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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83) 화강백전(花江栢田)] 병자호란 ‘빽빽 잣나무숲 승리’ 알아야 그림뜻 읽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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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06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08.30 10:47:42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해악전신첩의 그림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화강(花江)을 찾아 가는 길이다. 듣기에도 아름다운 이름 화강(花江), 즉 꽃강이라니…. 그 힌트가 미수 허목 선생의 글에 남아 있다. 미수기언 화적연기(禾積淵記)에 화강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힌트가 있다.

체천(砌川: 한탄강 상류)의 물은 청화산(靑華山)에서 발원하여 화강(花江)의 물과 합류하여 육창(陸昌: 강원 철원)을 지나 칠담팔만암(七潭八萬巖)이 되고, 영평 북쪽에 이르러 화적연이 된다 (砌川之水。發源於靑華山。與花江之水合。過陵昌爲七潭八萬巖。至永平北。爲禾積淵)

즉 철원의 위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니 긴 설명 필요 없이 김화(金化)를 아우르며 흐르는 강이 화강인 셈이다. 일반적인 이름은 동국여지승람이나 고지도에서 보듯 남대천(南大川) 또는 남천(南川)이라 불렀는데 김화를 동남으로 에워싸고 흐르기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화강은 미수 선생만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었다. 호고와(好古窩) 류휘문(1773~1827)이 70여 일 간의 금강산 여정을 기록한 북유록(北遊錄)에는 할아버지의 시에서 차운(次韻: 운을 빌림)하여 쓴 시가 있는데 거기에도 화강이 등장한다. 김화대로(金化大路)를 지나며 쓴 시인데,

東北豪遊恣意竆。歸來京國弟兄同。追懷昔日花江路。依舊關河又雪中。
동북을 호기롭게 다니다 넘치던 기운도 잦아들어
형제들 함께 귀경길에 올랐네
전날 화강 길 뒤돌아보니
고을과 강은 의구한데 눈발 또 내리네

 

김화 옛 지도 1. 
김화 옛 지도 2. 
현재의 김화 지도. 

여기에 주(註)를 달기를, 화강(花江)은 김화의 옛 이름이라 했다(花江金化舊名).

한편 동국여지승람에는 김화의 별호(別號: 다른 이름)를 화산(花山)이라 했으며 옛 지도에도 화산이 그려져 있다. 김화는 꽃산과 꽃강으로 불린 고장이었던 것이다.

꽃강이 감싸 돌던 교통의 요지 김화

그런데 김화(金化). 아는 사람도 드물고 가 본 사람은 더욱 드물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겸재의 그림 길을 찾아다니기 전까지는 관심 밖의 고장이었다. 몇 번을 드나들다 보니 어느덧 마음속에 자리 잡아 가는 고장이 되었다.

43번 국도는 철원을 지나 북으로 달린다. 본래 43번 국도는 충남 전의(全義)에서 출발하여 동북으로 비스듬히 달려 포천에 이르고 이어서 철원, 김화 지나 강원도 고성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금강산 가는 옛길 위에 있다. 이제는 아쉽게도 김화에서 막혔다. 필자도 오늘 이 길을 따라 김화에 들어선다.

김화 관문 화강을 건너기 직전 쉬리생태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김화 다슬기 축제도 여기에서 열리고 캠핑장도 개설해 놓았다. 이곳에 들러 지도도 구하고 김화 여행 정보도 얻는다.

강을 건너면 우측으로 바로 김화읍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철의 삼각지(철원, 김화, 평강) 전장 안에 있던 본래 김화읍이 포격에 부서지고 민통선 안에 자리 잡게 되자 새로 마련한 자리에 읍이 섰다. 이제는 자리도 잡혀서 여느 읍과 다르지 않다.

 

생창리 마을 안내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곳은 잠시 놓아두고 생창리(生昌里)로 향한다. 예전 김화읍 관아 남쪽 4리에 생창역(生昌驛)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여러 지리서에 이 역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금강산 가는 길에 많은 이가 들러 쉬어가던 요지였다.

김화는 이제 오지 중 오지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강원, 평안, 함경 삼도 길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 요지의 중심에 생창역이 있었다. 한국전쟁 후 민통선 안 민간인이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가 70년대 재건촌이 생창리에 들어서면서 재향군인 가족 100 가구가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고 다시 생기를 찾았다고 한다. 살아났으니(生) 이제부터는 창성(昌)했으면 좋겠다.

