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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101) 쌍도정] 경북 성주의 ‘두 섬 정자’에 얽힌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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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24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2.05.30 09:28:50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하양 현감 시절, 50세가 되던 1725년(영조 1년)에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그림 ‘쌍도정(雙島亭)’을 찾아 길을 나선다. 성주(星州) 땅이다. 대구의 서쪽이며 구미의 남쪽이니 지금 경산에 포함된 하양에서는 서쪽으로 말 타면 한나절에 다녀올 만한 고장이었다. 성주로 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한 번 말을 던져 본다. “성주(星州)를 아시나요?” “아, 참외 나는 곳요?” “예에, 더 생각나는 것 있으세요?” 그 뒤는….

우리 시대 사람들은 유명 관광지가 아니면 (역사)지리 지식이 많이 짧다. 굳이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은 없다. 옛 우리 조상들은 지식욕이 많았던 것 같다. 남승도(覽勝圖)라는 것이 있는데 전국 유명한 곳을 말판에 그리고 윷놀이 하듯 말을 놀아 전국을 유람하는 놀이였다. 심심할 때마다 요즈음 게임하듯 했으니 지리 실력, 역사 실력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어른들은 글씨만 썼고 아이들은 그림도 그려 말판을 만들었으니 흥미도 진진했을 것이다. 문득 성주를 가며 이 놀이가 떠오른다.

지금은 비록 작은 한 읍(邑)이지만 역사서나 지리서를 보면 성주는 작지 않은 역사적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編)을 보면 금관가야를 기록한 가락국기가 있고, 나머지 나라를 기록한 오가야(五伽耶)가 있는데 △아라(阿羅)가야: 지금의 함안 △고령(古寧)가야: 지금의 함녕 △大가야(지금의 고령) △성산(星山)가야: 지금의 京山이라 하는데 혹은 碧珍이라 하기도 한다(今 京山 一云 碧珍) △소(小)가야(지금의 고성)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지금의 성주, 즉 고려 때 지명 경산(京山)은 성산가야(벽진가야)가 있던 한 나라를 아우른 땅이었던 것이다. 연전(年前) 필자는 이른바 육가야(六伽耶)라고 부르는 위의 땅들과 가야 문명의 흔적이 역력한 남원, 전주를 묶어 가야 여행를 한 일이 있는데 이때 마주한 성산동 고분군(성산가야의 흔적)은 적지 않은 느낌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겸재 작 ‘쌍도정’. 
조선 시대에 인기 있었다는 ‘명승지 유람놀이’ 판. 

이런 성산가야는 신라에 병합되어 성산군, 벽진군이 되었다가 고려에는 경산주로 개칭되고 군도 되었다가 조선에 와서는 성주목(星州牧)으로 바뀐, 작지 않은 고장이었다. 고려 이조년(李兆年)의 증손자이며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 성산공(星山公)에 책봉된 이직(李稷)은 성산에 올라 시 한 수 읊었다.

登星山感古(성산에 올라 옛날을 생각함)
紫芝曄曄遍山陽 아름다운 풀 무성하게 산 양지 쪽 덮었는데
柔嫩新苗手摘嘗 부드러운 새싹 따서 맛본다오
因憶漢初商嶺老 한나라 초 상산(商山) 사호(四皓) 생각하건데
時淸何獨不勤王 때는 맑은데 어찌 임금 모시지 않았나.

성산 고분군들을 바라보며 이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산가야도 신라에 병합되고 고려도 사직을 다해 조선으로 바뀐 이즈음 옛 한나라 초 세상 어지러움을 버리고 상산(商山)으로 들어가 신선이 된 네 은사(隱士) 상산사호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현실참여에 나선 이들이 있어 그런가, 이곳에 관향(貫鄕)을 둔 성산(星山) 이씨들은 고려에 이어 조선의 명문가 중 한 가문이 되었다.

 

겸재의 그림에 따라 재현해 놓은 쌍도정.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성산가야 고분군 자료사진.

