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9호 김금영⁄ 2022.08.04 10:22:40
학고재가 7월 27일부터 8월 21일까지 정영주 작가의 개인전 ‘어나더 월드(Another World)’를 연다. 작가가 학고재에서 여는 첫 전시다. 2018년부터 올해까지 제작한 작품 28점을 본관 및 오룸에서 선보인다.
작가는 어린 시절 가족과 살았던 달동네 풍경을 작업의 소재로 삼는다. 그의 기억 속 달동네는 일과에 지친 이들의 안식처이자,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보금자리였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 한지를 오려 붙이는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서로를 의지하듯 기대고 서있는 판잣집의 형상을 종이로 빚어낸 뒤 물감을 채색하는 방식이다. 처음 화면은 소박한 동네의 분위기를 드러낸다. 그 위에 불빛을 더해 작품을 완성한다.
좁은 골목길을 따스하게 밝힌 가로등 불빛이 가족의 온기와 고향의 정감을 자아낸다. 이번 전시의 서문을 쓴 미학자 이진명은 “정영주 작가는 정서의 회복과 회화의 복권을 위해서 화폭 안 세계에 빛을 밝힌다”고 했다.
작가가 집을 소재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무렵이다. 작가는 프랑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부득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깊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때 새삼 눈에 띈 것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산동네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유년기를 보낸 부산에서 숱하게 보아온 풍경이기도 했다.
작가는 작고 초라하지만, 그러나 서로에 기대어 서 있는 집과 골목에 밝은 불빛을 그려 넣었다. 산동네를 내일을 꿈꾸는 보금자리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그의 회화 속 풍경은 대부분 밤을 주제로 한다. 작가의 회화는 스산하고 어두운 밤 풍경이 아니다. 따스한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풍경이다.
그 불빛 아래 오손도손 얘기 나누는 가족의 행복이 있다. 맞붙은 집들의 대문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나올 것 같고 골목에선 밥 익는 냄새가 피어오른다.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고향집이다.
미학자 이진명은 서문에서 “고향이라는 개념 자체에 인정과 베풂, 나눔, 공감 등 토대적 정서가 내포돼 있다”며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유대를 영원히 그리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숙명일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작가의 그림을 보며 느끼는 노스탤지어는 결국 자신의 근원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언제든 문 열고 반겨주는 고향집 풍경이 전하는 위로
작가의 회화는 사진과 실물이 확연히 다르다. 저부조로 빚어져 실제로 보았을 때 3차원적인 생동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종이를 천천히 빚고, 한 겹 한 겹 쌓아 올린다. 그렇게 입체적으로 완성된 집의 형상에 색채를 입힌다. 마지막으로 화면 곳곳을 비추는 빛을 그리면 마침내 한 점의 작품이 완성된다.
이 단계들을 모두 거쳐야 해서 단숨에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출품작 ‘어나더 월드’는 완성까지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어나더 월드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 가장 큰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는 빛의 길을 통해 작품 전체를 길을 따라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작가는 200호라는 큰 캔버스에 작은 집을 배치해 다른 출품작보다 많은 수의 집을 표현했다.
또 다른 작품 ‘산동네 111’은 작가가 꾸준히 표현하고 있는 산동네 시리즈 작품이다. 기존의 작품에서 잘 보이지 않던 중앙의 상단부를 기준으로 풍경이 소실점을 향하도록 그려졌다. 화면의 양옆에 있는 산등성이와 가운데에 배치된 집들이 원근법을 극대화한다.
하늘을 표현한 형태도 독특하다. 작가는 작품 속 집의 풍경과 하늘이 만나는 지점을 동이 트는 하늘처럼 하얗고 노란빛으로 표현해 마치 바다의 수평선처럼 보인다.
한여름 전시장에 펼쳐진 ‘설경 0125’도 눈길을 끈다. 눈 내린 판자촌을 작가 특유의 화풍으로 구현했다. 눈 쌓인 판자촌 위에 오후의 햇살을 그렸기 때문에 눈 덮인 풍경이지만, 차갑기보다는 오히려 따뜻함이 느껴진다.
‘여름밤 620’은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부산의 달동네가 모티프다. 그가 유년 시절 골목마다 볼 수 있었던 빛나는 창문과 가로등 불빛이 화면 위 펼쳐진다.
화폭의 골목길은 마치 과거의 기억으로 들어가는 길처럼 작용한다. 이전 작품에 있던 보름달과 다르게 이번 출품작들은 초승달이 그려져 있다. 보름달이 충만과 희망의 인상을 줬다면, 초승달은 아직 더 채워야 할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허름하지만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정겨운 느낌을 준다. 이런 풍경을 흔히 접하지 못했을 MZ세대 역시 작품을 보고 유사한 감동을 받는다는 점에서 예술의 힘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제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지치고 힘들 때 돌아가면 언제든 문 열고 반겨주는 고향집 같은 편안함을 얻게 하고 싶다”고 작가노트에서 말했다. 고향의 풍경 같은 작품을 통해 관람객도 동일한 감정을 느끼길 바라는 그의 마음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학고재 측은 “팬데믹 이후 비대면·비접촉 교류 방식을 뜻하는 ‘언택트(untact)’는 사회의 필수 요소이자 미덕처럼 여겨지게 됐다”며 “인터넷에서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빠르게 마주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되려 ‘실제로’ 마주해야 하며, ‘천천히’ 만들어진 정영주의 회화를 바라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곳에는 픽셀로 이뤄진 표면이 아닌 손으로 빚어낸 세계가 있다”며 “한지라는 재료에 천착한 작가의 작품에는 동양적 미학이 드러난다. 화려하거나 최첨단의 기술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소담하고도 단단한 정서의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