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3호 윤지원⁄ 2021.01.30 08:21:22
전기자동차가 내연기관 자동차를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내연기관차에 연료를 채우는 공간인 주유소의 운명도 달라졌다. 최근 현대자동차와 SK네트웍스는 기존의 주유소를 전기차 전용 충전소로 탈바꿈시킨 ‘모빌리티 라이프스타일 충전소’를 서울 강동구에 선보였다. 문화경제가 이곳을 찾아봤다.
현대차+SK, ‘미래 라이프스타일 충전소’ 제안
현대자동차와 SK네트웍스는 지난 1월 21일 서울 강동구 길동에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이 들어선 새로운 미래형 라이프스타일 충전소 ‘길동채움’을 새로 오픈했다. 이곳은 국내 최초의 전기차 전용 충전소 겸 복합 문화공간이다. 문화경제가 1월 25일 이곳을 방문해 보았다.
길동 채움은 연면적 4066㎡(약 1230평) 지하 2층 ~ 지상 4층 규모의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전기차 전용 충전소이며 복합 문화공간이다. 이 자리에서는 본래 SK직영 길동셀프주유소가 20년 가까이 터줏대감 노릇을 해 왔는데, 이곳을 두 대기업이 손잡고 미래형 라이프스타일 충전소라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SK네트웍스는 길동 채움을 ‘사람과 자동차 모두 채워가는 곳’이라는 콘셉트의 복합 시설이라고 소개했다.
1층에 위치한 전기차 전용 충전소인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은 이 모빌리티 라이프스타일 충전소의 핵심 시설이다.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국내 최고 수준의 350kw급 전기차 초고속 충전설비인 ‘하이차저’(Hi-Charger) 총 8기가 설치되어있는 국내 최대 규모 초고속 충전소다.
국내 대표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테라로사’ 길동점이 1층 일부와 2층 전체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테라로사가 서울에서 일곱 번째로 선보이는 매장으로, 자동차를 충전하는 동안 쉬어가는 손님들 외에도 인근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방문하는 경우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높은 층고가 주는 쾌적함에 테라로사 특유의 세련된 인테리어가 더해져, 서울 강동 일대 새로운 대표 핫플레이스로 부상할 전망이다.
3층에는 SK매직의 브랜드샵 ‘it’s magic’이 마련됐다. SK매직의 정수기, 공기청정기, 안마의자 등 제품을 직접 이용할 수 있는 브랜드 체험존이 운영되며, 프라이빗 다이닝이 가능한 공유 주방도 구성되어 있다.
4층에 들어선 ‘채움 라운지’는 SK네트웍스 임직원들이 근무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이다. 인근 지역에 거주하거나 출장 온 임직원들이 원격 오피스로 이용할 수 있으며, 강연이나 세미나도 열릴 예정이다.
주유소의 미래는 전기차 충전소?
이곳은 3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주유소였다. SK직영 길동셀프주유소는 1990년대 중반, 서울 지하철 5호선 길동역과 현대아파트 등이 들어서며 이 부근이 크게 개발된 이후 오랫동안 이 지역의 랜드마크 노릇을 해왔다. 다른 동네 여느 주유소와 마찬가지로 이 주유소도 지역발전의 상징이었으며, 풍요로움을 대변하는 곳이었다. 중부고속도로 상일IC에서 천호대로에 접어들면 얼마 안 되서 빨간 지붕의 이 SK주유소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드디어 서울에 들어섰다는 표지판처럼 여겨졌다. 그런 점 외에는 여느 주유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주유소 사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전국의 주유소는 1만 3000곳이 넘었고, 이듬해 알뜰주유소가 도입되며 그 수가 더욱 늘어났다. 이 무렵부터 주유소는 과도한 경쟁과 늘어나는 인건비로 수익성이 떨어졌다. 게다가 친환경 자동차 수요가 급격히 늘면서 주유소 사업은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2016년부터 운영을 중단하거나 폐업하는 주유소가 연간 150여 개에 달했다.
정유업계는 다양한 방법으로 주유소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편의점과 카페 같은 오프라인 휴식 시설을 확충하고, 쿠팡 ‘로켓배송’과 같은 21세기형 물류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또 전기자전거나 킥보드 같은 공유형 마이크로 모빌리티의 충전 스테이션을 설치하기도 했다. 전기차 충전 시설이 추가된 곳도 많아졌다.
그러던 2017년 9월 현대자동차와 SK네트웍스가 제휴를 맺었다. SK네트웍스의 직영주유소 중 3곳의 일부 공간에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였다. 현대자동차는 전기차 내수 시장 확대를 위해 관련 인프라 확대를 병행할 필요가 있었고, SK네트웍스는 주유소를 활용한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기차 수요 증가세가 빨랐고, 충전 인프라 구축에 대한 중요성도 갈수록 높아졌다. 이에 두 회사는 2018년 10월 31일 아예 전기차 전용 ‘모빌리티 라이프스타일 충전소’ 조성을 위한 업무 협약을 새로 맺었고, 변신의 첫 대상으로 SK직영 길동셀프주유소가 지목됐다.
이후 2년 남짓 공사를 거쳐 이곳은 국내 최초의 전기차 전용 초고속 충전소 겸 복합 라이프스타일 문화공간이 더해진 ‘길동 채움’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이차저’, 미래 그 자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설계했던 홍익대학교 민현준 교수가 건물을 설계했다. 정직한 직사각형 형태에 철골과 콘크리트의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별다른 장식 없이 파사드에 흰색 타공판을 주름지게 가공하여 설치한 것이 마치 레이스 커튼처럼 보여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인상을 더한다.