한국전쟁 전 김화읍내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래픽.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생창리 마을은 입구부터 잘 가꾸어 놓았다. 마을 안내판도 세련되게 해 놓았고 마을 입구 정자는 길손이 쉬어가기에 손색이 없다. 필자도 도시락과 커피를 꺼내 정자에 앉아 화강을 바라보며 먹었다. 화강가에는 시(詩)를 적은 판(板)들을 세워 놓아 무료하지 않다. 민통선 마을답게 잊고 있던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이란 시를 수십 년 만에 만났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감회가 새롭구나.

옛사람들은 생창역을 지나면서 글 한 줄 남겼다. 농암 김창협도 금강산 여행길에 생창역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가 지나간 길의 역(驛) 이름들은 참고가 된다. 농암집 동유기(東游記)에 1671년(현종 12) 늦여름에 길을 떠났는데,

경인일 아침에 포천(抱川) 시장 거리에서 조반을 먹고 낮에는 양문역(梁門驛)에서 점심을 먹었으며 초경(初更)에 풍전역(豐田驛)에 투숙하였는데, 이곳은 철원(鐵原) 땅이었다. 신묘일에 새벽밥을 먹고 출발하여 김화(金化) 생창역(生昌驛)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금성(金城) 읍내에서 묵었는데, 이곳 현령 박후빈(朴侯鑌)이 나와서 맞이하고 조촐한 술상을 내온 뒤에 노자를 주었다.
임진일에는 이른 아침에 밥을 먹고 출발하여 창도역(昌道驛)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신안역(新安驛)에서 묵었다. 이곳은 회양(淮陽) 땅이었다.


朝飯抱川場街里。午炊梁門驛。初更。投宿豐田驛。鐵原地也。辛卯。蓐食發行。午炊金化生昌驛。夕宿金城邑底。縣令朴侯鑌出迎。小酌資路費。壬辰。早飯發行。午炊昌道驛。夕宿新安驛。淮陽地也。

생창역을 지난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동계 정온은 ‘김화현(金化縣) 생창역(生倉驛)에서 말을 먹이며(秣馬金化縣生倉驛)’라는 시(詩)를 남겼다. 昌을 倉으로 써서 맞춤법이 살짝 틀렸다. 이 시대 금강산 여행길 교통수단이 보통 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수와는 일찍이 평소의 친분 없었건만 太守曾無平日雅
근처에 머문 줄 알고 술을 갖고 왔구려 聞吾近駐佩壺來
술이 취할 무렵에 장생*이 또 찾아 주니 醉中又有張生至
나그네의 정담 속에 해가 이미 기울었소 萍水談情日已頹
(기존 번역 전재)
*옛 시에 선비 장생이 술과 거문고를 들고 왔다

후에 대사헌을 지낸 창계 임영(林泳)도 창생역에 머물렀다. 백면 서생 시절 생창역에 묵었나 보다. 역리(驛吏)만이 궁금해 묻는다.

김화의 역 마을에서 묵다〔宿金化驛村〕
옛 고을에 날 저물어 古縣日云暮
나그네 강마을 역에 드니 行人投水驛
역에 늙은 아전 있다가 驛中有老吏
내 가는 길 묻네 來問我行役
관동에 산세 비록 좋지만 關東山雖好
길 험하고 경계는 더 궁벽하지요 道險境復僻
저번 경성엘 갔더니 昨日到京城
의관이 거개 다 눈부시던데 冠蓋多輝赫
어째서 공부해서 벼슬길 나가지 않고 何不學仕宦
홀로 떠나 궁하고 적적하게 지낸단 말이오 自去取窮寂
네 말도 그 또한 옳다만 爾言亦復是
내 뜻 그대는 알지 못하겠지 我意非爾識

