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7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2020.11.16 09:45:26
(문화경제 =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이경미의 개인전 ‘아트조선 아뜰리에 프로젝트 Ⅲ You Will Never Walk Alone’이 작가의 작업실에서 열렸다. 최근작을 비롯해 다양한 시리즈의 작품들이 골고루 전시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과 재료도 함께 볼 수 있어 작가의 작업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림에 등장했던 책들이 쌓여 있는 전시장을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고양이들까지 함께 하니 나 자신이 작가의 작품 속에 입장한 것 같았다. 이번 전시에 대해 이경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이경미 작가와의 대화
- ‘아트조선 아뜰리에 프로젝트 Ⅲ You Will Never Walk Alone’을 위해 11월 3일부터 14일까지 거의 2주 동안 작업실을 개방했다. 작가의 작업실은 미지의 공간과 같아 관객들에게는 반가운 프로젝트이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업실을 이렇게 오래 개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개인전을 작업실에서 진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상해 개인전에 출품되는 신작들을 국내의 관객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지난 9월 19일 오픈 스튜디오를 진행했었다. 작업의 과정을 볼 수 있고 그림에서 만나던 고양이들을 직접 만날 수 있어서인지 관객들이 즐거워했고 반응도 좋았다. 멀리 용인까지 와준 관객들과 작업실에서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경험은 나에게도 인상적이고 감사한 것이었다. 이 오픈 스튜디오를 본 아트조선이 작업실에서 진행하는 개인전 ‘아뜰리에 프로젝트’를 제안해주었다. 올해 9월 열릴 예정이었던 개인전이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었던 터라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전시를 축소해서 진행하진 않았고, 작업실에 맞게 새로 기획했다. 내가 클래식한 태도를 가져서인지 신작은 전시장에서 발표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미 발표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되 전시장과는 다르게 보여주는 데에 집중했다. 작업실은 내가 잘 알고, 나에게 정말 익숙한 공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과감한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여유 있게 준비할 수 있었다. 작업실 벽에도 그림을 그렸는데,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내가 미술에 재능이 있고 무엇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생 때 학교 연극 무대를 위한 걸개 그림을 그리면서부터다. 주체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전환점을 전시에 담아 나의 경험과 작품, 그리고 작업실 공간을 이어보고 싶었다.
- 전시가 끝난 뒤 벽과 바닥의 그림은 모두 다 지워지는가?
나의 작업실이기 때문에 전시가 끝나도 그대로 남겨놓을 수 있다. 벽화를 이용해 다른 행사를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않았다.
- 이번에도 고양이를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모델이 되어준 실제 고양이와 같이 보니 색다른 느낌이다. 고양이는 작가 이경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소재이다. 그러나 고양이 작가라는 닉네임이 한계로 다가오기도 할 것 같다.
신진 작가일 때 고양이 덕분에 이름을 빨리 알린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로서 여러 가지 색을 가진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것들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다. 당연히 고양이를 그리지 않은 작업도 있다. 국내외 갤러리들과 일할 때, 큐레이터나 이론가와 대화할 때, 그리고 대중들과 만났을 때 강조되는 부분이 각각 다르다. 이번 전시는 평상시에 전시장을 즐겨 찾지 않는 사람들도 편하게 접근하고, 특히 젊은 층이 즐겁게 방문해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콘셉트로 진행하다 보니 고양이가 조금 더 부각되었다.
- ‘Shaped Panel Painting’(2020)처럼 사각의 프레임을 벗어난 작품을 꾸준히 제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Shaped Panel Painting’의 경우 누군가는 팝 아트적이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Shaped Panel Painting’의 구체적인 계획은 뒤러(Albrecht Dürer)의 판화 ‘묵시록(Apocalypse)’(1498)을 차용한 ‘New vertical Painting’(2016~2019)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이 작업에는 내가 어렸을 때 혹은 외국에 살면서 경험했던 만화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인쇄된 그림을 손으로 그리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주었다. 극사실에 가깝게 그려진 잡지 속 이미지들과 추상적인 패턴들, 전통적인 회화의 형식과 디자인적 요소들 사이의 충돌이 흥미로웠고 그것을 조금 더 대중적인 콘셉트에 맞게 쉐이프트 캔버스 작업으로 발전시킨 것이 ‘Shaped Panel Painting’이다.
