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최영태 편집국장) 최근 ‘문화경제’는 ESG 경제에 대한 시리즈 기사들을 내왔습니다. 그간 ESS 시리즈를 연재했던 옥송이 기자가 ‘착한 기업이 돈 번다’고 기자수첩을 썼습니다(78쪽).
ESG란 환경(E), 사회(S), 지배구조(G)의 약자이지요. 환경과 사회를 생각하고, 기업 등의 지배구조(특정 기업에서 누가 실권을 쥐고 흔드는가, 즉 “여기 대장이 누구야?”는 질문)를 문제 삼는 생각 방식은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좌파적’인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화 자리에서 환경과 사회가 어떻고, 독일 기업의 지배구조가 어떻고 등을 함부로 거론했다가는, 갑자기 좌중의 일부가 표정을 바꾸면서 “너, 좌파(=빨갱이) 아냐? 혼나야겠는데”라는 협박성 발언을 하기 십상이었죠. 반공을 실질적인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빨갱이로 몰리는 일은 공포스럽습니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원리를 실행시켜온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랬던 한국에서 요즘은 대기업 총수부터 은행장에 이르기까지 최고로 힘센 분들이 “ESG에 뒤처지면 죽는다”며 환경-사회를 강조하고 나서니(아직 회사의 지배구조에까지는 논의를 확대하지 않지만), 참으로 격세지감입니다.
대한민국이란 근대국가의 틀은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었고(대한제국이라는 왕조-전근대 국가의 틀을 자본주의로 바꾼 것은 조선총독부), 그 틀을 미국이 이어받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든 것이기에, 미국 또는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은 한국에서 최고의 참고사항이 됩니다.
작년 미국이 전국민 보편적 재난지원금을 지급하자 한국에서 1차 재난지원금이 보편적 지급으로 이뤄졌고(미국 선례가 없었다면 보편적 지원은 논의 단계에서 끝났을 테지만), 일본에서 일찍 문 닫는 가게에 정부지원금을 주자 한국에서도 관련 법 마련이 서둘러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유럽에서 보편 지원, 가게 지원금이 아무리 이뤄져봐야 한국에선 강 건너 불이지만, 미국 또는 일본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지면 한국에선 바로 강 이쪽 불이 되는 식입니다.
‘착한 자가 먼저 죽는다’ 아니었어?
예전 제가 미국에 살 때 일입니다. 당시 대인기였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읽는데 가슴을 찌르는 챕터 제목이 나왔습니다. 제12장 ‘Nice Guys Finish First’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신문사에 입사하면 처음 듣는 말 중 하나가 “기자가 착하다는 평가를 들으면 바보”였고, 콩글리시 실력으로는 이 제목의 의미가 ‘착한 사람이 먼저 죽는다’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finish는 ‘끝나다’도 되고 ‘끝내다’도 되는데, 끝나다라고 읽기 쉽지요. 그런데 그 챕터를 읽어보니 의미는 ‘착한 사람이 성공한다’ 즉 ‘착한 사람이 먼저 1등 피니시 라인을 끊는다’는 의도로 저자 리처드 도킨스가 쓴 것이었습니다.
도킨스는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착한 사람(또는 동물)이 어떻게 1등을 끊는지를 구체적인 관찰 실험 결과를 통해 보여줍니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새 무리에 대한 장기 관찰입니다. 새들은 서로 다른 개체의 털을 손질해주는데(자신의 등에는 부리가 안 닿으므로), 동물학자들이 자세히 보니 새마다 개성이 있어, △남이 털손질을 해주건 말건 무조건 해주기만 하는 새(Suckers = 봉) △남이 해주건 말건 자신은 무조건 안 해주는 새(Cheats = 얌체) △내가 먼저 해주지만 상대방이 보답 않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얌체에겐 선행을 절대 베풀지 않는 새(Grudgers = 원한파)가 있었습니다. 봉 새는 바보 같아서 손해만 보고 등에 이가 들끓기에 쉽게 죽으면서 그 개체 숫자가 줄어듭니다. 멸종이지요. 반면 얌체 세는 이득만 차지하기에 그 개체 숫자가 크게 늘지만, 무리가 모두 얌체로 채워지면 이 역시 이가 들끓기에 무리는 멸종합니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하는 게 바로 원한파입니다. 원한파가 다수를 차지해야 비로소 그 새 무리는 안정적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원한파의 전략을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진화적으로 안정적인 전략)이라고 부릅니다.
인간 사회의 ESS 전략은 무엇일까요? 먼저 선행을 베풀되 배신을 때리는 자에겐 차가운 원한을 되돌려주는 것이며, 그게 바로 사법 시스템일 겁니다. 그러나 실제의 사법은 반대지요? 빵 한 조각을 훔친 힘없는 자의 손가락은 잘도 자르면서, 수천 억을 훔친 회장님들에겐 “국가 경제에 기여한 공로 어쩌고” 하면서 집행유예를 잘도 베풀지요.
4차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전략으로서의 ESS, 그리고 기업의 살길로서 ESG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수축사회’의 저자 홍성국 민주당 의원(전 대우증권 사장)의 말대로, 팽창사회에서는 패배자에게도 작은 빵이 주어졌지만, 수축사회에서는 빵 크기가 자꾸 줄어들기에 패자에겐 죽음 말고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팽창사회에서는 “국가 경제에 기여한 공로로 어쩌고~”가 가능했지만(매몰찬 부자를 용서해도 빵 크기가 커지기에 피해자도 먹고 살 수 있었기에) 인구감소와 함께 본격 수축사회로 들어선 21세기 한국에선 매몰찬 ESS 사법, 그리고 살기 위한 ESG 기업이 더욱 필요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