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나이 72세, 1747년(영조 23년)에 두 번째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속 그림을 찾아가는 그림 길도 이제 마무리할 단계에 이르렀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그림첩 속 21점의 그림을 분류하면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분류하면 남북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된 그림첩이 된 셈이다. 갈 수 있는 곳은 옛 영평, 철원, 평강, 김화 남쪽 지역으로 이제껏 글을 써온 화적연, 삼부연, 화강백전, 정자연이다. 갈 수 없는 곳은 금강산 지역(금강산 초입, 내금강, 외금강)이다. 일단은 금강산 길이 열릴 때까지 유예해 둔다. 그런데 21점의 그림 중 아쉽게도 갈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 몰라서 못 가는 그림이 한 점 남는다. 그 그림은 사인암(舍人岩)이다.
정리하면,
갈 수 있는 곳: <화적연禾積淵>, <삼부연三釜淵>, <화강백전花江栢田>, <정자연亭子淵>,
갈 수 없는 곳: <피금정>, <단발령망금강산>, <장안사비홍교長安寺飛虹橋>, <정양사正陽寺>, <만폭동萬瀑洞>, <금강내산金剛內山>, <불정대>, <문암門巖>, <해산정>, <사선정(삼일호)>, <문암관일출>, <총석정>, <시중대>, <용공동구龍貢洞口>, <당포관어唐浦觀漁>, <칠성암(七星岩)>
모르는 곳: <사인암舍人岩>
필자가 소설로 써보는 ‘사인암 가는 길’
필자는 소설 한 편 쓰기로 했다. 가칭 ‘사인암 가는 길’이다. 논문을 쓴다면 쓸 수 없는 글이지만 추리소설 쓰듯 쓰는 글이니 ‘심증은 있되 물증은 없는 글’이다. 소설은 세 자료에서 시작해 보련다. △1711년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 楓岳圖帖) △1712년 첫 번째 그린 겸재의 이른바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에 사천 이병연의 요청으로 삼연 김창흡이 1713년 쓴 제시(題詩) 제이원일해악도후(題李一源海嶽圖後) △세 번째 자료는 지금 우리 곁에 있는 1747년(영조 23년) 겸재 나이 72세에 다시 그린 해악전신첩이다.
우선 신묘년 풍악도첩을 살펴 보면 13점의 그림이 모두 금강산(내금강, 외금강)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피금정披衿亭>, <단발령망금강산>, <장안사長安寺>, <보덕굴普德窟>,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 <불정대佛頂臺>, <백천교百川橋>, <해산정海山亭>, <사선정四仙亭>, <문암관일출門岩觀日出>, <옹천甕川>, <총석정>, <시중대>.
화첩에는 화기(畵記)가 함께 있는데 이 화기를 보면 겸재의 신묘년 금강산 여행을 미루어 볼 수 있다. 이경화 씨(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의 논문에서 인용해 보면,
“앞의 비단에 그린 풍악도 열세 폭은 나의 고조부 백석공께서 만년 금강산의 내외 명승을 재차 편력하셨는데, 정겸재와 생각나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품평을 쓰고 또 당시 시사를 짓는 친구들과 수창한 것이다. 나는 일곱여덟 살 때 책 상자에서 대대로 수장되어 있는 옛날 기록을 보았다. 시는 시대로만 보고 그림은 그림으로만 보았던 까닭에 시와 그림을 함께 보아야만 의취(意趣)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제 다시 감상하니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음을 알겠다. 시와 그림을 합하여 장정하고자 하나 백성공의 시평 원본과 제공들이 창화한 수묵(水墨)은 이미 선대에 장정한 수창록에 수록되어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정을 별지에 적어 그림의 마지막에 부착한다. 공들의 제발, 차운, 기문, 화평은 해당하는 화폭의 좌우에 옮겨 적어 함께 보기 편리하도록 하였다. 아! 세월을 헤아려 보니 일이 있은 뒤로 신묘년을 다시 보내고 이제 97년이 되었다. 당저 정묘년(1807년) 음력 7월 상순 근방(근반) 별장에서 세장(世藏)한다.”
