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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95) 청하성읍(淸河城邑)] 그림 그리는 현감으로 행복한 2년 지낸 청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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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18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2.02.25 09:27:14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1733년(영조 9년) 겸재는 경상도 청하현(淸河縣) 현감직을 제수받는다. 1726년(영조 2년) 하양 현감을 끝으로 지방 관직에서 떠났었으니 실로 7년 만에 다시 지방관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청하현은 경상도 오지로서 북으로는 영덕, 남으로는 흥해(포항 흥해읍), 서로는 산 넘어 경주, 동으로는 바다와 경계를 마주하는 땅이니 참으로 먼 곳이었다. 1800년대에 발간된 청하현 읍지를 보면 호구(戶口) 수가 1745가구에 인구(人口) 수가 남녀 아울러 6907명(戶口元一千七百四十五戶 人口男女幷六千九百七口)이었으니 그보다 백수십 년 앞선 겸재 시대에는 더더욱 작은 고을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구려, 신라, 고려 때에는 경주 속현으로 있다가 고려 때 비로소 청하란 이름을 얻었으나 역시나 속현은 벋어나지 못했는데 조선조에 와서 비로소 독립된 행정단위가 되었다 한다.

이런 작은 고장으로 오는 겸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예상과는 달리 겸재는 내심 기뻐했을 것 같다. 이때 둘도 없는 지인들인 사천(槎川) 이병연이 삼척 부사로 있었고, 그 아우 순암(順菴) 이병성이 간성 군수로 있었으니 겸재에게는 결코 외로운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순암은 청하로 오는 겸재를 기꺼이 맞는 초대 시를 보냈다.

 

동국여지승람의 청하 관련 쪽. 

嶺人應知使君名 영남 사람 응당 사또 이름 안답니다
桃李花開舞鶴迎 도리산에 꽃피고 호학산은 춤추며 맞겠지요
踏盡棠沙遙喚艇 해당화 핀 백사장 거닐다가 배를 부르시지요
竹西樓上有吾兄 죽서루엔 우리 형님 계신답니다

영남 고을 사람들이 환영함은 물론 청하의 봉수산(烽燧山)인 도리산(桃李山) 도 꽃을 피우고, 청하의 진산 호학산(呼鶴山)도 춤을 추며 맞을 것이라며 겸재를 환영한다. 게다가 해당화 핀 백사장도 걸어보라 하고, 언제든 부르기만 하면 배를 보내겠다 한다. 형님 사천이 삼척에 계시니까. 이 싯구처럼 관동명승첩을 소개할 때 이미 살폈듯이 겸재와 사천은 의미 있는 2년을 보냈다.

1735년(영조 11년) 5월 모친이 세상을 떠나 사직하고 돌아올 때까지 2년 남짓 청하 현감 시절 겸재가 남긴 작품들을 보면 그에게는 작가로서 더없이 보람 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58세에서 60세까지 완숙한 시기에 자연 경관 좋고 화재(畵材) 풍부하고 좋은 이웃이 있었으니 그의 작품은 무르익어 갔다. 그 결과 탄생한 밑그림들이 관동명승첩에 담겼고, 대작 내연삼용추와 금강전도(金剛全圖)도 1734년에 그렸다 하니 청하 현감 시절 작품이 된다. 또한 이 시기에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도 그렸다 하는데 겸재에게는 소중한 시기였던 셈이다. 연구자들은 겸재의 진정한 진경산수화가 무르익은 시기라 한다.

왜 ‘읍성’ 아닌 ‘성읍’이라 했을까

이런 와중에도 겸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청하읍의 정경(情景)을 작은 종이에 담담한 필치로 담았다. 그림 이름은 청하성읍(淸河城邑). 성으로 둘러싸인 읍은 일반적으로 낙안읍성 해미읍성 결성읍성처럼 읍성(邑城)이라 하는데 왜 겸재는 구지 성읍(城邑)으로 썼을까? 아마도 군사시설인 성(城)보다 행정단위인 읍(邑)을 더 마음에 둔 것은 아닐까?

동해안 바닷가 지역은 신라 시대에는 왜(倭)의 잦은 도발을 막아야 했고, 고려 고종 이후부터 조선 초까지는 왜구(倭寇)라 부르는 해적들로부터 고을을 지켜야 했다. 월송정에서 보았듯이 청하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려 현종 때 토성(土城)으로 쌓았던 시설을 조선 초 세종 때(세종 9년, 1427년)에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았다 한다. 잠시 주제를 벗어나 보면, 청하에는 군사가 얼마나 있었을까? 1700년대 말 해동지도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경각사제색군(京各司諸色軍) : 169명
감영소속(監營屬) : 12명
좌병영소속(左兵營屬) : 192명
좌수영소속(左水營屬) : 227명
경주진소속(慶州鎭屬) : 410명

갑자기 들이닥치는 해적을 막기에는 부족했을 것 같다. 다행히 임진란 이후부터 1850년대 중반 무렵 열강이 덤비기까지 병란(兵亂)은 없었다.