성주(星州)라는 땅 이름은 이렇게 성산(星山)에서 자연스레 온 지명인 듯하다. 1725년 쯤 하양 촌고을 현감 겸재는 대처 성주목에 와서 쌍도정(雙島亭) 그림을 그린다. 왜 대구의 달성(達城)도 그리고 성주의 쌍도정도 그린 것일까? 누군가가 하양에 와 있을 때 경상도의 명승을 그려달라고 주문을 한 것일까? 아니면 본인 스스로 경상도 여기저기 명승을 찾아다니며 그린 것일까? 이른바 영남첩에서 떨어져 나온 낱장일 것으로 여겨지는 쌍도정도이기에 제작 동기도 궁금하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성주 관련 지리지들을 보면 쌍도정은 후기(後期)에 이름만 잠시 보일 뿐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성주에서 유명한 정자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성주의 유명한 누정(樓亭)으로는 임풍루(臨風樓), 기운루(奇雲樓), 몽송루(夢松樓), 남정(南亭), 동정(東亭) 등이 앞섰는데 굳이 겸재가 쌍도정을 그린 이유도 궁금하다. 임풍루나 기운루도 그렸는데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복원된 성주읍성과 쌍도정

각설하고 쌍도정을 찾아나서도 성주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다행히 근년에 옛 성주성의 북문을 중심으로 성주읍성 일부를 복원해 놓았는데 그 앞 주차장 옆에 쌍도정을 재현해 만들어 놓았다. 옛것을 살려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읍성(邑城)은 옛날에 흙으로 쌓았다가 중종 15년에 돌로 고쳐 쌓았다. 선조 24년에 다시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6053척이고 둥근 성이다. 청동문(淸東門)에는 영춘루(迎春樓)가 있고, 북문 바깥에는 용흥사(龍興寺)가 있다”고 하였다.

 

재현해 놓은 성주사고.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지금 복원한 읍성은 석성으로서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성 안에는 옛 실록을 보관하던 실록각도 재현하고, 내부는 성주사고 역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자료 전시관을 겸하고 있다. 굿(good)!

실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네 곳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임진란에 전주본만 살아남고 모두 불탔다. 이 아픔을 겪은 후 다시 찍어 춘추관을 비롯하여,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에 깊이 간직한 역사가 있다.

읍성 아래쪽으로는 오래된 전각 충헌각(忠獻閣)이 자리 잡고 있는데 성주에서 사사(賜死)된 몽와(夢窩) 김창집을 기려 성주 유생들이 모신 전각이라 한다. 몽와는 김상헌의 증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장자로 ‘장동 김씨’ 가문의 적통이다. 그는 장희빈의 아들 경종 시절 연잉군(延仍君: 뒤에 영조)을 세자로 밀어 올리고, 대리청정을 둘러싼 정쟁(政爭)인 신임사화에서 역모로 몰려 거제도로 유배되었는데 후에 이곳으로 이배되어 사사(사약을 내림)되었다. 노론의 사회가 된 조선에서는 추앙받던 한 인물의 자취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앞쪽 언덕에는 이곳을 대표하는 가문인 성주이씨의 재실이 있고 시비공원(星州李氏 詩碑公園)이 있다. 고려와 조선조에 활약한 한 가문의 흔적이다.

 

복원해 놓은 성주읍성과 공덕비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김창집을 기리는 충헌각.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다시 성문 밖으로 나가 재현한 쌍도정을 바라본다. 성문 밖에는 이곳에서 백성을 다스린 목민관(牧民官)들의 공덕비가 줄줄이 서 있다. 어디를 가나 그렇게 공덕(功德)을 적은 비가 많은데 왜 백성은 굶주리고 힘들어야 했던 것일까?

공덕비 언덕에 앉아 겸재의 그림을 펼쳐 보며 재현한 쌍도정을 바라본다.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쌍도정은 조선 시대 성주관아의 객사인 백화헌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자의 이름으로 정선이 그린 그림을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재현하였다. 네모꼴 연못 속에 석축으로 싼 2개의 섬이 조성되어 있어 쌍도정이라 칭하며, 왼쪽 섬에는 나무만 심겨져 있지만 오른 쪽 섬에는 정자가 설치되어 있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선이 그린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되며 연못의 조성은 고산 윤선도가 성주고을 수령 재임시절(1634~1635)과 관련 있다고 추측한다. 쌍도정의 원래 위치는 현재 성주읍 경산리 관운사 앞에 있던 연못으로 추정되며 2020년에 현 위치에 재현하였다.”

