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9호 김금영⁄ 2022.08.02 11:00:59
전시장 내부뿐 아니라 건물 외벽까지 거대한 장미가 활짝 피었다. “예술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다”고 말하는 작가 셰퍼드 페어리가 동시대의 문제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방식이다.
롯데그룹의 첫 공식 미술관인 롯데문화재단 롯데뮤지엄이 도시 예술을 기반으로 광고, 선전 그래픽과 사회적 메시지를 결합해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펼치는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셰퍼드 페어리, 행동하라!’를 7월 29일~11월 6일 연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30년간 예술적 궤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초기작부터 영상 협업, 사진 자료, 신작, 벽화까지 작품 47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 중 하나가 장미다. 전시장이 위치한 롯데월드타워 외벽뿐 아니라 이번 전시 포스터에서도 ‘아이즈 오픈(EYES OPEN)’이라고 적힌 둥그런 형체 위에 장미가 꽃을 활짝 피운 모습이 발견된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생명력을 불태우는 듯한 빨간 이미지가 강렬하다. 장미는 작가의 작품 속에서 유기적 아름다움과 타고난 강인함을 뜻하며, 회복력 있는 생명체로 묘사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눈을 뜨고, 마음을 열라(EYES OPEN, MINDS OPEN)’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작품에 장미와 더불어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대표적인 문구다. 인종과 성차별, 각종 혐오 범죄, 환경파괴 등 동시대의 문제점들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고, 바로 마주하며 생각하라는 권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한다. 마치 평화를 꽃피운 장미처럼.
이렇게 작가가 동시대 문제에 주목하는 건 그의 작업의 뿌리가 권외와 관습에 저항하고, 자유를 갈구하는 비주류 문화로부터 비롯된 영향이다.
1970년대 후반 유행한 펑크 록, 그래피티, 힙합, 스케이트보드는 작가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특히, 스스로 일어나 저항해야 한다는 펑크의 ‘DIY(Do it yoursels)’ 정신은 그의 예술적 철학 구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7월 28일 롯데뮤지엄 전시 현장을 방문한 작가는 “펑크 록과 힙합은 기교보다는 독창성과 창의성이 중심이 되는 반항적인 아웃사이더 문화”라며 “이 두 문화가 지닌 ‘직접 내 스스로 하는’ DIY 철학은 제가 기여하는 부분이 아무리 미숙하고 미미하더라고 ‘일단 한번 해보자’고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작은 스티커가 불러온 거대한 나비효과
작가의 본격적인 작업의 시작은 갤러리, 미술관이 아닌 길거리에서 이뤄졌다. 아티스트로서의 기반을 다진 건 ‘거인 앙드레에게는 그의 패거리가 있다’는 스티커 작업부터다.
1989년 프랑스 전설의 거구 프로레슬러 앙드레 르네 루시모프의 초상을 모티브로 제작한 스티커로, 대학교 재학 시절 스케이트보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제작했다. 당시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큰 벌을 받지 않은 한 정치가의 사진을 앙드레의 얼굴로 바꿔 스티커로 제작한 뒤 여러 곳에 붙였다.
처음 티셔츠와 스케이트보드 등에 소박하게 붙었던 스티커들은, 스케이트보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더니, 결국 미국 전역의 많은 도시에까지 퍼졌다.
결국 사람들은 자연스레 해당 정치가의 이슈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작은 스티커가 불러온 거대한 나비효과였다. 작가는 “이 작은 스티커들이 내겐 예술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이후 이 작업은 영화 ‘화성인 지구 정복’(1988)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오베이(OBEY)’ 슬로건과 함께 배치되며, 예술적 실험인 ‘오베이 자이언트(OBEY Giant)’ 캠페인까지 확대됐다.
오베이는 작가 작업의 대표 슬로건이자, 작가가 만든 의류 브랜드명이기도 하다. 당시 작가는 캠페인 과정에서 재물 손괴 혐의로 여러 차례 경찰에 체포됐는데, 대중의 관심이 커지자 아예 이를 의류 브랜드로 론칭해 버렸다.
오베이는 직역하면 ‘복종’이지만, 작가는 역설적으로 ‘저항과 불복종 정신’을 이야기했다. 결국 오베이 자이언트 캠페인은 세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의미들이 숨어있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는 “스티커 작업이 오베이 자이언트 캠페인까지 발전할지 예상하지 못했다”며 “당시 제 작업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었고, 사람들이 제가 펼친 다양한 공공 캠페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이런 끊임없는 소통이 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2008년 미국 대선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의 초상화 포스터 ‘희망(HOPE)’도 유명하다. 30만 장의 포스터와 50만 장의 스티커로 제작된 이 작품은, 오바마 캠프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하며 강력한 아이콘이 됐다.
오바마 당선 이후 ‘희망’ 포스터는 다른 이미지로 제작돼 2008년 미국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 포스터가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이후 작가가 2020년 발표한 포스터 ‘저스트 엔젤 라이징(Just Angel Risint)’은 타임지 역사상 처음으로 표지 제호가 ‘타임(TIME)’이 아닌, ‘투표하라(VOTE)’로 변경돼 화제가 됐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라”
오베이 자이언트 캠페인으로 동시대 다양한 이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메시지를 던져 온 작가는 이번엔 국내 관람객과 마주한다.
한국에서의 전시를 기념해 ‘환경과 희망’을 주제로 서울 지역 5곳에 대형 벽화를 제작하는 캠페인을 진행한다.
롯데뮤지엄 측은 “이번 캠페인은 ‘메이크 아트 포 어 베러 월드(Make Art For A Better World)’ 슬로건을 앞세워 문화예술을 통해 가치 있는 생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실현하고자 한다”라고 목적을 밝혔다.
서울의 주요 도심지인 석촌호수, 롯데월드타워·몰, 성동구, 강남구 도산대로 총 5군데의 거대한 벽에 작가가 직접 그림을 그렸다.
전시장을 벗어나 서울 길거리 곳곳을 채운 벽화는 작가의 작업이 시작된 미국 전역의 길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공공장소에 벽화를 그리는 건 제게 무척 중요한 작업”이라며 “예술은 대중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벽화의 규모는 자연스럽게 화제가 되고, 벽화를 통해 도시가 개인의 표현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고 벽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롯데월드타워 외벽에 커다란 평화의 장미를 내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작가는 “단지 전시장 내부에만 작품을 거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전시장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작업했다”며 “항상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되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캠페인에서 작가는 환경을 비롯해 인권 등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동시대의 문제들을 누구의 강요 없이 각자가 능동적으로 인식하게 하게끔 돕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의 한 걸음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펜데믹(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 그로 인한 경제 침체 및 전쟁과 기후 문제까지 등 전 세계적 이슈로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면서 동시에 ‘눈을 뜨고 마음을 열라’고 계속 강조한다.
그러면 현시대 복잡하게 얽힌 인종과 성평등, 환경 등 여러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첫걸음인 서로에의 존중이 시작되고 궁극적으로 평화에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작가의 한결같은 신조다.
“제 작품에 되풀이되는 원칙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내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을 지지합니다. 그래서 인종과 성평등, 지구에 대한 존중, 이민 신분이나 종교를 불문한 인간의 기본 존엄성에 대한 존중 등 제가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적 이슈에 이를 적용합니다. 또, 우리는 지구를 아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도 더 이상 우리를 돌봐주지 않을 것입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