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0호 김금영⁄ 2020.06.25 11:37:40
스포츠의 열기와 기업의 이색 마케팅이 만났다. 스포츠 대회를 창설 및 후원하고, 스포츠 브랜드와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콘셉트의 컬래버레이션으로 흥미를 끄는 등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 중 첫 번째로 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 이어 시니어 국가대항 바둑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농심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신라면배·백산수배로 ‘바둑 르네상스’ 꿈꾸는 농심
2016년 최고 시청률 18.8%를 기록하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화제가 된 장면이 있었다. 극 중 바둑기사 최택(배우 박보검 분)이 중국 기사들을 상대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승리를 거둔 것. 이 장면은 2005년 이창호 9단이 한국 기사가 모두 탈락한 가운데 5연승을 거두며 한국팀 우승을 이끌었던 실화를 오마주한 것으로, 바둑계에서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내용 중 하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일어난 현장이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이하 신라면배)이었다.
1999년 시작돼 올해 22주년을 맞은 신라면배는 농심의 대표적인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 중 하나다. 중국 진출을 위한 마케팅 전략을 고심 중이었던 농심. 이때 떠올린 것이 일반적인 대형 광고나 론칭 행사가 아닌 바둑이었다고. 농심 측은 “중국 진출을 준비하던 당시 중국에 기업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킬 방법을 고심했다. 그때 중국에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 중 바둑이 눈에 띄었다”며 “바둑에 대한 열기가 높기로 유명한 중국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적격이라 판단했다”고 밝혔다.
즉 중국 현지 정서와 문화를 접목한 스포츠 마케팅으로 자연스럽게 기업의 인지도를 높이고자 한 것. 이에 1999년 7월 한국기원과 함께 바둑 국가 대항전인 신라면배를 창설했다. 한국, 중국, 일본의 프로 기사가 신라면배 반상에서 바둑 실력으로 맞붙었다. 제1회 대회엔 한국의 조훈현·이창호, 중국의 마샤오춘·창하오,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 등이 참여해 바둑팬의 눈길을 끌었다.
대회를 후원하는 농심은 대회명에 자사의 대표 제품명을 넣어 자연스럽게 농심의 인지도와 신라면 브랜드를 동시에 부각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농심 측은 “한국, 중국, 일본 국가 대항전 형태로 진행되기에 아시아권에서 신라면배의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매년 중국에서 치러지는 결승 대회는 중국 CCTV, 상해 TV, 인민일보 등 다수의 중국 언론사에서 보도할 정도로 현지에서 높은 관심을 보였다”며 “바둑 대회의 목적이 중국 시장 공략에 있는 만큼, 대국장 인테리어를 비롯해 팜플렛, 제품 전시, 기념품, 시식행사 등 대회를 통해 농심과 신라면을 알리는 전략을 대회 창설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밝혔다.
대회에 대한 현지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주요 소비자층의 확대와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농심에 따르면 1999년 신라면배 창설 당시 700만 달러였던 농심의 중국 사업은, 2019년 2억 7000만 달러의 규모로 약 40배 가까이 성장했다. 특히 중국이 처음 우승했던 신라면배 제9회 대회는 중국 전역 700여 개 언론사를 통해 보도됨으로써 수백억 원에 해당하는 마케팅 효과를 거둔 것으로 분석됐다.
농심 측은 “중국에서 두 차례 치러지는 대회에서 중국 소비자들이 대국을 관전하기 위해 대국장, TV 앞에 모여들었고, 이들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신라면 소비로 이어졌다. 언론보도와 입소문 등의 광고 효과는 특약점과 대형마트 입점 등 유통망 확대를 가져왔다”며 “신라면배의 흥행은 농심이 초창기 중국 사업의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신라면배는 2015년 제17회 대회부터는 우승 상금을 5억 원으로 인상하며 몸집을 점점 키웠다. 현재는 제21회 대회가 진행 중이며, 결승 라운드가 8월 18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릴 예정이다.
농심은 신라면을 알리는 데 국경, 인종을 뛰어넘는 파급력을 지닌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신라면배를 비롯해 지난해 6월엔 신라면을 알리는 모델로 축구선수 손흥민을 발탁했고, 최근 새로운 신라면 광고를 공개했다. 농심 측은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의 매운맛을 보여주는 신라면과 손흥민의 모습을 스토리로 풀어냈다”며 “세계 축구 팬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흥민이 골을 넣는 장면에 신라면을 대입해 세계의 벽을 뛰어넘은 자랑스러운 국가대표라는 메시지를 강조했다”고 밝혔다.
오프라인 스포츠 → e스포츠 마케팅으로 범위 확대
이 가운데 농심이 최근 또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신라면배에 이은 또 다른 국가대항 바둑대회를 창설한다는 것. 대회 명칭은 ‘백산수배 시니어 세계바둑최강전’(이하 백산수배)으로 한국, 중국, 일본의 만 50세 이상 프로기사가 참가하는 세계기전이다.