가까이 다가서면 1층의 ‘현대 EV 스테이션’이 눈에 띈다. 두 줄로 마주 보게 배치된 8기의 ‘하이차저’ 덕분에,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곳이 전기차 전용 충전소임을 알 수 있다.
하이차저는 충전 커넥터가 천정에서 내려오는 구조다. 커넥터 손잡이에 달린 컨트롤러로 이 커넥터를 상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사용자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무거운 충전케이블을 쉽게 다룰 수 있다.
특히, 전기차 모델마다 충전구 위치가 다른데, 어떤 방향에라도 커넥터를 가까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이차저의 상부가 회전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상부가 커다란 원형으로 디자인되어 미래지향적으로 보이는 효과가 크다. 또 이 커다란 원반 테두리에 달린 LED는 단순한 조명이나 장식이 아니라, 충전 진행 과정을 시각적으로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이처럼 하이차저는 효율적인 기능과, 기능에만 충실한 심플한 디자인 때문에 “이것이 미래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하이차저의 진가는 빠른 충전 속도에 있다. 현대차 관계자에 따르면 하이차저는 출력량 기준 국내 최고 수준의 350kw급 고출력·고효율 충전 기술이 적용되었으며, 800V 충전시스템을 갖춘 전기차를 충전할 경우 18분 이내 10%에서 80% 충전이 가능하다.
물론 800V급 충전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전기차도 하이차저로 충전이 가능하다. 또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의 전기차가 아니어도 이곳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을 연중무휴 24시간 이용할 수 있다.
현대차는 ‘아이오닉 5’를 비롯해 올해부터 순차적으로 출시할 전기차 전용 모델에 800V급 충전시스템을 탑재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어, 이번 현대 EV 스테이션이 전기차 시대 선도를 위한 현대차의 미래 전략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전기차 대중화 앞당길 핵심 인프라
초고속 충전시스템으로도 10%에서 80% 충전하는 데 대략 20분이 소요된다. 800V급 충전시스템이 없는 전기차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반면, 주유소에서 승용차에 가득 주유하는 데는 결제하는 시간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전기차 전용 충전소의 사용법은 기존의 주유소와 다를 수밖에 없다.
주유소에서는 시동조차 끄지 않은 채 볼일을 마치고 떠나지만, 전기차를 충전할 때는 완충 되기를 기다리면서 다른 할 일이 필요하다.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 관계자는 주유소가 정차하는 곳이라면 EV 스테이션은 주차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전기차를 소유한 사람 상당수가 차고지에 설치된 전용 충전기에서 주로 충전을 한다. 취침시간처럼 일상에서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충전하는 것이다. 심야 시간의 전력이 낮보다 싼 것도 이런 충전 패턴에서는 유리한 점이다.
그런데 전기차의 대중화를 가속하는 데 있어 ‘차고지 충전기 완비’라는 조건은 사실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인 아파트나 빌라 등 공동주택의 경우 기존에 이미 지어져 있던 주차장에 전기차 충전기를 추가로 설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 서울을 비롯한 도시 지역에는 전용 주차 구역이 정해져있지 않은 가구가 허다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기차를 구매하고도 마음 놓고 충전하며 주차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헤매는 ‘전기차 충전 유목민’ 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기존의 급속·초급속 충전시스템이나 초고속 충전시스템은 이런 현실의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는 인프라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주유소처럼, 이동 중에 10~20분 내외로 ‘짬’을 내서 들르는 것만으로 필요한 동력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면, 차고지의 충전시설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차, 올해 하이차저 보급 확대
현대차 관계자는 “고객분들이 충전에 대한 걱정 없이 전기차를 쉽고 편리하게 운행할 수 있도록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을 구축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현대자동차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기차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서는 한편, 전기차 충전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초고속 충전설비의 이름이 ‘하이차저’인 것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현대차에 따르면 이 이름은 친환경적이며 미래 이동수단으로 저변을 확대하고 있는 전기차의 첨단기술(High-tech) 이미지를 담은 동시에 영어 문화권의 친근한 인사 표현인 ‘하이(Hi)’를 통해 전기차와 더욱 쉽게 가까워진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현대차는 2019년 11월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에 2기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한 이후 이번에 길동의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에 설치한 8기까지 현재 총 10기를 운영하게 됐다.
특히, 현대 EV 스테이션 강동의 경우 전기차 충전소 운영을 통한 수익을 노리기보다, 전기자동차와 하이차저, 전기차 전용 충전소 등 현대자동차가 추진하고 있는 미래 전동화 모빌리티 생태계와 관련한 다양한 체험과 정보를 제공하는 특화 거점 역할을 한다.
25일 기자가 이곳에 두어 시간 남짓 머무는 동안 이곳을 다녀간 많은 방문객이 있었다. 테라코사 손님 외에도 자기 차량을 이용해 예약 및 충전 시스템을 체험하는 사람, 코나 일렉트릭, 넥쏘 등 친환경차를 시승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하이차저 설비에 주된 관심을 갖고 견학하는 방문객이 적지 않은 것이 눈길을 끌었다.
주유소나 주차장 같은 공간을 전기차 충전소로 활용하려는 개인 또는 법인이면서 향후 현대자동차의 하이차저 도입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적절한 쇼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현대차는 하이차저의 설치를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올해 그룹 차원에서 고속도로 휴게소 12곳과 전국 주요 도심 8곳에 총 120기의 초고속 충전기를 설치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