생창역에는 마음 아픈 죽음도 있었다. 허균의 작은 형 허봉(許篈)이 생창역에서 급서하였다. 하곡 허봉은 문명(文名)을 떨치던 이 집안 형제들처럼 뛰어난 지식인이며 문장가였기에 명나라 사행길에 올라 조천록을 썼는데, 다음 해에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직무 배제되었으며, 이어 승문원 검교나 사간원 정언(正言)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에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사인(舍人), 사헌부 장령(掌令)-사인(舍人), 예문관 응교(應敎), 어사, 사복시 정, 집의 등이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은 관직이 많았다. 1583년(선조 16)에는 동인으로서 서인 율곡을 배척하였다가 창원 부사(昌原府使) 임명이 취소되었고, 송강 정철의 주장에 따라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2년 뒤에 유배에서 돌아와서도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서 독서하는 한편 인천(仁川), 춘천(春川) 등지의 산수를 방랑하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하였다. 1588년 (선조 21)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다가 9월 17일에 생창역에서 향년 38세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그는 잊혔는데 생창리에 허봉의 흔적 하나 남겼으면 좋겠다. 묘소는 용인 양천허씨 묘역에 있다.

108세에도 정정했던 미국인 목사 피도수

생창리에는 이 동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교회가 눈에 띈다. 살펴보니 생창리 감리교회다. 본래의 김화읍은 이곳 생창리에서 북쪽 4리 계웅산(鷄雄山, 옛 이름은 所伊山 또는 五申山) 아래 펼쳐져 있었다. DMZ생태공원 방문자센터 옆 이야기관에는 김화읍치의 옛 모습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이 교회의 내력도 정리되어 있다.

 

변화했던 김화읍내를 재현한 미니어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김화 이야기관 건물.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생창리 감리교회.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피도수(皮道秀, Victor W Peters)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있었다 한다. 그는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조선에 와서 이곳 감리교회에서 헌신하다가 1941년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다. 한 몸을 바친 헌신이었다는데 이화여전 출신 한흥복 씨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낳고 조선인으로 살고자 했다 한다. 2010년 한인 신문에 108세가 된 피도수 목사의 사진이 실렸다. 생창리가 다시 살아나면서 옛터는 아니지만 가까운 생창리에 교회를 다시 세웠다니 교인이 아닌 필자도 할렐루야!

 

2010년 108세를 맞이한 피도수 목사. 자료사진
금강산 철도 잔해 아래 용양보에 내려앉은 철새 무리. 최태희 님 촬영.
43번 국도가 지나는 번화했던 다리 암정교. 최태희 님 촬영.

생창리에서 또 한 군데 찾아보아야 할 곳은 DMZ생태공원 방문자센터이다. 민간인이 갈 수 없는 DMZ 안에 생태평화공원을 조성하여 안보관광을 행하고 있다. 용양보 탐방과 십자로 탐방 두 개 코스가 있는데, 용양보 탐방은 이제는 흔적도 없지만 옛 김화 읍내를 연상할 수 있는 코스다.

 

용양보 금강산 철도 잔해. 최태희 님 촬영.

금강산 철도가 지나가던 용양보나, 43번 국도가 지나가던 암정교는 이제는 고요 속에 남아 있다. 움직이는 것은 철새와 경계근무를 서는 근무자의 눈동자뿐이다. 최근에는 코로나와 돼지열병으로 탐방 코스가 잠정 중단되었다. 내년에는 열리겠지….

겸재 작 화강백전.  

졌는데 칭찬받고, 이겼는데 혼났다고?

이제 겸재의 그림 화강백전(花江栢田)을 탄생시킨 두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생창리 지나 길이 마무리되는 곳에 이르면 뒤로 삼신산(三申山, 요즈음 이름 성재산)과 오신산(五申山, 요즈음 이름 계웅산)이 팔을 벌린 아래 개활지가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 검문소가 있다. 그 안으로는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다. 옛 김화관아는 이곳 계웅산 아래에 있었다. 검문소 바로 앞에는 개울을 따라 좌측으로 꺾이는 길이 있다. 차량 한 대는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길이다. 이 길 좌측 산 아래에 오늘의 두 주인공을 모신 충렬사(忠烈祀)가 있다.

 

비닐하우스 뒤쪽이 예전 김화읍 관아가 있던 자리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 사당을 소개하는 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철원충렬사지(鐵原忠烈祠址)는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에 있는 충렬공 홍명구(忠烈公 洪命耈: 1596~1637)와 충장공 유림(忠壯公 柳琳: 1581~1643)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이자 터이다. 홍명구와 유림은 병자호란 당시 김화 백전(柏田) 전투에서 청나라 군에 맞서 큰 전과를 올린 인물이다. 철원충렬사지는 1997년 10월 25일 강원도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었다.