제22회 신라면배 바둑대회 개막 일정(10월 12~16일)과 동일하게 중국 베이징에서 막이 오를 예정이다. 각 국의 선발 과정을 거친 한국, 중국, 일본 시니어 국가대표 프로기사가 베이징에서의 1차전(개막)과 부산에서의 2차전(결승)을 통해 우승자를 가린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연승전을 벌이는 기존 신라면배와 동일한 경기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승 상금은 총 1억 8000만 원, 연승 상금은 500만 원이다. 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영향이 계속 이어질 경우, 대회 창설은 연말이나 내년으로 미뤄질 수 있다.
농심 측은 “백산수배는 신라면배의 두 번째 버전으로, 한·중·일의 만 50세 이상 시니어 기사가 4명씩 팀을 이뤄 연승전으로 승부를 가리는 단체전”이라며 “형식은 기존 신라면배와 같지만 출전 선수 연령대가 높다는 점이 다르다”고 밝혔다. 꾸준히 신라면배가 잘 이뤄져오고 있던 가운데 굳이 대회를 또 마련한 이유는 ‘바둑의 르네상스 시대 재현’이다. 백산수배의 주역이 시니어 기사라는 점에서 이 부분이 엿보인다.
농심 측은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으로 어려워진 바둑계를 지원하는 동시에, 세계 바둑 애호가에게 바둑에 대한 추억과 감동을 다시금 전하기 위해 레전드 매치의 개념으로 백산수배를 새롭게 준비중”이라며 “신라면배가 자라나는 바둑 기사의 치열한 장이라면, 백산수배는 과거 화려했던 바둑 전성기를 현 시대에 재현하는 시니어 기사의 치열한 대회로 열기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백산수배 참가진이 눈길을 끈다. 제1회 신라면배에 참가하며 바둑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던 조훈현 9단, 요다 노리모토 9단, 마샤오춘 9단이 백산수배에서 다시 맞붙는다. 농심 측은 “당대 전성기를 누렸던 이들의 녹슬지 않은 실력을 이번 바둑 삼국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백산수배는 신라면배에 이은 농심의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이기도 하다. 농심 측은 “대회 타이틀로 백산수를 내세운 건 새로운 성장 동력인 백산수 사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다”라며 “신라면배가 농심의 중국 사업에 있어 신(辛)라면을 각인시킨 신(辛)의 한 수로 평가받은 만큼, 백산수배도 중국을 비롯한 해외 시장에 백산수를 알리는 좋은 기회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신라면배로 스포츠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본 농심은 백산수배를 포함해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바로 e스포츠(컴퓨터 및 네트워크, 기타 영상 장비 등을 이용하여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 마케팅으로의 범위 확대. 최근 농심은 국내 e스포츠 팀인 ‘팀 다이나믹스’에 대한 인수 협약을 맺고, 내년 출범예정인 한국프로게임리그에 도전하며 e스포츠 분야에 진출한다고 밝혔다. 한국프로게임리그는 리그오브레전드 한국 프로게임리그협회(LCK)가 운영주체로, 심사를 통해 9월 말 총 10개의 팀을 선정할 계획이다.
팀 다이나믹스는 2016년 창단된 리그오브레전드 프로 게임단으로, 지난해 운영사가 바뀌며 현재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농심은 9월 말 팀 다이나믹스의 한국프로게임리그 가입이 확정되면, 리그가입비와 운영비 등을 투자해 해당 팀을 최종 인수하게 된다.
기존 오프라인 스포츠 대회 마케팅에 집중해 왔던 농심은 온라인 스포츠 마케팅으로 범위를 넓혀간다는 계획이다. 중년층 위주로 구성됐던 바둑팬 이외에 10~30대 젊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e스포츠를 새로운 기회의 장으로서 접근하려는 의도로도 분석된다.
또 e스포츠는 미래가 더욱 각광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미래를 바꿀 거대한 산업분야 트렌드 8가지’ 중 하나로 e스포츠를 선정한 바 있다. 또 ‘e스포츠 글로벌 시장 전망’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e스포츠 시장 규모가 올해 15억 9200만 달러(약 1조 9200억 원)에서 2022년 29억 6300만 달러(약 3조 5880억 원)로 87%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업계 관계자는 “e스포츠는 디지털 기술이 점차 발달하고 언택트(비대면) 트렌드가 주목받는 시대에 맞는 특성을 지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보다 범위와 규모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며 “이런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소비자층을 넓히기 위해 e스포츠 마케팅에 투자하는 기업들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농심 측은 “e스포츠 분야 진출은 신라면배와 같은 스포츠 마케팅의 일환”이라며 “e스포츠는 국경과 지역을 넘어서는 관심과 인기를 얻고 있어 농심의 글로벌 시장 공략에 또 다른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게임을 즐기는 젊은 층과의 소통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