아쉽게도 이때 새로 세장한 여러 사람들의 제발, 차운, 기문, 화평은 전해지지 않고 13점의 그림과 위의 화기만이 남아 보물 1875호로 지정되었다. 이경화 씨의 논문에서 백석은 현 청와대 안 대은암 아래 살던 용담현령을 지낸 신태동(辛泰東)으로, 삼연과는 친하게 지내던 백악산 일대 명문가의 일원이었다.
파주목사를 지낸 아들 신치복(1680~1754)이 겸재와 동년배였으니 겸재에게는 아버지뻘 되는 동네의 원로였다. 이 금강산 여행에 겸재가 함께 한 것이다. 일행이 누구였는지는 이제 알 수 없지만 위 화기로 보면 시문(詩文)을 하는 백석의 지인들이었을 것이며 젊은 겸재는 그림을 담당하기 위해 초대되었을 것이다. 이 금강산 탐승이 사천 이병연의 초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지만 근거가 될 만한 기록은 없다.
1711년 동시에 가을 금강산을 찾은 두 팀
이 가을을 맞아 금강산 여행을 떠난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삼연 김창흡, 모주 김시보, 최치성(崔致城: 1764~?)이었다. 모주는 한양을 출발하여 양근(양평)과 인제를 거쳐 설악 영시암(永矢菴)에 복거(卜居)하던 삼연과 함께 설악 12폭포, 수렴동 등지를 구경한 후 미시령을 넘어 간성 화암사로 들어갔다.
이때 겸재는 백석과 동행 중이었으므로 이 여행에는 함께 할 수 없었기에 삼연이나 모주의 시 속에 남아 있는 설악산 지역에 대한 그림은 한 점도 남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이어서 동해안 명승을 거치면서 드디어 외설악 해산정(海山亭)에 닿았다. 이들은 외설악에서 내설악으로 금강산 가을을 만끽하며 탐승을 즐겼을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백석 일행은 내금강을 거쳐 외금강 바닷가로 나아갔고 삼연 일행은 설악에서 출발하여 간성 바닷길을 따라 외금강에서 내금강으로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때 백석 일행과 만났는지 사천이 여기에 참여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1711년 신묘년 가을 백석 일행도 풍악에, 삼연 일행도 풍악에 있었다는 사실이 있을 뿐이다.
삼연 일행은 내원암에 이르렀을 때 1711년 7월 강원도사(江原道使)로 임명된 정동후를 만나 여정을 함께 한다. 이렇게 내금강을 탐승한 삼연은 장안사 산영루(山暎樓)에서 일행과 작별하고 설악산으로 돌아갔다.
이 두 여행의 성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림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천은 숙종 36년(1710년) 5월 김화현감에 부임하여 숙종 41년(1715년) 정월까지 약 5년을 김화에 있었다. 이 시기가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시기였을 것 같다.
1711년 신묘년풍악도첩을 그릴 당시 겸재의 금강산 여행의 성격은 무엇이었을까? 아쉽지만 사천이 백석, 삼연, 겸재를 함께 초청한 성격의 여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삼연과 모주의 여행은 모르겠지만, 백석 일행의 여행은 사천과는 무관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물론 장동의 지인들이었으니 도움은 받았을 것인데. 신묘년 백석 일행의 풍악 여행에 대해 삼연이나 사천이 언급한 기록이 없다. 더구나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인 삼연이나 사천은 풍악도첩에 대해 어떠한 시문도 남긴 것이 없다. 함께 한 여행이었다면 무언가 남겨진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겸재로서 신묘년 금강산 여행은 젊은 화가로 백석에게 초청받은 여행이 아니었을까? 이 여행에서 백석은 오로지 가을 금강산 풍악의 모습만을 원했기에 신묘년 화첩은 금강산만으로 한정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 여행이 겸재에게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우선 겸재는 이 여행을 통해 금강산 절경들의 밑그림을 정밀하게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해악전신첩의 여러 그림이 신묘년화첩과 거의 유사한 앵글인 것을 보면 같은 밑그림에서 나온 그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2018년 10월 17일자 모 일간지에는 겸재의 새로운 금강산 그림 7점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경북 영양 조지훈의 고향 주실마을 고택에서였는데 그 그림들은 겸재의 금강산 그림 탄생의 과정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초본(草本) 밑그림들이었다. 물론 낙관은 없으며 겸재초(謙齋草)라 기록하여 밑그림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신묘년이나 이듬해 임진년 해악전신첩의 밑그림일 것이다.