두 섬 사이를 오가며 쉬는 정자

이제 겸재의 쌍도정을 보자. 우선 쌍도정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도의 공간이다. 인공으로 파낸 연못에 두 개의 섬을 만들었다. 쌍도정도의 별지로 전해지는 관아재와 사천의 제화시 중 사천(槎川)의 제화시를 보면 “물을 모아 연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섬을 만드니 모두가 사람의 공이다(畜水爲池 累石爲島 皆人功也)”라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연못은 사각으로, 섬은 원형으로 해서 두 섬을 만들었다 하면서 천원지방(天圓地方)에 음양(陰陽)을 나타냈다고도 했는데, 그림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연못도 모서리가 라운드로 된 사각이며 섬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연못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 때는 못은 사각, 섬은 둥글게 한다. 그런데 쌍도정은 섬으로 가서 시간의 한 때를 지내기 위한 활용 공간이었다. 다리를 건너서 정자에서 쉬고 또 하나의 섬을 소요했을 것이다. 동그랗게 만들기보다는 각지지 않은 둥그런 사각이 공간 활용에 편했을 것이다. 못 가장자리와 섬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정자 뒤에는 아마도 느티나무가 아닐까? 삼공(三公)의 품격에다가 그늘도 필요했을 테니까.

이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측 뒤쪽으로는 객사(客舍) 백화헌(百花軒)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초 신숙주는 백화헌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동갑내기 친구 김유선이 성주목사로 가서 동헌도 고쳐 짓고 객사 백화헌을 지으니 그 기록을 적은 것이다. 동문선에 전한다.

성주 백화헌 기(星州百花軒記)

신숙주(申叔舟)

