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해악전신첩 속 그림을 찾아다닌 여정은 사인암에서 상상의 날개를 편 후 아쉽게도 끝을 맺는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 땅 금강산 주변이기 때문이다. 이제 찾아가는 겸재 그림 길은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을 중심으로 해서 동해안 명승을 그린 그림들을 찾아가는 길이다. 관동명승첩은 앞에서 정자연 길을 갈 때 살펴보았듯이 1738년(영조 14년) 최영숙을 위해 그린 11점의 그림첩이다.
겸재는 1733년(영조 9년) 58세에 청하현감(淸河縣監)으로 나가 모친이 세상을 떠나 벼슬을 사직하기까지 2년여를 청하에서 근무하였다. 이때 사천 이병연은 삼척부사로 있었고 사천의 아우 이병성도 오래는 아니었지만 간성군수로 있었기에 겸재에게는 관동 지방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좋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요즈음 동해안 7번 국도를 끼고 만나는 명승을 지척에 두고 정다운 지인들과 교우했으리라.
겸재는 모친 탈상 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는데 이때 그린 밑그림으로 63세 되던 1738년(영조 14년) 관동명승첩 11점의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무슨 그림들을 그렸을까?
정자연, 수태사 동구, 총석정, 삼일호, 해산정, 천불암, 청간정, 시중대, 월송정, 망양정, 죽서루가 그려져 있는데, 이미 다녀온 정자연과 갈 수 없는 북녘을 제외하면 청간정,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이곳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관동팔경일까?
민속백과사전에 실린 관동팔경은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을 통틀어 일컫는다. 평해의 월송정 대신 흡곡의 시중대(侍中臺)를 관동팔경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하니 이제부터 찾아다닐 네 점의 그림은 관동팔경인 셈이다.
전해지는 겸재의 그림은 위의 청간정,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이외에도 낙산사, 경포대, 성류굴, 청하읍성, 내연 삼용추가 있으며, 전해지는 그림은 없지만 겸재와 사천의 발자취가 남은 두타산 용추도 가 보려 한다.
이곳은 간성인가 고성인가
자 이제 출발이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청간정을 찾아 나선다. 진부령을 넘어 고성(高城) 땅으로 접어드는데 옛 지도에는 간성(干城) 땅이다. 간성이 고성에 흡수되다 보니 옛 지도에 있는 간성의 읍치는 고성군 간성읍이 되어 외지인들은 자주 착각하게 만드는 지명이다. 간성읍에 갈 때 어떤 이는 고성 간다 하고 어떤 이는 간성 간다 하니 사정을 모르는 외지인은 자주 헷갈리게 된다.
예부터 간성으로 가는 큰 고개는 진부령이다. 나지막한 고개로 내륙에서 영동으로 넘어가기 가장 편한 고개였다. 옛 간성 지도에서 보듯이 인제에서 간성으로 백두대간을 넘는 고갯길은 진부령(陳富嶺), 흘리령(屹里嶺), 석파령(石破嶺,또는 所坡嶺), 미시령(彌矢嶺)이 있다. 지금은 차량으로 이동하다 보니 진부령과 미시령을 이용하고 다른 고개는 닫혔다. 관동별곡의 송강(松江)은 금강산 길로 왔으니 굳이 진부령을 넘을 필요는 없었다.
고셩(高城)을란 뎌만 두고 삼일포(三一浦)를 차자가니
(고성를 저만치 두고 삼일포 찾아가니)
단셔(丹書)는 완연하되 사션(四仙)은 어데 가니
(붉은 글씨는 완연한데 네 화랑은 어디 갔나)
예 사흘 머믄 후에 어디가 또 머믄고
(여기에서 사흘 머물고 어디 가서 또 머물렀던 것인가)
션유담(仙遊潭) 영낭호(永郞湖) 거긔나 가 잇는가
(선유담 영랑호 거기 가 있었던가)
간정(淸澗亭) 만경대(萬景臺) 몃 고대 안듯던거
(청간정 망경대 몇 곳에 앉았던가?)