 

겸재 작 청하성읍도. 
청하 옛 지도. 겸재 그림과 비교할 수 있도록 90도 회전시킴. 

이제 겸재의 청하성읍도를 보자. 그림은 동쪽 바닷가 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며 그렸다. 따라서 그림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옛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90도 회전하여 우측을 북(北)으로, 위쪽을 서(西)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청하읍성은 건물 지붕 높이쯤 되는 높이의 석성으로 관아 건물을 감싸고 있다. 뒤쪽(서쪽)으로는 성문도 보인다. 그 안으로는 관아 건물이 질서 있게 자리 잡고 있다. 상당한 크기의 교목(喬木) 몇 그루가 서 있고 성벽 담장으로는 작은 대나무로 보이는 나무들이 빽빽하다. 성 밖으로는 민가들이 자리 잡고 있고 울타리도 촘촘하다. 우측에는 번듯한 기와 건물도 몇 채 보인다. 뒤쪽(서쪽)으로는 우뚝한 산들이 보인다. 이제 옛 지도와 이 그림을 맞추어 보자.

편의를 위해 필자가 그림과 지도에 번호를 붙여 놓았다. 1은 내아 건물이다. 겸재가 기거하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 앞 건물이 동헌(東軒)으로 읍지에 보면 정당(政堂)인 육청헌(六淸軒)이라 불렀다. 겸재의 업무 공간이었다. 동헌 앞으로는 동헌으로 들어오는 내삼문(內三門)이 보이고 내삼문 아래쪽은 외삼문(外三門)일 것이다. 내삼문과 외삼문을 보면 가운데 중문이 좌우 문에 비해 높이 솟아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겸재가 사실적으로 상당히 디테일하게 그린 것이다.

 

청하의 현재 지도. 겸재 그림처럼 90도 회전시킴.

외삼문 앞쪽 번호 2는 해월루(海月樓)라 부르는 청하현 명물 누각이다. 본래 청하현 객사 동쪽에 죽월루(竹月樓)라는 볼품없는 누각이 있었는데 1528년(중종 23년) 현감 김자연(金自淵)이 헐고 새로 누각을 세워 임명루(臨溟樓)라 하였다. 이 누각은 몇 년 못가 기울어지니 새로 온 현감 이고(李股)가 여러 방도를 마련하여 1537년(중종 32년) 새로 누각을 짓고 해월루(海月樓)라 하였다 한다. 이 해월루는 회재 이언적, 몇 년 후 겸재와 같이 연강임술첩에 기(記)를 남긴 청천 신유한, 김회연(金會淵)이 기(記)를 남겼다. 참고로 본고 말미에 회재의 해월루기를 실었으니 참고하시기를.

 

청하 향교의 흔적.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또한 그림 우측(북쪽) 번호 3은 연못 옆에 세운 정자 연정(蓮亭)이며, 그 앞 건물은 객사(客舍)다. 덕성관(德成館)이라 했다 한다. 4는 서문(西門)으로 반대편 동문(東門)은 숲에 가려져 있어 그리지 않은 듯하다. 번호 5는 지금도 비교적 형체를 잘 보전하고 있는 청하향교. 이층 우뚝한 누각에 천화루(闡化樓)란 편액이 달려 있다. 대문에는 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대길 건양다경) 춘첩(春帖)을 써 붙였건만 코로나19로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안내판에는 1398년(태조 7년)옆 고을 서정리에 세웠다가 1716년(숙종 42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옛 청하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다행스럽구나.

청하 고을을 둘러싼 산과 숲

다음은 산과 숲을 살펴보자.

6은 고을의 동쪽 덕송산(德松山)인데 이제는 주택 지역으로 변했다. 옛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동문은 숲에 가려 청하성읍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본래 청하읍성에는 남문과 북문은 없었다 한다. 7은 청하의 옛 진산 호학산(呼鶴山, 또는 回鶴峰)이다. 8은 내연산, 9는 덕성산이다.