겸재 그림에 달아오른 사천, 금강산으로
이제 소설을 이어나가자. 1711년 풍악도첩이 그려지자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금강산도로 조선 명문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사천은 겸재의 화재(畵材)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 도첩을 보고는 기다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듬해 여름이 지나자 아버지 수암 이속(樹菴 李涑), 형 순암 이병성(李秉成), 국계 장응두(菊溪 張應斗), 겸재를 김화로 초대하여 금강산 탐승을 떠난다. 이 여행에서 사천은 처음으로 겸재에 대한 글을 남겼다. 다섯 살 아래 동네 후배 겸재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따듯한 눈길로 그리고 있다.
觀鄭元伯霧中畫 毗盧峯 비로봉 안갯속에서 겸재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며
吾友鄭元伯 囊中無畫筆 나의 벗 원백(겸재)은 주머니 속에 붓이 없을 때
時時畫興發 就我手中奪 이따금 그림의 흥이 일면 내 손 붓을 뺏어가네.
自入金剛來 揮灑太放恣 금강산에 들어온 후 붓 휘두름이 더욱 거침없네
白玉萬二千 一一遭點毁 백옥 같은 일만이천 봉 점점으로 만나 뭉그러지네.
驚動九淵龍 亂作風雨起 구연동 용을 놀래켰는지 어지러이 비바람이 일어
偃蹇毗盧峯 不肯下就紙 높이 솟은 비로봉은 기꺼이 아래로 화지 위로 나올 성 싶지 않다가
三日惜出頭 深深蒼霧裏 사흘째에도 머리 내기 아까워선지 짙디짙은 푸른 안개 속에 있을 뿐이었네.
元伯却一笑 用墨略和水 겸재는 도리어 씩 웃더니 먹을 써서 대략 물을 섞어
傳神更奇絶 薄雲如蔽月 마음 표현이 더욱 기이하고 오묘해 엷은 구름이 달을 가린 듯하네.
興闌投筆起 與山聊戱爾 흥이 익으면 붓을 던지고 일어나 산과 즐기다가
顧我且收去 郡齋窓中置 나를 돌아보며 또 가져가라 하니 사무실 창에 걸어 두어야지
이렇게 그려진 그림 30점이 1712년 임진년에 그려진 해악전신첩이다. 아쉽게도 이 화첩은 전해지지 않으나 무엇을 그렸는지는 김창흡의 삼연집(三淵集)에 제발(題跋)로 전해진다. 겸재에게서 넘겨받은 30점의 그림에 본인도 제화시를 쓰고 삼연 김창흡에게도 제발(題跋)을 부탁하였다. 이듬해 1713년 삼연의 제발은 완성되어 그림집이 철해졌다. 삼연집에 전하는 제이일원해악도후(題李一源海嶽圖後)는 이 30점의 그림 내용이 제발과 함께 전해진다. 일원(一源)은 이병연의 자(字)이며 사천은 호(號)이기에 일원이라 썼다.
의미는 “이 일원의 해악도 뒤에 붙여” 이렇게 쓴 글이다.
1. 금성피금정, 통구모월, 단발령망금강산, 장안사, 정양사, 벽하담, 금강내총산도, 불정대망십이폭, 백천교출산, 해산정, 삼일호, 고성문암일출, 옹천, 통천문암, 총석정, 시중대중추범월, 용공사동구, 입산도, 당포관어, 수태사동구, 화강현재
(金城披襟亭, 通溝暮雨, 斷髮嶺望金剛山, 長安寺, 正陽寺, 碧霞潭, 金剛內山捴圖, 佛頂臺望十二瀑, 百川橋出山, 海山亭, 三日湖, 高城門巖觀日出, 甕遷, 通川門巖, 叢石亭, 侍中臺中秋泛月. 龍貢寺洞口, 入山圖, 唐浦觀魚, 水泰寺洞口, 花江縣齋)
2. 화적연, 삼부연, 화강백전, 정자연
(禾積淵, 三釜淵, 花江栢田, 亭子淵)
3. 곡운농수정, 송풍정, 첩석대, 칠선동
(谷雲籠水亭, 松風亭, 疊石臺, 七僊洞)
4. 사인암(舍人巖)
이렇게 30점이다.
