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7호 윤지원⁄ 2021.03.26 09:07:08
기술 발전의 빠른 속도와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기업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고민한다. 연구개발, 파트너십 등등 다양한 경영 활동 가운데 인수합병(M&A)은 기업이 신(新)사업에 뛰어드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인 동시에 막대한 비용과 위험 부담을 수반하는 어려운 투자이기도 하다. 문화경제는 국내 대기업들의 최근 M&A 성과와 전략, 그리고 이에 따른 기업의 변화 및 신사업 성과 등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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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삼성전자 : 차량용 반도체에서 ‘제2의 하만’ 찾는 중?
② 현대차 : 정의선 회장 사재까지 투입해 로봇업체 인수…전망은?
“살아남으려면 뿌리부터 변하라”
SK그룹은 최근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무려 15조 원에 육박하는 금액을 M&A에 투자했다.
SK하이닉스가 지난해 10월 세계적 반도체 기업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 부문을 무려 90억 달러(한화 약 10조 3000억 원)에 인수하면서 국내 기업 역대 M&A 최대액수를 갱신한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그 외 그룹 지주사인 SK(주)를 비롯해 SK종합화학, SKC, SK건설 등 다른 주요 계열사들이 최근 1년간 인수한 여러 회사 및 사업 부문, 회사 지분 등에 든 금액도 4조 6000억 원에 달한다.
SK그룹의 공격적인 M&A는 최태원 그룹 회장이 강조하는 ‘딥 체인지’(Deep Change·근본적 변화)와 ‘서든 데스’(Sudden Death·돌연사)라는 화두에 충실한 전략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없는 기업은 언제 갑자기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로, 1998년 최 회장이 회장에 취임한 이후 꾸준히 견지하는 경영 철학이다.
특히, 지난해 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 기업들이 존폐의 위기에 몰리는 상황에서 최 회장은 딥 체인지에 더욱 골몰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 9월 그룹 전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을 통해 "코로나19 환경을 위기라고 단정 짓거나 굴복하지 말고, 우리의 이정표였던 딥 체인지에 적합한 상대로 생각하고 성장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코로나19에서 비롯한 예측하기 어려운 경영환경 변화와 새로운 생태계 등장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다음 달, SK그룹은 인텔을 상대로 무려 10조 원이 넘는 빅 딜을 성사시켰다. 이 M&A로 인해 SK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 시장 글로벌 5위 사업자에서 2위로 단숨에 뛰어올랐고, 올해 메모리반도체 슈퍼사이클(장기호황) 도래가 전망되면서 더욱 높이 도약할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1년 만에 반도체·모빌리티·ESG 역량 등 골고루 강화
최근 1년간 SK그룹이 보인 M&A 행보는 놀랍다. 인수 및 투자 금액의 규모도 크지만, 적재적소에 과감한 투자를 감행한 결과, 그룹의 미래에 대비한 신성장 동력을 고루 강화하게 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먼저 SK머티리얼즈는 지난해 2월 금호석유화학의 포토레지스트 사업을 400억 원에 인수했다. 다음 달에는 SK실트론이 듀폰의 실리콘 카바이드 웨이퍼 사업부를 4억 5000만 달러(약 5400억 원)에 인수했고, 같은 달 SK하이닉스는 EF 운용사 알케미스트캐피탈파트너스코리아와 크레디언파트너스가 매그나칩반도체의 파운드리 사업부문과 청주 8인치 웨이퍼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 SPC에 유한책임투자자(LP)로 참여, 인수자금 4억 3500만 달러(약 5300억 원)의 49,8%를 출자했다. 여기에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까지, SK그룹이 지난해 관여한 반도체 관련 사업 M&A 비용만 100억 달러에 육박해 글로벌 반도체 업계를 놀라게 했다.