 

겸재 그림 방향으로 바라본 청하면 주민센터.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주민센터 입구의 겸재 그림.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청하면 주민센터의 노거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옛 청하 현을 그리며 청하면 주민센터를 찾아간다. 옛 청하읍성은 이곳 청하면 주민센터와 길 건너 청하초등학교 자리에 해당된다. 센터 입구에는 겸재의 청하성읍도를 걸어 놓았다. 그 곁으로는 청하면사무소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제일 반가운 것은 앞마당에 우뚝 선 노거수(老巨樹)인데 겸재 그림 속 나무들과 나무 모양이 흡사해서 눈길을 뗄 수가 없다. 30년 전 세운 안내판에는 300년 된 나무라 하는데 그렇다면 겸재가 그림을 그릴 때 40여 년 자란 나무일 것이다. 겸재가 그린 나무는 이 나무의 엄마 나무였을까? 아니면 이 나무 수령 추산에 오차가 있어 이 노거수의 젊은 날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가져 본다.

 

청하현을 거쳐간 관리를 기리는 선정비. 겸재를 기리는 비는 없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주민센터 마당에는 이곳을 거쳐간 조선의 관리들(현감, 군수, 관찰사) 중 남아 있는 10기의 선정비를 정렬해 놓았다. 아쉽게도 겸재는 보이지 않는다. 대략 200여 명이 거쳐 갔다 하니 어머니의 사거(死去)로 급히 사직하고 떠난 겸재의 선정비는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 마당에는 ‘삼일만세의거 기념비’도 서 있다. 청하 장터와 두곡 숲에서 외친 독립만세를 잊지 말자는 기념비일 것이다.

 

읍성 성벽의 잔해.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옛 관아의 흔적으로 보이는 기와 조각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청하 옛집의 쪽문.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청하의 고인돌.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주민센터를 나서 읍내를 한 바퀴 돈다. 곳곳에 깨진 기와편, 성벽이 남아 있고 옛 청하의 쇠락해가는 오랜 담장이 시간을 멈춘 듯하다. 고인돌도 밭 가운데 잊혀져 있고 옛집 안마당에는 감나무에 까치밥도 주홍빛으로 익어간다. 이대로 두면 청하의 옛 모습은 시간과 함께 소멸되어 갈 것 같다. 아직은 아스라이 잡힐 듯 말 듯 옛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 청하. 인구는 겸재의 시간대만큼은 되는 것일까? 거리도 한산하고 점방도 오수(午睡)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청하공소 안내판. 성당 하나 세울 규모가 안 되는 작은 고을이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천주교 공소에도 가 보았다. 성당 하나 들어설 수 없이 작은 고을 청하. 겸재 그림의 디테일이면 충분히 옛 모습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발길에는 겸재의 그림 속 청하에 가까이 가는 청하를 기대하며 청하 해월루 시 한 편, 기(記) 한 편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청하현 해월루 시를 잣다(題淸河縣海月樓)

퇴계의 형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의 시

十二年前過此遊。열두 해 전 이곳을 지났네
今來傑構喜重修。이제 오니 빼어나게 다시 지었구먼
囱含海旭淸光發。창은 바다를 품어 더욱 밝은 빛 발하고
軒對山嵐翠色浮。처마는 산 기운 맞아 푸른색 드러나네
苦竹漸枯嫌扁額。참대 말라가니 편액인가 여기는데
滄溟乍隔失名樓。바다와 살짝 격해 누각 이름(臨溟樓) 버리고
新題海月多思藻。새로이 해월루라 멋진 이름 지었네
從此風流薄海陬。여기부터 풍류는 바다까지 가까이
 

빈집의 담에 읍성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개인 집의 옛 담장.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회재 이언적의 해월루기(海月樓記)

고을에 누관(樓觀)이 있는 것이 다스림과는 무관한 듯하지만, 기분을 풀어 주고 마음을 맑게 하여 정무를 베푸는 근본으로 삼는 것이 또한 반드시 여기에서 얻어진다. 기분이 답답하면 생각이 어수선하게 되고, 시야가 막히면 뜻도 막혀 트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유람할 수 있는 장소와 멀리 조망할 수 있는 누대를 두어 넓고 원대하고 맑고 겸허한 덕을 길러 다스림이 이로부터 나오게 하는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도리어 크지 않겠는가.