이 내용을 보면 현재 전해지는 겸재 72세(1747년, 영조 23년)의 해악전신첩에는 최초의 해악전신첩에 비해 무슨 그림들이 빠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갈 수 없는 금강산 몇몇 곳, 그리고 곡운구곡(谷雲九谷) 주변을 그린 네 점의 그림(곡운농수정, 송풍정, 첩석대, 칠선동)이다. 사인암은 어디에 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1712년 30점의 그림을 그린 해악전신첩은 사천의 의지가 잘 담겨 있는 그림첩이다. 사천은 금강산은 물론 자신이 있는 김화와 주변 철원, 영평, 평강의 명승지를 겸재의 빼어난 솜씨로 담고자 했으며, 산 넘어 낭천(狼川: 화천)에 있는 장동 김문의 또 다른 근거지 곡운구곡도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곡운구곡은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삼연의 큰아버지 곡운 김수증은 1650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천부사(成川府使)도 지냈는데, 김수항(金壽恒)과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자 사직하고 현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史內面) 곡운으로 들어갔다. 이 지역은 한때는 낭천(화천)에 속하기도 하고 한때는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에 속하기도 하였다. 이 지역에서 군대 생활한 이들은 사창리(史倉里) 하면 떠오르는 곳이다.
이곳은 한북정맥의 복주산, 광덕산, 백운산과 남으로 뻗어 나간 화악산이 감싸고 있는 지역으로, 산골로 치면 심심산골이요, 자연환경으로 보면 최고의 청정지역이다. 이곳 사창리 아래 물길은 굽이굽이 명승을 만들면서 흘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정치적 혼돈이 심한 시대에 김수증은 원래의 지명인 사탄(史呑)을 곡운이라 부르면서 곡운정사(谷雲精舍)와 농수정을 짓고 살면서 골짜기마다 아홉 구비 이름을 붙여 곡운구곡이라 하였다. 송시열에게는 곡운정사기(谷雲精舍記)를 부탁하였고 사인화가(士人畵家)인 조세걸에게는 곡운구곡을 그림으로 그리게 해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를 그렸다. 이 그림은 발문과 제화시도 있으며 다행히 남아 국박(國博)에 보존되어 있다. 이곳의 인연은 뒤에도 이어져 삼연은 1715년 설악산 영시암을 떠나 이곳에 구곡정사(九谷精舍)를 지어 이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사천과 겸재는 김화에서 어느 길을 거쳐 곡운으로 간 것일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아마도 최단거리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 길을 필자는 현대 지도와 옛 지도에 그려 보았다. 56번 국도와 463번 지방도이다. 김화 관아 ~ 화강을 건너는 암정교 ~ 신사곡 사거리(김화농협 앞) ~ 근남면 사무소 (여기에서 길은 남쪽으로 갈라져 수피령, 옛 피고개를 넘게 되고) ~ 직진하여 매월대 앞 ~ 직진하여(463번 지방도) 잠곡저수지 ~ 복주산 휴양림 갈림길 ~ 하오고개 터널 ~ 화천 사내면 ~ 곡운구곡으로 가는 길이다.
김화관아와 암정교는 갈 수 없는 곳이지만 그곳과 연결되는 길은 옛길 위에 남아 있다. 이렇게 해서 해악전신첩 속 네 곳의 곡운구곡 그림이 그려졌을 것인데 남아 있지 못하니 아쉬움뿐이구나. 조세걸의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로 마음을 달래야겠다.
소설은 이어진다. 어느 것과 비교해도 뛰어난 그림첩을 원했을 사천은 겸재에게 또 하나 제안을 해 본다.
