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1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0.08.13 13:53:04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 교보아트스페이스에서의 개인전 ‘손동현: 하더, 베터, 패스터, 스트롱거’에 소개된 작품 중 ‘프롬 아우터 스페이스(From Outer Space)’(2012)는 SF 영화의 팬들이 선정한 가장 멋진 외계인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번 전시만 보아도 외계인, 악당, 우주선 등 다루는 소재의 범위가 매우 넓은데 그림의 대상을 어떻게 선정하는지 궁금하다.
수적으로 정말 많아서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할지 고민하다가 SF나 판타지 영화의 마니아들이 순위를 매긴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당시의 생각으론 내가 특정 장르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리스트에 기반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프롬 아우터 스페이스’의 경우 영화 속 외계인의 종류도, 순위를 매긴 리스트도 진짜 다양해서 여러 개의 리스트를 참고해서 결정했다. 화첩은 페이지의 제한도 있기 때문에 22종만 선택했다. ‘하이퍼스페이스(Hyper-Space)’(2012)에선 사이트 ‘덴 오브 긱(Den of Geek)’에서 최고의 우주선 50위 안에 든 우주선을 모두 그렸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형태와 스토리를 가진 우주선들이어서 담아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작품마다 대상의 선정 기준이 다르다. ‘왕의 초상’(2008)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발표한 싱글 앨범에 기반한 것이고, ‘바디 앤 소울(Body & Soul)’(2018)은 성우 배한성 선생님이 더빙하신 인물들을 그린 것이다. 개인적으로 더빙된 외국 영화에 대한 향수가 있다. 한 문화권의 생산물이 다른 문화권으로 옮겨올 때의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 ‘헨치맨(Henchman)’(2011)은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악당의 부하들을 그린 것이다. 작품을 보는 순간 전통 초상화의 초본(草本)이 떠올랐다. 초본은 정본을 만들기 위한 밑그림이다. 보통 얼굴과 어깨 부분까지만 그려진다.
초본으로 생각하고 그린 것들이다. 그런데 ‘007 시리즈’의 악당으로 스무 점 넘게 연작을 하고 나니 악당 수하의 초상화까지 정본으로 그릴 당위성을 찾기 힘들었다. 고민하다 초본을 벽에 걸어보니 몽타주 같기도 하고 재미있어서 그 자체로 마무리 지었다.
- 영화의 등장인물은 가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실제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릴 수 없고, 영화에서 정면상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특히 ‘헨치맨’의 경우에는 주인공도 아니고 중심 악당도 아니기 때문에 작업을 위한 이미지를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 같다.
영화 속 존재를 그릴 경우, 영화의 캡처 화면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얻게 된 이미지, 해당 배우가 출연한 다른 영화의 이미지와 프로필 사진 등을 종합해서 재구성한다.
- 본인이 만들어낸 캐릭터를 제외한 대부분의 초상화에서 인물의 정면상을 보여주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한국의 전통 초상화를 보면 완전 정면상보다는 정면의 약 70~80% 정도를 보여주는 7분면이나 8분면이 더 많다. 그런데 모델의 표정을 살리기도 쉽고 태도와 성격 등을 더 잘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이클 잭슨을 그렸던 ‘왕의 초상’ 때부터 정면상을 그리게 되었다. 한편 내가 만든 캐릭터의 경우 구체적인 인물의 초상이라기보다 인물의 형태를 빌어 온 것이기 때문에 성격이나 심상보다는 능력을 보여주는 액션이 필요했고, 자연히 다양한 포즈를 그리게 되었다. 화폭의 공간을 활용하기에도 그것이 효과적이었다.
- 그동안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을 그린다는 점에서 손동현의 초상화는 진정한 전신사조(傳神寫照)가 불가능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가상의 인물이지만 작가가 자료를 조사, 분석하고 인물의 목소리, 행동, 표정 등을 관찰하여 해당 캐릭터의 성격과 내면까지 담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 시대여서 가능한 전신사조를 보여주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대학 시절 초상화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땐 약간의 반발심과 “전신사조란 말을 하긴 쉬운데 정지된 자세와 표정으로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오늘날 생생한 리얼함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매체와 기법은 무엇일까?”와 같은 물음이 있었다. 그래서 가상의 인물이나 직접 만날 수 없는 대상을 선택했다. 그런데 ‘왕의 초상’에서부터는 “진짜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자료 조사에도 더 시간을 들였고, 연작을 구성해 여러 장치들을 추가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대에 맞는 전신사조를 완벽히 구현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전신사조라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방도를 마련해 본다” 정도로 생각하고 작업을 진행했다.