또한, SK(주)는 지난해 7월, 중국의 동박 제조업체 왓슨에 1000억 원을 투자했다. SK는 2019년에도 왓슨에 2700억 원을 투자한 바 있다. 이에 앞선 지난해 1월에는 SKC가 글로벌 1위 동박 제조업체 KCFT의 인수대금 1조 1900억 원을 완납했고, 4월엔 사명을 SK넥실리스로 바꿨다.
동박은 전기차 배터리의 음극을 만드는 핵심 소재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5년까지 전 세계 동박 수요는 연평균 44% 성장하여, 시장 규모가 14조 3000억 원에 이를 전망이다. SKC와 SK넥실리스는 세계최대 동박 생산능력 확보를 위해 말레이시아에 7000억 원을 투자해 해외 생산거점 마련에 서둘러 나섰다. SK그룹은 잇단 동박 사업 투자로 e-모빌리티 부문의 성장 동력을 대폭 강화하게 됐다.
한편, SK건설은 국내 최대의 종합환경관리 플랫폼 업체인 EMC홀딩스를 1조 500억 원에 인수했다. EMC홀딩스는 전국 970여 개의 수처리 시설을 보유, 국내 수처리 부문 1위 사업자인 동시에 4곳의 폐기물 소각장, 1곳의 매립장을 운영한다. 이를 통해 SK그룹은 처음으로 환경관리업이라는 포트폴리오를 추가하게 됐으며, 그룹이 사회적 가치 추구 차원에서 친환경 사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초석을 다지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M&A로 도약한 그룹 역사
SK그룹의 성장과 진화의 역사에는 언제나 M&A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 그룹의 기둥이라 할 최대 계열사 3개가 바로 M&A를 통해 각각 편입됐다.
SK그룹의 모태는 1939년 설립된 선경직물이다. 섬유회사로 시작한 SK는 1975년 첫 번째 기업 인수를 하게 된다. 바로 국제관광공사로부터 인수한 워커힐 호텔이다.
선경그룹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며 에너지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이때 인수한 자회사가 바로 SK이노베이션이다.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지금의 SK텔레콤이 탄생했다. SK텔레콤은 2000년 신세기통신까지 인수하며 이동통신 시장의 선두업체로 올라섰다. 이때부터 SK그룹은 통신을 최전방 공격수로 둔 ICT 산업의 비중이 가장 커졌다.
그리고 2010년 말 하이닉스를 3조 4267억 원에 인수했다. 반도체에 거금을 투자하는 것에 대해 당시 SK그룹 수뇌부 대부분이 반대했으나, 최태원 회장이 자세한 근거를 들어가며 꾸준히 설득하여 성사시켰다. 거액의 인수 후에도 과감한 투자를 더했다. 2011년 기준 8000억 원 규모였던 연구개발(R&D) 분야의 투자를 2016년에는 2조 1000억 원으로 늘리며 기술을 고도화 했다.
하이닉스 인수 이후 SK그룹의 ICT 분야 매출은 2배 이상 증가했다. SK그룹의 수출은 100배 넘게 증가했고,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1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SK그룹은 삼성그룹에 이어 재계 그룹 서열 2위로 꼽히게 됐다.
‘투자형 지주회사’ 전환, 유망 사업 적극 확대
최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2015년, SK는 ‘투자형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다양한 산업에서 유망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인수합병했다.
2016년에는 반도체용 특수가스 제조사인 OCI머티리얼즈를 인수해 현 SK머티리얼즈가 됐다. 산업용가스 제조업체인 SK에어가스도 인수했다. 또 SK네트웍스는 동양매직을 인수하고 SK매직이 되어 가전 사업에서 실적을 끌어올리고 있다.
2017년에는 웨이퍼 제조사인 LG실트론을 인수해 SK실트론이 됐다. 세계 2위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생산업체였던 일본 도시바의 메모리 사업 부문 지분 20%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며 낸드플래시 사업도 보완했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1위 화학기업인 다우케미컬의 에틸렌아크릴산(EAA) 사업 부문을 3억 7000만 달러(약 4200억 원)에 인수했다.
2018년에는 미국 의약품위탁개발생산(CDMO) 업체인 앰팩(AMPAC)의 지분 100%를 인수하며 바이오 부문을 성장시켰다.