읍(邑)에 관사와 공청을 두는 것은 사신을 존중하고 빈객(賓客)을 후대하려는 때문이니, 한 고을의 수령이 된 자는 마땅히 유의해야 할 바다. 읍이 비록 작고 땅이 비록 궁벽해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읍이 크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요지가 되는 곳에 있어서라. 성주(星州)의 읍을 세운 것은 신라의 초기였는데, 현(縣)에서 군(郡)이 되고, 군에서 부(府)가 되며, 부에서 주(州)가 되어 경토(境土)를 잃지 않고 오늘까지 내려왔다. 내려온 역사가 남주(南州)에서 가장 오래되어 무릇 세 곳의 현이 소속되었으며, 땅이 넓고 백성이 억세며, 주치(州治)가 더구나 한 도(道)의 중앙에 처하여 일사(馹使)는 연이어 오고 빈려(賓旅)는 몰려드는데, 관해(館廨)는 해가 묵어서 빈객과 사행(使行)을 접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법이 엄해지고 백성이 사나워져 무릇 한 고을의 수령이 된 자는 대개 모두 난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여 관해가 무너져내려도 앉아서 구경만 하며, 돌 한 덩이 기와 한 장이라도 다시 수리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며 전임되기만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나의 동년(同年) 김유선(金有銑) 군이 목사가 되어 1년이 못 가서 정치는 성숙하고 일은 간편해지자 한탄하여 말하기를, “성주는 남방의 큰 읍이요. 지세도 요충에 있는데, 관해가 이와 같으니 수령이 된 자가 이를 조처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법이 비록 엄하지만 법을 범하지 않으면 법이 무엇이 두려우며, 백성이 비록 사납지만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 어찌 백성을 꺼려하랴” 하고 재목을 모으고 공장(工匠)을 명하여 먼저 정청(正廳)의 동헌(東軒)을 짓되 옛 제도를 그대로 따라 약간 넓히기만 하였다. 그래서 몇 달 안 되서 끝마치니 모두 2영(楹)이다. 앞쪽은 횡무(橫廡)가 있어 밝게 탁 트였으며, 뜰 앞에 화단(化壇)을 만들어 온갖 화초를 심고 따라서 이름을 백화헌(百花軒)이라 하고, 이어 사환을 보내어 편지로 기를 청하였다. 내 일찍이 군이 의주(義州)의 원이 되었을 때 보니, 알고서는 행하지 않는 바가 없어 조금도 태만한 기색이 없었다. 의주의 땅이 중국과 연결되어 사행(使行)이 모이고 장사꾼이 몰려드는 곳으로 다스리기 어려운 데라 일컬어지는데, 군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여유만만하였다. 우리 친구 김자호(金子顥) 씨가 사람에 대하여 허여하는 바가 적은데, 그가 영남을 안무(按撫)하고 돌아올 적에 남주(南州)의 치적을 물어보니, 군을 들어 제일로 삼으며 하는 말이, “다스리는 일에 부지런하고 과감하게 일을 추진한다” 하였다. 김자호 씨의 말도 내가 전일에 본 바와 서로 같았는데, 지금에 와서 어찌 징험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매양 자호 씨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슬픈 동시에 그 말을 생각하면 더욱 군을 믿게 된다. 무릇 일이 없을 때를 당해서는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법을 어기지 않는 자가 그래도 적지만, 크나큰 공사를 일으켜서 남이 감히 하지 못하는 바를 하면서도 능히 이와 같으니 이 어찌 내력이 없겠는가.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은 것은 인(仁)이요, 법을 어기지 않는 것은 의(義)요, 태만하지 않는 것은 근(勤)이요, 과감한 것은 민(敏)이니, 인의(仁義)는 덕의 집이요 몸의 보금자리이다. 이것으로써 자처하고 근민(勤敏)으로써 행동하면 무엇인들 되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 하나의 헌(軒)뿐이랴. 김 군은 부디 힘써서 김자호 씨가 알아준 것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여 내가 군을 믿는 마음에 부응하기를 바란다. 나는 공명(功名)으로 세상을 속인 지가 오래이므로 바로 사직하고 남으로 돌아가려 한다. 내 고향이 성주와 접경이니 혹시 한 번이나 빈석(賓席)에 참여하게 된다면 헌(軒)의 경치에 대하여는 장차 군을 위하여 다시 짓겠다.


(기존 번역 전재)

星州百花軒記

邑之有館舍廨宇. 所以尊使命. 厚賓客也. 爲邑守者. 所當留意也. 邑雖小. 地雖僻. 尙然. 况邑大而爲四方所會乎. 星州建邑. 自新羅之初. 縣而爲郡. 郡而爲府. 府而爲州. 不失境土. 以至于今. 歷年在南州爲最久. 凡三屬縣. 地大民豪. 州治又居一道之中. 馹使交至. 賓旅輻湊. 而館廨歲久. 不足以接賓客待使命也. 然近年以來. 法嚴民悍. 凡守邑者. 率皆以興作爲戒. 坐見館廨頹毁. 雖一石一瓦. 不復修整之. 袖手而待遞. 吾同年金君有銑爲牧. 未期. 政成事簡. 嘆曰. 州爲南方巨邑. 地在要衝. 而館廨如是. 爲守者. 不爲措意. 可乎. 法雖嚴. 不犯法. 則何畏於法. 民雖悍. 不煩民則何憚於民. 於是. 鳩材命工. 先構正廳之東軒. 因舊制而廣之. 不數月而訖功. 凡二楹. 前有橫廡. 明朗開豁. 庭除有序. 植之雜花. 因名之曰百花軒. 乃遣使馳書請記. 僕嘗見君之倅義州也. 知無所不爲. 孜孜焉不怠. 義之爲州. 境連上國. 使命所集. 商賈所趨. 號爲難治. 而君游刃裕如. 吾友金公子顥氏. 於人少所許可. 其按嶺南而還也. 問南州之治. 則擧君爲第一曰. 勤於治事. 敢於有爲. 子顥氏所言. 與僕前日所見悉同. 今而豈不驗哉. 每悲子顥氏之不可復見. 則思其言而益信乎君. 夫當無事之時. 不煩民. 不犯法者. 尙鮮矣. 興大工作. 爲人所不敢爲. 而能如是. 是豈無所自歟. 不煩民. 仁也. 不犯法. 義也. 不怠勤也. 敢爲敏也. 仁義德之府也. 身之葆也. 以此自處. 而行之以勤敏. 何所爲而不可. 矧玆一軒乎. 金君其勉之. 其毋孤子顥氏之知. 以副僕之信乎君者. 叔舟功名欺世且久. 正欲謝事南還. 吾有鄕與州接境. 倘得一參賓席. 軒之勝槩. 將爲君賦之.