- 조사하고 공부하는 과정이 필수적인 작업이다. 초상화를 위한 자료 조사 등을 어느 정도로 진행하는가? 평상시에 SF 영화나 만화 등도 많이 보는가? 작업을 통해 일관되게 전통 동양화의 형식과 기법, 개념과 문법 등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 역시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
화면에 모델의 본질을 어느 정도 담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사실 완벽한 리서치는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완벽하다는 것의 기준도 모호하다. 그래서 시간이나 노력의 목표 지점을 설정하지 않고 가능한 만큼 최선을 다하는 정도이다. 연작 같은 경우에는 작업이 중간에 바뀌거나 추가되고, 구성이 변하기도 한다. 작업과 관련해 동양화론이나 미술 이론을 꾸준히 보고 있긴 하다. 당연히 무언가를 계속 공부하게 된다. 특정한 영역을 공부해야겠다고 정해놓기보다는 내 작업에 관한 의문이나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한 고민과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는 편이다. 영상 매체나 장르 소설 등을 좋아하긴 하는데 모든 장르에 마니아적으로 몰두하진 않는다. 작업과 관련된 부분에 집중하는 정도다.
- ‘하이퍼스페이스’는 부채를 접었다 펼칠 때 이미지가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을 SF영화 등에 등장하는, 공간과 거리를 압축해 이동하는 우주선과 연결시킨 작품이다. 한편 ‘배틀스케이프(Battlescape)’(2013)는 만화 ‘드래곤볼(Dragon Ball)’ 전투 장면의 개별 컷마다 그려진 배경을 이어 그려 완성한 산수화다. 둘 다 다양한 시공간의 축적 혹은 이동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화가가 이동하면서 경험한 것을 종합적으로 담아내는 전통 산수화와 연결된다.
‘배틀스케이프’는 처음부터 그와 같은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그래서 ‘드래곤볼’을 선택했다. 작가 혹은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토리야마 아키라(Toriyama Akira)는 머릿속에 떠오른 풍경과 액션의 장면들을 계산하지 않고 거침없이 그려나갔다고 한다. 만약 ‘드래곤볼’의 전투 장면이 여러 컷으로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싱글 채널 이미지에 모인다면 굉장히 현란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각 컷의 배경을 가로로 긴 화면에 모아 서사가 있는, 변화하는 산수화를 그리게 되었다. 이 작업은 2010년경 병풍에 블록버스터 영화 장면들을 모아서 그렸던 ‘섬’ 시리즈와도 긴밀하다. ‘섬’은 펼치면 하나의 큰 화면이지만 한 폭, 한 폭이 개별적인 화면이 될 수도 있는 병풍의 특성을 고려했던 작업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진 다른 것은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다 나온 것이 두루마리에 그린 ‘배틀스케이프’이다. 한편 나는 부채를 접었다 펼치는 행위도 그와 유사한 경험을 만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접은 부채를 이동시키면 공간을 접어서 이동하는 것과 비슷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하이퍼스페이스’라 제목을 붙이고 우주선을 그려 넣었다.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라는 점도 우주선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 누군가가 본인의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아쉬움을 느꼈던 적이 있는가? ‘왜 내 작업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란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만약 그런 부분이 있다면 작업을 선보이는 방법이나 순서 등에서 내가 무언가를 잘못 선택했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오해가 생긴 것이다. 그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작가인 내가 직접 설명을 하거나 강요할 부분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부분이라 생각한다.
- 본인의 작업과 팝 아트(Pop art)와의 연관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이미지를 어디에서 가져오고 참고하는가를 생각하면 팝 아트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작업하는 방식이나 작업이 변화해온 과정 등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의 작업과 팝 아트 사이에 접점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매체나 형식적인 부분에서 전통 동양화의 방식을 고수하는데 상대적으로 많이 언급되지 않는 것 같다.
최근에는 나의 작업을 설명할 때 한국화이고 한국적 전통을 계승하는 작업이라는 이야기를 안 하는 편이다. 물론 “우리 시대에 동양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항상 생각하는 편이고 현재 한국 사회, 나아가 동아시아의 시각 문화가 갖고 있는 모습을 포착하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작업이 하나의 특정한 범주에 한정되길 원하지 않는다.
- 혹시 다른 매체를 사용하거나 다른 장르로 작업을 확장시킬 계획은 없는가?
나는 동양화가 재미있다. 그냥 하는 대답이 아니다. 전통 동양화의 표현 방식과 형식에서 작업할만한 거리가 정말 많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하나의 작업이 끝나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다른 방식으로 응용하고 연결해 가는 게 정말 재미있었다. 요새는 형식만 빌려오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재료와 기법을 갖고 유희하듯 작업하고 있고, 내가 길을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작업의 방향이나 방식이 조금 바뀌었다. 그동안 새로운 매체에 관한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지만 풀어낼 기회가 없었는데, 최근에 잉크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봄 갤러리2에서 열렸던 개인전 ‘Ink on Paper II’에서 잉크라는 재료 자체를 출발점으로 삼은 작업들을 처음 선보였다. 누군가는 대단한 매체의 전환이라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굉장히 다른 재미를 느끼고 있어 변화의 시작점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