이 자리했던 곳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땅이었다가 통일 후에는 신라가 성을 쌓고 지킨 흔적이 보인다 한다. 고성 터 발굴 결과 많은 토기들이 나왔다 한다. 산 정상 한켠에는 도당할머니를 모시는 성황사(城隍祠)가 자리하고 있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성황사가 성산에 있다’(城隍祠在城山)고 했다. 10월 초하룻날 제물을 갖추고 성황님께 제를 올린다 한다.
오로지 중국만을 동경한 조선 양반들
성황사에서 산책로로 잠시 내려가면 새로 재현한 소악루(小岳樓)를 만난다. 중국 양자강 동정호 옆 악양 시(옛 巴陵)에는 중국 3대 누정(樓亭)의 하나인 악양루(岳陽樓)가 있다. 양천 옛사람들은 궁산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수를 동정호(洞庭湖)라 여겼다. 그래서 궁산에 정자를 짓고는 작은 악양루란 뜻을 담아 소악루(小岳樓)라 했다. 그는 동복현감을 지낸 이유(李楡, 1675~1757)로서 1737년(영조 13) 경관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자신의 집 부근 옛 악양루 터에 지은 것이라 한다. 궁산 동쪽 기슭에 있던 원래의 소악루는 소실되었고 1994년 5월 강서구청이 한강변 경관 조성과 조망을 고려하여 현 위치에 신축했다. 겸재는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소악루와 관련한 두 점의 그림을 남겼다. 소악루와 소악후월(小岳候月)이다.
소악루 그림을 보면 한강의 우측 산기슭에 소악루가 자리 잡고 있다. 규장각 지도에서 보듯 소악루 터는 궁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물론 지금의 소악루 자리는 아니다. 이제는 모두 육지화되어 버스와 택시 회사의 앞마당이 된 그곳에는 한강물이 깊게 들어와 있고 세 척의 배도 떠 있다. 88도로(올림픽대로)가 생기면서 궁산 북쪽이 잘리고 그 남쪽은 모두 육지가 되어 그림에 배가 떠 있는 강물 자리는 이제 88도로에서 가양동으로 들어오는 큰 도로가 되어 있다. 버드나무 축축 늘어진 너머로 향교와 홍살문이 보인다.
또 하나 그림은 소악후월(小岳候月: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린다)인데 소악루 그림과는 반대로 소악루가 강 좌측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좌측 산은 궁산이다, 이제는 육지의 도로가 된 동신아파트와 그 앞 대로에서 동쪽에서 조금 북으로 비낀 방향으로 그린 시각이다. 즉 소악루 시선과는 반대 방향 시선으로 그린 것이다. 우측에는 탑산, 증미산, 선유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가 보이고 달은 절두산 위로 떠올랐다. 앞 모래톱은 난지도의 옛 모습이다. 제일 뒤 좌측으로 높이 솟은 산은 인왕산이리라. 지금도 궁산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면 그 정상의 모습이 이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는 사천의 시가 붙어 있다.
巴陵明月出
先照此欄頭
杜甫無題句
終爲小岳樓
파릉에 밝은 달 뜨면
먼저 이 난간머리 비치지.
두보의 싯구가 없으니
결국 소악루지.
사천은 소악루를 생각하니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 ‘등악양루(登岳陽樓: 악양루에 오르다)’가 떠오른 모양이다.
昔聞洞庭水 今上岳陽樓
옛날 동정호 말로만 듣다가,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후략)
이 땅을 소중화(小中華)로 여기며 산 조선 지식인들의 한계이리라.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