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전시장에 들어서자 분홍빛 장미꽃이 한가득이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신비로운 분위기의 존재들이 눈에 들어온다. 방금 전까지 머물렀던 시끄럽고 복잡한 현실을 잠시 잊고 내 눈 앞에 펼쳐진 환상적인 이미지에 흠뻑 빠져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성은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신화 혹은 동화를 듣는 듯하다. 눈앞에는 이야기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느덧 이야기는 끝나고 언어로 표현하기 난해한,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이 계속 떠올랐지만 입을 떼는 순간 모두 사라져버렸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만날 수 있는 이수경의 ‘전생역행그림’과 ‘오 장미여!’(2020)는 작가가 최면을 통한 전생 역행 체험에서 만났던 장면들을 회화로, 이야기로 담아낸 것이다. 그것이 정말 전생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업 과정을 통해 작가의 꿈과 무의식, 내면에 담긴 생명력과 상상력, 에너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수경은 작품에 자신을 온전히 담아낸다. ‘전생역행그림’ 사이사이 걸린 ‘매일 드로잉’도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치유의 기록이자 예술적 행위이다.
이수경의 작업은 언제나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도 예외는 아니다. 끝없이 쏟아지는 이미지들은 상징이 되어 끝없이 의미를 생성한다. 동시에 복잡다단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논리적으로 끝없이 분석할 수 있지만 마음과 머리를 다 비우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한 작품이다.
“전생 체험이 내게 해준 이야기를 나눈다”
이수경 작가와의 대화
- 최면을 통해 전생, 전생의 전생으로 역행하며 만난 장면들을 그려낸 ‘전생역행그림’의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2014년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붓질이 회화의 핵심인 것 같아 한국 춤을 배웠다. 또한 나의 무의식을 탐사하면 나만의 독특한 모티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최면을 통한 심리상담사를 찾아가 ‘전생역행그림’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2014년 매달 한 번씩 4~5시간 동안 전생 역행을 체험했다. 최면 상태에 들어가면 마치 영화를 보듯 모든 장면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 비디오 작업인 ‘오 장미여!’는 ‘전생역행그림’의 이미지와 목소리가 전해주는 전생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제작 방법이 궁금하다.
‘오 장미여!’ 영상 작업의 이야기는 전생 역행 체험의 극히 일부분이다. 등장하는 그림들은 그 이야기에 연관되는 작품 이미지이다.
- 전생을 만나고 그것을 시각화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윤회와 순환을 떠올리게 한다. 최면에서 만나는 장면들이 정말 본인의 전생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작품과 관련해 꿈 혹은 무의식과의 관련성이 언급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전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나 호기심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어떤 이해하지 못할 일에 대한 만능 처리 장소인 전생이라는 시공간을 우리가 어떻게 여기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다. 전생 체험을 통해 내가 얼마나 재능있는 이야기꾼인지를 발견하게 되어 흥미로웠지만 동시에 내 무의식의 영역에서 무엇이 나를 억압하고 두려움을 만들어 내는지 발견하기도 했다. 지구 안에서 나는 여러 존재들과 연결되어 이어져 내려온 에너지이자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전생에 구체적인 어떤 인물들이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 ‘전생역행그림’뿐 아니라 치유를 위해 시작한 ‘매일 드로잉’은 현실에서는 인식하지 못했던, 그러나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작업처럼 보인다. 자신의 작업에 스스로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 궁금하다.
심리상담을 전공한 친구의 권유로 만다라 그림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낙서 같은 드로잉과 만다라 그림이 같이 그려진 형식으로 진행된 것이 ‘매일 드로잉’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일 중독자라서 나에게 ‘매일 드로잉’은 공백을 채워 주는 귀한 작업이다. 드로잉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작업은 나에게 변화를 준다. 나는 어제와 다른 내가 되기 위해 작업한다.
-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의 전시 ‘오 장미여!’(2020)에 소개된 작품뿐 아니라 대부분의 작업에서 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일관되게 느껴진다. 이런 분위기는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나는 어릴 때부터 존재에 대한 물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마음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미술의 형식이라든지 아방가르드한 태도에 대한 작업보다는 회화나 조각이라는 기존의 매체를 사용해 마음의 영역을 탐사하는 데 집중해온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인류가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종교를 만들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유전자에 새겨진 마음,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어떤 성스러운 존재에 호소하는 작업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져간다.
- ‘매일 드로잉’은 모두 같은 크기의 종이에 작업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는 반복적이고 느리게 쌓아 가는 작업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같은 크기의 종이는 선택의 범위를 좁힘으로써 그림에 더 집중하게 해준다.
- ‘매일 드로잉’뿐 아니라 다른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여성 이미지의 시작을 알고 싶다.
피카소(Pablo Picasso)와 같은 남성 작가가 그린 여성의 이미지와 내 그림의 여성 이미지는 출발점이 다를 것이다. 내가 그린 여성들은 모두 유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여성들에게는 예측할 수 없는 여정이 펼쳐지는데 예측할 수 없는 희한한 존재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때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변신을 하는 등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존재들이다.
- 작업에 치유와 수행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매일 드로잉’, ‘번역된 도자기’, ‘불꽃’ 등의 작업에서도 치유와 수행이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작품은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 강하다고 느껴지는데, 이 역시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나 자신은 유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존재이지만, 나에겐 ‘지극한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거룩한 존재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나의 일생에 단 한 점이라도 내보일 수 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