SK그룹의 M&A 질주 본능은 올해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3월 25일 SK에 따르면 SK그룹은 첨단소재, 그린, 바이오, 디지털을 올해의 4대 핵심사업으로 꼽고, 이에 따른 M&A 등 투자를 적극적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기존 투자1센터, 투자2센터 등으로 부르던 부서 명칭도 첨단소재투자센터, 그린투자센터 등으로 바꾸며 그 목적과 역할을 분명하게 정립했다.
먼저 지난 1월 SK(주)와 SK E&S는 각각 8억 달러씩을 출자하여(총 한화 약 1조 8060억 원) 미국의 수소 기업 ‘플러그파워’의 지분 9.9%를 인수, 단일 최대주주에 올랐다. 플러그파워는 글로벌 수소연료전지 업체 가운데 생산(업스트림)-저장·운송(미들스트림)-공급(다운스트림)까지 이르는 밸류 체인을 모두 갖춘 유일한 업체다. SK의 투자 이후에는 프랑스 르노, 스페인 악시오나 등과 조인트벤처(JV) 설립을 발표하며 사업을 확장하고 있고, SK그룹과도 아시아 기반의 JV 설립을 추진하는 등 본격적인 시너지를 꾀하고 있다.
M&A 전문가들 전진 배치…그룹 미래 이끈다
또 지난 3월 16일 SK텔레콤은 옥션, 지마켓, 지구(G9) 등을 운영하는 국내 3위 이커머스 업체 이베이코리아의 인수 예비입찰에 참여했다. 이베이코리아의 인수 가격은 5조 원 + @가 될 전망으로, 올해 국내 M&A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빅딜’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
11번가를 운영 중인 SK텔레콤이 인수에 성공하면 단숨에 네이버, 쿠팡과 함께 160조 원 규모의 국내 온라인쇼핑 시장 절반을 장악하는 ‘빅3’를 형성하게 될 전망이다.
SK의 적극적인 M&A를 통한 사업 재편 행보는 최근의 인사 동향을 통해서도 전망해볼 수 있다.
우선 지난 8년 동안 최 회장의 ‘딥 체인지’ 실행을 진두지휘한 조대식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처음으로 3연임에 성공한 의장이 됐다. SK(주)가 투자 전문 지주회사로 완전히 체질을 개선한 것이 바로 조 의장이 사장으로 재직하던 2013~2017년의 일이다. 당시 바이오, 반도체 소재, 신에너지 영역의 지분투자와 M&A를 연달아 성공시킨 장본인이 바로 조 의장이다.
또한, 조 의장은 수펙스추구협의회를 관리와 조정 기능 중심의 조직에서 그룹 신성장 동력 발굴을 위한 투자 전략을 수립하는 조직으로 진화시킨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재계는 이번 그의 3연임을 두고 SK그룹의 M&A를 앞세운 사업 재편이 가속화한다는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이번 인사에서 40대의 나이로 SK E&S의 CEO에 발탁된 사장으로 승진한 추형욱 사장 역시 SK(주) 투자1센터장 출신으로 그룹 내 M&A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SK건설의 경우 사내이사 2인 중 공석이던 한 자리를 채울 인물로 지난 1월부터 근무한 지주사 출신의 박경일 사업운영총괄이 지목됐다. 박 총괄 역시 M&A 전문가로 꼽히는데, 과거 SK텔레콤의 아이리버 인수, SK엔카 한앤컴퍼니 매각 등이 그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박 총괄은 지난해에는 지주사 행복디자인센터 자리에서 SK건설의 EMC홀딩스 인수를 지원한 바 있다. 또 그는 현재 SK건설의 에코비즈니스부문 수장을 겸하고 있다. SK건설이 앞으로도 환경 사업 분야에서 M&A에 약 3조 원을 추가로 쓸 예정이므로, 그룹의 ESG 기조를 확대해 나가는 데에 박 총괄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