충렬사는 1650년(효종 1) 김화 주민들이 건립하여 충렬공 홍명구를 제향하였고, 1652년(효종 3) 충렬사로 사액(賜額)되었다. 1940년 김화 유림들의 합의로 충장공(忠壯公) 유림도 충렬사에 합사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에 맞서 백전(柏田) 전투가 일어났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여기에 모셔진 홍명구와 유림이란 분은 어떤 분들이었을까? 그 내력을 알아야 비로소 겸재의 화강백전을 이해할 수 있다.

병자호란의 발발하자 예상과는 달리 기병(騎兵) 중심으로 편성한 청군이 빠른 진격 속도로 밀고 내려왔다. 국가 위란의 기간 중에 전국 각 도의 근왕병(勤王兵: 임금을 구하고자 충성을 다하는 군)이 남한산성으로 향했고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이 벌어졌다.

평안도관찰사 홍명구는 왕의 명령을 받고 20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는데 홍명구 군 2000명과 평안도병마절도사 유림 군 3000명 등 총 5000명의 평안도 근왕군은 김화에서 4차례에 걸친 청과의 전투에서 약 3000명의 청군 희생자를 내고 승리하였다.

이 김화백전전투(金化栢田戰鬪)에서 홍명구는 전사하였고, 유림은 승리한 후 다음 날 군대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홍명구는 김화 백전 전투에서 국가와 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운 공이 인정되어 병자호란 직후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화 주민들은 1645년(인조 23) 홍명구 충렬비를 세웠고, 1650년 사당을 세웠으며, 1652년 효종이 ‘충렬사(忠烈祠)’ 현판을 하사하여 사액(賜額) 사당이 되었다.

유림 장군에게 시호가 내려진 것은 전투가 끝난 지 159년 뒤인 1796년(정조 20)의 일이다. 김화 주민들은 1644년(인조 22)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향교골)에 유림 장군 대첩비를 세웠다. 이 대첩비는 지금 충렬사 옆 비각에 홍명구 비석과 함께 세워져 있다.

 

겸재 그림 속 빽빽했던 ‘화강 잣나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그런데 이 전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일설에 의하면 관찰사 홍명구는 현재 충렬사 중심으로 우측 산에 기대 평평한 지역에 진을 치자 했고 무관인 유림은 이 의견에 반대하여 좌측 산허리 잣나무 숲에 기대어 진을 치고자 했다 한다. 이렇게 하여 일정 거리를 두고 홍명구의 2000 군사와 유림의 3000 군사가 진을 쳤는데 결국 몰아닥친 기병 중심의 청군에게 평지에 진을 친 홍명구 진영은 대패하여 감사 홍명구도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유림은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목숨이 아까워 그랬는지, 중과부적의 군대로 평지에서 청군과 싸워서는 패전이 불 보듯 하다는 장수의 판단에 의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병자호란 후 유림은 이로 인해 고초를 겪었고 159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나라에서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홍명구의 졸기(卒記)를 보면 유림을 불렀으나 도망쳐서 휘하의 장수가 많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유림의 신도비에는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감사와 더불어 각각 산에 기대어서 진을 쳤는데, 공은 잣나무 숲 사이에 숨어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뜨자 적들이 산 위로부터 압박해 들어왔으며, 또 군사를 내어 양쪽 진 사이를 끊었다. 그러고는 계속하여 많은 군사를 보내어 감사의 군대를 시험해 보았다. 순안 현령(順安縣令) 허로(許輅)의 군사가 먼저 패하자, 오랑캐들이 승세를 타고 양쪽에서 공격하여 좌우로 충돌해 와 아군이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감사가 전사하였다. 오랑캐들이 잠깐 사이에 공의 진영까지 압박해 들어왔는데, 전영(前營)의 군사들이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저절로 무너졌으며, 공의 진 역시 거의 보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군중에 있던 어떤 자가 공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공을 큰소리로 불렀는데, 공은 높은 언덕에 말을 세우고 자신의 몸을 드러내 보이면서 말하기를 “지금 나는 이곳에 있다. 그러니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였다. 군사들이 모두 평소에 공을 믿어 의지하였으므로, 공의 말을 듣게 되자 모두가 용기를 내어 굳게 지켰다.