후에 김득신도 백화헌기를 남겼는데 여기에서는 소개하지 않는다. 백화헌에는 이름만큼이나 꽃이 아름다웠나 보다. 후에 송암 권문호는 백화헌에서 시 한 수 적었다.

百花軒次贈 백화헌에서 차운하여 드림
奇香怪色滿階栽 기이한 색과 향기 꽃 계단 가득 심었네
華席芳罇幾度開 멋진 자리 만들어 향그러운 술 모임 몇 번 열었던가
雨細花明春半老 가랑비 속 꽃이 피더니 봄은 반쯤 지나가고
好隨蜂蝶共徘徊 즐겁게 벌 나비 따라 함께 배회했네

이제 다시 쌍도정도로 돌아가자. 뒷담 밖으로는 민가들이 보인다. 민가와 뒷산 사이로는 읍성의 성벽이 있었을 터인데 달리 표현하지 않은 듯하다. 산은 쌍도정과 어울리게 우뚝하기는 하되 먼 거리에서 편안하다. 동국여지지와 성주읍지를 보면 이 산들을 짐작할 수 있다. 읍의 북쪽에 기록된 산들을 보자.

가장 가까이 보이는 산이 현령산(懸鈴山)이다. 북쪽 3리(在北三里)에 있다 하였다. 그 뒤가 인현산(印懸山)으로 읍 북쪽 9리에 있다 하였다. 성주의 진산(鎭山)이다. 그 뒤로 각산(角山, 15리), 선석산(禪石山, 20리), 성산(城山, 20리)이다. 성주라는 이름을 낳은 성산(星山)은 남쪽 5리(在州南五里)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쌍도정도는 겸재의 정성이 가득 보인다. 만년의 걸작들에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필법은 쓴 그림이 많은 반면 쌍도정도에는 중년의 섬세함이 가득하다. 가는 붓놀림의 정성에 그림을 대하는 필자의 마음도 단정해진다. 연구자들이 이야기하는 남종문인화의 느낌이 이런 것인가 보다.

 

옛 지도의 연못 위치.
성주의 현재 지도. 
성산 이씨 가옥인 한주종택에는 쌍도정과 비슷한 작은 연못이 남아 있다. 자료사진

쌍도정의 원래 위치는 이곳을 오래 전에 찾아 보았던 유홍준 선생의 ‘화인열전’이나 2010년 강좌 ‘우리 문화유산을 보는 눈’에서 언급한 성주 버스 터미널 자리일 것이다. 필자가 인용한 성주 옛 지도와 같이 객사와 연못은 성 안에 있는데 연못은 객사 서남쪽으로 자리한다. 객사는 백화헌이며, 연못에는 쌍도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남쪽으로는 남문이 있고 남문 밖으로는 관왕묘가 자리 잡고 있다. 다행히 지금도 관왕묘가 그 자리에 있으니 성벽과 성문은 모두 없어졌지만 백화헌과 쌍도정 자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옛 버스 터미널 자리, 지금은 한창 재건축 작업 중인 ‘창의문화교류센터 버스 택시 승강장’ 자리가 맞을 것이다.

 

성주 관왕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성산 이씨 가옥인 한주종택에는 이 쌍도정을 비정할 수 있는 작은 연못이 남아 있다 하니 이곳에서 쌍도정을 그리는 마음을 달래어 볼까. 쌍도정도는 다행히 리움(Leeum)에서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모두 기증되었을 것이다. 언제 이 그림이 전시되기를 기다리면서.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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