청간정이 그 시절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송강도 찾아가고, 신라 화랑도 찾아갔겠지 하며 송강은 헤아려 보고 있다. 이제 우리도 찾아가 보자.
동해안 7번 국도는 시간 간격은 길어도 노선 버스도 잘 갖추어져 있고 청간정 구간은 해파랑길 46코스에 속해 있어 걷는 이들도 많다. 버스 노선은 간성읍내에서 1번 버스가 다닌다. 바닷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은 차 없이 과감히 도전해 보아도 좋은 길이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예부터 고성 제일의 명소이니 네비가 친절히 데려다준다.
가기 전 겸재 그림을 꼼꼼히 살펴 본다. 겸재의 청간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앞 동해의 창파와 뒤 산등성이 사이에 우뚝 선 바위 부분과 산기슭에 기댄 누정(樓亭) 및 어촌의 모습이다. 우뚝 선 바위 모습을 보면 가히 절경인데 그 위로 오르는 가파른 층계길이 있고 바위 위 평탄한 곳에는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에서 보듯 신선 같은 두 노인이 마주 앉아 담소하고 있다. 바둑이라도 두는 것일까? 사동(使童)도 선동(仙童) 같이 명(命)만 떨어지면 쪼르르 오르내릴 모습이다. 행여 어떤 이들은 겸재가 사천과 자신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오른쪽 산 밑에는 두 채의 기와집이 보인다. 한 채는 2층의 누정(樓亭)이고 그 옆으로는 단층의 정자(亭子) 모습이다. 각각 무슨 건물일까?
규장각에는 재미있는 민화풍 청간정도가 전해진다. 청간정 자료전시관 전시물에도 이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요즈음 사람들의 화사한 꽃 그림과 비교해도 감성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센스있는 그림인데 그 그림에는 각각 건물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층 누각(樓閣)은 만경루(萬景樓), 단층 정자는 창간정(淸澗亭)이다. 아 그렇구나, 만경루와 청간정이구나.
앞 바위에는 이름이 안 쓰여 있는데 이 바위는 많은 자료에서 언급된 만경대(萬景臺)이다. 단원도 청간정을 그렸는데 뒷산 옆으로 비교적 큰 어촌 마을이 그려져 있다. 이 마을은 지금은 더욱 커져 청간어촌계를 이룰 만큼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이만큼의 사전 지식을 가지고 청간정을 찾아간다. 어허? 이게 무슨 일인가? 청간정이라는 편액을 단 2층 누각이 언덕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바닷가에 서 있어야 할 우뚝한 바위 만경대도 없고 단층의 단아한 정자 청간정도 없고 오직 만경루(萬景樓)만이 엉뚱하게 청간정(淸澗亭)이라는 남의 이름을 달고 바닷가 아닌 언덕 위에 있는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자료관 앞 안내판에 저간의 사정이 간략하게 쓰여 있다.
본래 청간역(淸澗驛)의 정자로 만경대의 남쪽 물가 봉우리에 옮겨 지어 청간정이라 하였다 한다. 중수에 관한 기록은 1560년(명종 15년)에 간성 군수 최천이 처음 수리하였고, 1662년(현종 3) 군수 정양이 재차 보수한 뒤 옆에 작은 누각을 세우면서 좀 더 화려하게 치장했다. 1844년(헌종 10)에 군수 정재용이 고쳐 지었으며 1863년(철종 14) 군수 이원영이 다시 지었다. 그 후 비바람과 화재를 겪으면서 10여 개의 돌기둥만 쓸쓸히 남아 있던 것을 1928년 봄에 토성면장 김용집의 발기로 지금의 위치에 옮겨 중수하게 되었다.
그랬었구나…, 옮겨 다시 지은 것이구나….