청하현(淸河縣)은 바닷가 한구석에 붙어 있는 고을이다. 객관(客館) 동쪽에 옛날에 작은 누대가 있었는데, 협소하고 나지막한 건물이 성첩(城堞) 사이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서 답답한 가슴을 후련하게 하거나 맑고 탁 트인 경치를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득하게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장관(壯觀)이 지척에서 막혀 버리게 하고, 보이는 것이라곤 반 평가량의 네모난 못과 몇 그루의 매화와 대나무뿐이었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 겨울에 현감 김후 자연(金侯自淵)이 처음으로 개축하고자 하여 옛 누대를 증축하여 높이를 높이고 면적을 넓히니, 아득히 펼쳐진 푸른 바다가 눈을 들면 바로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 누대에 오른 사람이 누대가 높은 줄을 모르되 하늘과 땅이 열린 듯이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이를 임명각(臨溟閣)이라고 이름 붙였다. 다만 훌륭한 목수를 얻지 못한 탓으로 기초 공사가 부실하고 영건(營建)이 잘못되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기울어지고 말았다.

그 뒤에 유무빈(柳茂繽)이 후임 현감으로 부임하여 지탱시키고 일으켜 세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기울어져 버렸다. 그래서 청하현에 온 빈객들이 비록 한여름철을 만나 찌는 듯한 무더위에 시달리더라도 배회하다가 발을 멈추고 감히 누대에 오르지 못한 지가 거의 10년이 되었다.

정유년(1537, 중종32) 가을에 철성(鐵城) 이후 고(李侯股)가 연로한 어버이의 봉양을 이유로 고을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청하현에 부임하였는데, 능숙하게 고을을 다스리는 여가에 개연(慨然)히 이 누대를 중수하려는 뜻을 가졌다. 그렇지만 고을은 쇠잔하고 재정은 부족한 상황에서 피로한 백성들을 거듭 괴롭히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이에 아전과 백성들의 미납(未納)한 조세를 찾아내어, 밀린 조세의 많고 적음에 따라 부담할 부역의 양을 책정하였다. 또 수사(水使) 이공 몽린(李公夢麟)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인근 고을 수졸(戍卒)들 가운데 부방(赴防)에 빠져 응당 벌을 받아야 할 사람 100명을 확보하고, 이들의 벌을 면제해 주는 대신에 그 힘을 쓰니, 백성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고도 공사를 해낼 수 있었다. 흙을 쌓아 기초공사를 한 뒤 건물을 정교하게 짓고 처마와 난간에 단청을 입혀 영롱하고도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니, 재목은 대부분 옛것을 그대로 썼는데도 외관적인 모습은 완전히 일신되었다. 이에 그 편액을 해월루(海月樓)로 고치고 나에게 기(記)를 요청하였다.

내 고향은 청하현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한 번 가서 누대에 올라 경관을 바라보며 먼지 세상의 번뇌를 씻어 버리고 싶었지만, 조정에 매여 벼슬살이를 하느라고 바람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누대의 아름답고 장엄한 경관은 그 이름을 가지고 생각해 보더라도 한두 가지는 알 수 있다.

난간에 기대어 시야가 닿는 곳까지 한껏 바라보면 가지가지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지는데, 가까이 녹색 들판과 접하고 멀리 하늘빛과 섞여 울창하게 북쪽에 우뚝이 솟은 것은 내연산(內延山)이고, 높다랗게 서쪽에 빼어난 것은 회학봉(回鶴峯)이다. 소나무 숲이 원근에 있어 짙푸른 산색을 감상할 만하고, 연무와 이내가 아침저녁으로 만 가지 자태와 형상을 빚어내는데, 유독 바다와 달 두 가지만을 취하여 이름 붙인 이유는 누대에서 보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을 기록함이다. 그 큰 것을 보고서 마음에 터득함이 있으니, 어찌 눈을 즐겁게 하고 경치를 감상할 뿐이겠는가.