공은 장사(將士)들에게 이르기를 “저들의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어 맞상대하기가 어려우니,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마라” 하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포와 활을 쏘는 데 익숙한 자들로 하여금 일제히 화살과 탄환을 발사하게 하였다. 적장 가운데 한 사람이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포성이 들리는 곳은 모두 무너져 쓰러졌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적병들이 크게 패하였는데, 죽어 넘어진 시체가 즐비하였다. 밤이 되자 오랑캐들이 더욱더 많은 군사를 투입시키면서 다음 날 다시 싸우고자 도모하였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내가 외로운 군사로 멀리까지 왔다. 지금 비록 요행히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화살과 탄환이 이미 다 떨어졌다. 그러니 우선은 계책을 써서 피하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고는 잣나무 숲 사이에 의병(疑兵)을 숨겨 두고는 그들로 하여금 서로 이어서 포성을 울려 오랑캐들이 추격해 오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밤을 틈타 군사들을 움직였는데, 오랑캐들이 과연 감히 뒤쫓아 오지 못하였다.

 

유림장군대첩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 기록을 보면 유림은 지략과 용맹을 갖춘 장수로 보인다. 결과를 보더라도 전라병사 김준용 장군의 광교산 전투와 유림 장군의 김화 백전 전투가 병자호란 승리의 전투로 기록되고 있으니 유림 장군의 판단에 한 표 보내야 할 것 같다. 그 후 청나라에서도 조선의 장수로는 유림을 꼽았다 하니 잣나무 밭에서의 전투는 기병을 우선시하는 청군에게는 곤혹스러운 전투였던 모양이다. 이후에도 사람들은 홍명구의 충성을 높이 샀고, 유림의 승리를 대첩(大捷)으로 여겨 유림장군대첩비도 세웠다.

겸재도 사천 이병연이 현감으로 있던 시절 김화를 지나며 이 전투를 기억하여 화강 뒤 산기슭에 빽빽이 들어선 잣나무를 그렸다. 저 잣나무 숲으로 말을 타고 들어와? 어림도 없지. 유림 장군의 대첩과 홍명구 감사의 충절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 그림에 삼연은 제화시를 달았다.

花江栢田
松耶栢耶。鬱然成林。來往其下。自爲古今。陳陶之事。有慨于心。
소나무냐? 잣나무냐? 그 아래를 왕래하네
절로 이는 고금의 일 진도(陳陶)의 시는 마음속에 감회를 일으키네

당나라 시인 진도(陳陶)가 농서행(隴西行)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흉노 정벌에 나셨던 5000 군사가 먼지 속에 사라진 슬픈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다. 삼연도 백전 전투를 생각하며 진도의 시를 떠올렸다.

誓掃匈奴不顧身
五千貂錦喪胡塵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春閨夢裡人

농서 땅으로 가네
흉노 쓸어낸다 제 몸 돌보지도 않았건만
오천의 군사들 오랑캐 먼지 속 사라졌네
가엾구나 無定河(무정하) 가의 백골들
봄날 규방 여인들 꿈속에 있던 이들이니 (기존 번역 전재)


이제 계웅산 아래 옛 김화 읍터를 바라본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자리, 용양보, 암정교, 비닐하우스들이 옛 관아가 있었을 곳과 사람들이 살았을 저잣거리를 대신하고 있다. 철원 쪽에 연을 맺은 동주 이민구(李敏求)의 시 한 편으로 잊혀진 김화를 돌아본다. 저곳에 김화동헌이 있었겠지…. 동주집 동유록(東游錄)에는 청음 김상헌의 시를 차운한 시 한 편이 실려 있다. 지금은 시간 속에 묻힌 그곳에서 잠 못 이루던 나그네가 있었구나.

김화 동헌에서 차운하다(金化東軒次韻)
삼경에 바람과 이슬 숲 가득 내리니 三更風露滿林低
꿈깨는 가을 소리 푸른 나무 서쪽에서 夢覺秋聲碧樹西
짐짓 지난 날 나그네 일 생각하면 猶憶昔年爲客處
두견은 봄밤에 애끓게 울었었지 子規春夜盡情啼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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