그러면 만경대는 돌기둥이니 우뚝한 돌기둥은 예전과 변함없을 터인지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리라. 이런 기대를 가지고 주위를 찾아다녔건만 만경대처럼 보이는 바위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지쳐갈 무렵 마을 청간어촌계 축양장 앞 건물 외벽에 설치된 계단을 올라 군사보호시설 안쪽 마당을 내려다보다가 만경대를 찾을 수 있었다.
만경대와 청간정을 그린 옛 그림들은 많이 남아 있다. 겸재를 비롯하여 단원의 금강사군첩, 이의성의 해산도첩, 강세황, 허필 등등 청간정 자료전시관에는 여러 종류의 청간청도가 걸려 있다. 모두 다 우뚝한 만경대의 모습이다. 그러나 군사보호시설 안쪽 마당의 만경대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바다는 메워져 모래는 쌓였고 다가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마모되었거나 한국전쟁 때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결론은 볼품없는 작은 바위 언덕 정도였다.
그 옆으로는 청간정이 무너진 뒤 어느 날 세운 박귀룡 처 김해김씨 정려각(朴貴龍妻 金海金氏 旌閭閣)이 아직도 서 있었다. 그 바위에는 지금도 청간정(淸澗亭), 선유담(仙遊潭), 만경대(萬景臺) 각자가 남아 있다 한다. 청간정 구지(舊址)도 겸재를 비롯한 여러 화가, 문인들의 작품을 탄생시킨 곳이니 이제부터라도 정성껏 보호했으면 좋겠고 개방되어 겸재를 사랑하는 이들이 청간정도(淸澗亭圖)를 들고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다시 현재의 청간정으로 돌아온다. 어쩌다가 만경루가 청간정을 대표하게 되었누? 누대를 오르면 편액들이 여럿 걸려 있다. 雩南(우남)이라 쓴 청간정 편액이 보인다. 전 이승만 대통령이 쓴 편액이다. 과연 한학자다운 명필의 글씨다. 이곳에 편액으로 전해지던 율시도 있었는데 언젠가 누군가가 가져가 버려 사진만 전해진다. 최규하 대통령의 단정한 해서체(楷書体) 대구(對句)도 반갑다.
嶽海相調古樓上: 산과 바다가 조화로운 옛 누에 오르니
果是關東秀一景: 과연 관동 제일의 빼어난 경관이로세
예부터 간성 제일의 명소이다 보니 시(詩)도 많고 기(記)도 많다.
고려의 문신 김극기(金克己, 1150∼1204)는 이곳 청간역에 저녁에 도착하였다. 객사에 머물며 시 한 수 적는다.
杆城郡 驛院 淸澗驛: 간성군 역원 청간역에서
雲端落日欹玉幢: 구름 끝 해는 지고 수레는 멈췄는데
海上驚濤倒銀玉: 바다 놀란 파도 은색 포말 뒤집네.
閑搔蓬鬢倚朱闌: 한가로이 흩은 머리 긁으며 붉은 난간 기댔는데
白鳥去邊千里目: 흰 새 날아간 해변 천 리 멀리 바라보네.
송도에서 이곳 바닷가까지 온 나그네는 바다 멀리 바라보고 있다. 800여 년 전 그도 우리처럼 나그네 여수(旅愁)에 젖어 있다. 그때는 아직 청간정을 바닷가로 옮기기 전이었으리라. 청간정에는 택당 이식이 읊은 시도 걸려 있다.