아침 해가 물결에 비치고 자욱한 해무(海霧)가 처음 걷히면 아득하게 펼쳐진 물이 하늘과 맞닿아 만 리 밖까지 푸른빛을 띠고, 넘실거리고 철썩거리는 파도가 하늘의 해를 삼킬 듯하며, 한없이 깊고 넓은 바다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때에 높은 누대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서 시야가 닿는 곳까지 한껏 멀리 바라보면, 아득하기가 하늘로 올라가서 바람을 타고 은하수에 다다른 것과 같아, 사람의 마음을 툭 트여서 광대하고 화평하게 하여 호연지기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차도록 할 것이다. 이는 바다 보기를 잘 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대지에 날씨가 개고 하늘가에 구름이 흩어져 푸른 하늘에 달이 떠가고 흰 저녁 연무가 비낄 때면, 물 빛과 하늘 빛은 하나가 되고 별들은 빛을 숨기며 갠 하늘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워 맑고 깨끗한 빛을 띤다. 이때에 높은 누대에 올라가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맑고 높은 곳에 몸을 맡기고 끝없이 공허하고 밝은 곳에 눈을 붙인다면, 아득히 세속을 버리고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과 영주산(瀛洲山)에 오른 것과 같아,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고 시원하게 하여 가슴속의 찌꺼기가 모두 씻기고 본연의 천성이 가슴속에 넘치도록 할 것이다. 이는 달 보기를 잘 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 군자가 사물을 보는 것은 세속의 안목과 달라서, 그 물을 보면 반드시 그 이치를 깨달아 마음에 체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운행을 관찰하여 편안히 쉴 겨를이 없으며, 땅의 형세를 살펴 그 덕을 두터이 하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후(李侯)가 해월루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어찌 의미 없이 그냥 한 일이겠는가. 바다에서 그 너그러움을 취하고 달에서 그 밝음을 취하고자 함이다. 너그러움으로 나의 도량을 넓게 하고 밝음으로 나의 덕을 밝게 한다면 천하도 다스릴 수 있을 것인데, 더구나 한 고을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이 누대에 오른 자가 그 편액을 보고서 그 뜻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세속적인 안목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1543년(중종38) 3월


(기존 번역 전재)

海月樓記

邑之有樓觀,若無關於爲政,而其所以暢神氣,淸襟懷,以爲施政之本者,亦必於是而得之。蓋氣煩則慮亂,視壅則志滯。君子必有遊覽之所、高明之具,以養其弘遠淸虛之德,而政由是出,其所關顧不大哉?

淸之爲縣,僻在海隅。客館之東,古有小樓,陿隘低微,隱在雉堞中,四顧無眼界,無以宣暢湮鬱、導迎淸曠,至使浩渺無涯之壯觀,礙於咫尺而莫收,所見者半畝方塘、數叢梅竹而已。嘉靖戊子冬,縣宰金侯自淵始欲改構,增其舊制,峻而寬之,滄溟浩汗,擧眼斯得,人之登斯樓者,不知樓之高,而怳然如天開地闢而敞豁也,遂名爲臨溟閣。第以匠不得良,築址不牢,營構失宜,不數年而傾側。厥後柳茂繽繼之,支撑起正,未久旋頹,賓客之至縣者,雖當夏月,困於炎蒸,而徘徊却立,不敢登者,殆將十年矣。歲丁酉秋,鐵城李侯股,以親老出紐縣章,游刃之餘,慨然有志於重修,尙慮邑殘力薄,重勞疲氓,乃搜吏民之欠科納者,隨其多少而稱其役之輕重,又求助於水使李公夢麟,得隣境戍卒之闕防應罰者百名,除其罰而用其力,不煩民而事集。累土築基,結構精緻;碧簷丹檻,玲瓏宛轉,材頗仍舊,而制作一新。乃改扁爲海月樓,屬余記之。

余惟吾鄕距縣纔數程,庶幾一往登覽,以滌塵煩,而繫官于朝,願莫之遂。然茲樓之勝狀,因其名而求之,亦可得其一二矣。凭欄縱目,萬景森羅,邇延野綠,遠混天碧,鬱然而峙於北者,內延山也;巍然而秀於西者,回鶴峯也。松林遠近,蔥翠可玩;煙嵐朝暮,變態萬狀,而獨取二物以爲名者,志其所見之大者也。見其大而有得於懷,豈但快目玩物而已哉?若乃桑暾照波,煙霧初消,淼淼漫空,一碧萬里,浟㴒瀲灎,浮天浴日,浺瀜滉瀁,不見涯岸,憑高而極目,渺茫邈乎如凌虛御風而臨河漢,使人心境廓然廣大寬平,而浩然之氣,充塞於兩間,此則觀海之善者也。至若氣霽坤倪,雲斂乾端,氷輪輾碧,暮靄橫白,水天混光,星河韜映,霽色嬋娟,澄輝皎潔,人在危樓,愛而玩之,寄身於淸高之域而寓目於虛明無盡之境,杳然如離世絶俗而登蓬瀛,使人胸次洒落,査滓淨盡,而本然之天,浩浩於襟靈,此則玩月之善者也。

嗚呼!君子之觀物,異於俗眼,觀其物,必悟其理而體于心,故觀天行而不遑寧息,察地勢而思厚其德。侯之以海月名樓,夫豈徒然哉?海以取其寬,月以取其明,寬以弘吾量,明以昭吾德,雖以之治天下可也,而況於爲一邑乎?登斯樓者,目其額而思其義,則庶免於俗眼矣.

고증도 분명하고 문장도 아름답다. 고개 넘어 고을 큰 학자의 면모가 반갑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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