사실 이 작품은 문과 같은 구조물을 만들어 바다의 풍경을 그렸던 ‘아홉 개의 문’(2006), 목재 파티션에 고양이와 커튼을 그린 ‘나나와 커텐’(2006), 병에 고양이를 그렸던 ‘병 시리즈 - 잭, 리제, 나나, 엘’(2005) 등에서부터 이어지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주로 유려한 선이나 선명한 색감의 변화, 볼륨 같은 다양한 감각을 전하는 자연의 형태, 꽃, 식물, 나무, 동물 등을 그렸다. 그것들은 대학생 때 내가 처음 서울에 도착해 만났던 수직적인 빌딩, 반복되는 창문 같은 추상적이거나 기하학적인 형상과는 다른 느낌을 전한다. 구체적이고 다양한 형상을 갖고 있다. 또한 대학 때 해외 미술 잡지와 도록에서 봤던 세련된 가구들이 놓인 디자인적 공간과 그곳에 걸린 그림들이 만들어내는 실루엣, 나의 아버지가 팔았던 풍선 속에 등장하는 형태들에도 영향을 받았다. 20년 가까이 회화 작업을 하다 보니 나에게도 새롭고 관객에게도 이전과는 다른 즐거움을 주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포맷을 계속 찾으려는 것 같다. 한편 이경미라는 작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작업을 알리기 위해 고양이 자체를 부각시킨 형태를 선택한 측면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 작업실에서 돋보기가 발견되었다. 정말 세밀하게 그리기 때문에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돋보기를 쓴다. 의과용 돋보기다.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계속 주의 깊게 보는 것이 좋고, 순간적으로 감정을 폭발하는 작품보다 ‘이 작은 세계 안에 무언가 있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작품에 더 애착이 간다. 나는 고양이가 달고 있는 방울 속의 우주 같은 포인트를 작품 안에 그려 넣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떤 회화 작품이든 돋보기를 사용해서 그리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
- 이번 전시에는 ‘Other Planes of the Moon’(2016), ‘Solar System at the Moment’(2016~2017)도 함께 걸렸다. 작업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이경미의 다른 작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 같다.
나는 이전부터 지구나 달을 그리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Other Planes of the Moon’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달의 이면을 그린 것이다.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동안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기 때문에 인류는 오직 촬영된 이미지로만 달의 뒷면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처럼 직접 볼 수 없는 우주를 탐구하는 앎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 탄복할 때가 있다. 한편 ‘Solar System at the Moment’는 박스 같은 형태 안에 태양계의 행성들을 내가 알게 되었던 순서대로 그린 것이다. 나는 그림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수집하는 행위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 태양계, 그리고 우주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 나의 불우한 환경, 그 속에서 내가 갖게 되는 감정이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 우주 안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고양이의 신비로운 눈을 보며 우주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은 경험을 어떤 형태로든 관객과 나누고 싶어 달의 이면과 태양계를 그리게 되었다. 삶을 생각하고 위로를 받는다는 점에서 전시 ‘You Will Never Walk Alone’이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와도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또한 여러 시리즈를 한 공간에서 한 궤로 묶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풍선 작업이 눈에 들어온다. 전시된 작품의 수가 많기도 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도 남다르다. 한순간에 바람이 빠지는 풍선을 보면 삶의 허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전에 필자와 했던 인터뷰에서 풍선 작업을 ‘이경미만의 바니타스(Vanitas)’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You Will Never Walk Alone’(2020)은 상해에서의 전시를 위해 직접 디자인한 풍선 중 하나를 그린 것이다. 풍선들에 적힌 글귀는 니나 시몬(Nina Simone)의 노래 제목인 ‘Ain’t Got No, I Got Life’에서 따온 ‘I Got Life’, 내쉬(gnash)의 곡 제목인 ‘I hate you, I love you’ 등이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You Will Never Walk Alone’은 성경에 등장하고, 1945년에 초연된 뮤지컬 ‘회전목마’의 노래이자 리버풀(Liverpool Football Club)의 응원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문구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코로나19 시대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초록색 풍선에 적힌 ‘I Got Life’의 경우 우울한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현재를 열심히 사는 게 더 현명하다는 생각에 선택했다.
풍선의 바람이 빠질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을 살아야 한다. 나에게는 바람이 빠진 풍선의 주름이 멋져 보인다. 무언가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다. 미래에 대한 상상이 인류를 진보하게 했지만 우울증이나 광기에 빠지는 것처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나는 고양이처럼 현재를 살고 싶다. 내가 작업할 때 항상 고양이들이 내 주변을 맴돈다. 작업에 대한 압박감으로 스트레스가 높아질 때쯤 내 앞에 드러누워 한숨 돌리고 나를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에게 예술가는 일상의 삶과 무관한 쓸모없는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풍선도 그렇다. 실제 삶에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그저 기분을 좋게 해줄 뿐이다. 나는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마치 고양이나 풍선이 내게 그랬듯 쉬어가기 버튼을 눌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