청간정(淸澗亭) 택당 이식
天敎滄海無潮汐: 하늘의 뜻이런가 밀물 썰물 없는 바다
亭似方舟在渚涯: 방주마냥 정자 하나 모래톱에 멈춰 섰네
紅旭欲昇先射牖: 아침 해 솟기 전에 붉은 노을 창을 쏘고
碧波纔動已吹衣;: 푸른 바다 일렁이자 옷자락 벌써 나부끼네
童男樓艓遭風引: 동남동녀(童男童女) 실은 배 순풍(順風)을 탄다 해도
王母蟠桃着子遲: 왕모의 선도(仙桃) 열매 언제나 따먹으리
怊悵仙蹤不可接: 선인(仙人)의 자취 못 만나는 아쉬움 속에
倚闌空望白鷗飛: 난간에 기대 부질없이 오가는 백구만 바라보네
(기존 번역 전재)
허균(許筠)은 그답게 청간정에서 낮잠 한잠 자고 시를 읊는다.
淸磵亭晝睡: 청간정에서 낮잠을 자다
楓岳曇無竭: 금강산 담무갈 보살이 그대라면
金門老歲星: 대궐의 늙은 세성 나 아니겠나
相逢雖恨晩: 상봉이 비록 원망스레 늦었으나
交契自忘形: 스스로 처지 잊고 서로 친해졌지
暫別緣塵累: 세상살이 매어 있어 잠시 헤어졌다가
幽期屬暮齡: 늙은 뒤에 호젓하게 다시 만나세
高亭殘午夢: 높다란 정자에서 낮잠 아직 남았는데
天外萬峯靑: 하늘 끝 일만 봉은 푸르기만 하구나
나이 들어 만나자던 그와는 끝내 만나지 못했으리라. 나이 50에 참형당한 그였으니 그의 꿈은 낮꿈(午夢)으로 끝났다. 경포대에 가는 날 그의 옛 집터에 들려 그를 애도해야겠다.
예부터 현재까지 글도 많은 청간정
1710년 무렵 청간정은 한때 이름이 운근정(雲根亭)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이 무렵 설악에 머물고 있던 삼연(三淵) 김창흡은 강릉과 간성 여행을 하였고 이듬해에는 금강산 여행길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때 삼연은 운근정(청간정)에 들러 시도 남기고 운근정기(雲根亭記)도 남겼다. 시 한 수 읽고 가자. 기(記)는 장문(長文)이라 여기에 소개하지 못한다(원문이 필요한 분은 삼연집 참조).
관암 홍경모도 청간정기를 썼는데 이제까지 설명한 내용들과 겹쳐 더 소개하지 않는다(원문이 궁금한 독자는 관암집 참조).
雲根亭次韻: 운근정에 있는 시에서 운을 빌리다.
淸秋與子過: 맑은 가을 그대와 같이 지나는데
春夜又風欞: 봄밤에는 격자창에 바람이 또 불었지
恍惚臨蛟鰐: 황홀하게 교룡과 악어 임해서
虗明步月星: 횡한 밝음에 달과 별을 밟네
僊應我輩近: 신선이 가까이서 우리를 대해 주는데
酒豈此間醒: 술은 어찌 이 순간에 깨이는고
澎湃簾鉤下: 물결은 주렴 아래 언덕을 치는데
崩濤未厭聽: 부서지는 파도 소리 물리지도 않네
一作澎湃濤侵岸。如和帝樂聽。
이제 청간정에서 내려와 자료관을 둘러본다. 청간정의 모든 것이 자료화되어 있는 듯 자료가 풍부하다. 에너지 넘치는 관장님 덕에 또 많은 공부를 한 날이다. 자료관 앞에는 3기(基)의 비(碑)가 있는데 1929는 청간정을 다시 세울 때 거액을 희사한 분들의 공덕비이다. 이분들의 공덕으로 그나마 옮긴 자리 만경루에 올라 그 날의 청간정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청간정 시간여행을 마치고 고성의 주요 문화유적을 둘러보러 간다. 건봉사(乾鳳寺), 진전사지(陳田寺址), 천학정(天鶴亭), 화진포(花津浦), 화암사(禾巖寺), 왕곡(旺谷)마을 등인데 하루 나들이 길로는 경관도 이야기도 손색이 없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