“원백, 한양 양반들 아무도 가 보지 못한 폭포가 우리 돌아가는 길 옆 낭수산(狼首山)에 감춰져 있는데 한 번 보실라우? 산 초입이라 그다지 힘들 것도 없다오”
“사천, 그런 곳이 있습니까? 당연히 가 봐야지요.”
이렇게 의기투합하여 찾아간 곳이 해악전신첩에 사인암(舍人岩)으로 남은 산 속 폭포 그림이리라.
30점의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사천은 뛸 듯이 기뻐하며 존경하는 삼연에게 제발을 써 주시라고 부탁한다. 금강산을 다섯 번(여섯 번)이나 탐승한 삼연에게는 금강산 주변의 명승이라면 모르는 곳이 없는데 어허~ 듣도 보도 못한 사인암이라는 폭포 그림이 포함되어 있으니 궁금하였으리라.
“사천, 이 사인암은 어디에 있소?”
“예, 곡운에 다녀오는 길에 삼부연보다 위쪽 산에 숨어있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삼연은 이 아쉬운 마음을 제발로 남긴다.
舍人巖
谷雲釜淵之側。自謂杖鞋殆遍。而猶漏此境耶。窈然煙霞之窟中。作雷雪久矣。猶存舍人之號。發其慳而摸其勝。今之康樂。在花江矣。
곡운과 삼부연 주변은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거의 다 다녔다고 말해 왔는데 여전히 이런 경치 놓쳤단 말인가. 아련한 연하 굴 중에 우레와 눈발 같은 물보라 인지 오래구나. 오히려 사인이란 이름이 감춘 것 드러내고 빼어남을 모색하니 지금의 안락함은 김화에 있구려.
비둘기낭도, 삼부연도 아니니
이렇게 소설을 쓰며 사인암 폭포를 찾아 나선다. 이 폭포를 찾기 위해 시작한 일이 김화, 철원, 영평(포천 북쪽), 화천 지역 폭포를 리뷰하는 일이었다. 재인폭포, 비둘기낭폭포, 삼부연 폭포 등인데 사인암도와는 맞지를 않는다.
마지막으로 복계산(福桂山) 선암폭포(仙岩瀑布, 매월대폭포)를 찾아 나섰다. 필자의 눈이나 함께 길을 나서 주었던 동행도 여기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복계산은 10여 년 전 한북정맥 길을 걸으며 대성산 아래 수피령(옛 지명 避古介)에서 올라 복계산 ~ 복주산 ~ 하오고개 ~ 광덕산 ~ 광덕고개로 이어가던 길인데 복계산 품에 이런 비경의 폭포가 숨어 있는지 모르던 곳이었다.
복계산, 복주산은 낭천(화천)의 주산이라 낭수산(狼首山)이라 불렀다. 고개도 많아 수피령, 하오고개, 광덕고개(캬라멜 고개,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카멜 고개라 했는데 캬라멜이 아른거리던 젊은 병사들이 그렇게 불러 바뀌었단다)로 화천과 김화, 철원이 연결되던 곳이다.
서울에서는 47번 국도를 타고 와 김화읍 서면에서 56번 지방도를 타면 잠곡리를 지나 매월대로 연결된다. 주차장도 넓고 쾌적한데 이곳과 사창리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거처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차장에서 약 500m 비교적 편한 산길을 오르면 계곡 사이에 매월대 폭포(仙岩瀑布)를 만난다. 앞쪽으로는 매월대로 불리는 암산이 폭포를 내려다본다. 선암이라고도 하고 김화 옛 지도에는 창암(蒼岩)이란 기록도 보인다.
선암폭포에서 2시간여 오르면 남쪽 한북정맥의 첫 봉우리 복계산에 오를 수 있다. 겸재의 그림을 보면 폭포 옆 암벽에 산길처럼 보이는 흔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길은 없다. 산길은 폭포 좌측에서 오르고 이어서 등정길로도 갈 수 있고 폭포 위로도 갈 수 있다. 그림과 폭포의 모습은 거의 유사하다.
하루 청정지역 나들이를 원하는 이들은 겸재 그림 들고 필자처럼 소설을 쓰면서 한 번 다녀오시기를 권한다. 설령 이곳이 아니더라도 사인암 폭포가 제 위치를 알려 삼부연처럼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