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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현장] 배달 라이더가 달리는 길을 따라가면…김아영, '문법과 마법'전

갤러리현대서 다음달 14일까지…영상·조각 등 신작 11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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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금영⁄ 2022.08.16 15:15:45

김아영, ‘딜리버리 댄서의 구’. 1 채널 영상, LED 패널 영상 2, 약 24분. 2022. 사진 = 갤러리현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길을 걸어 들어간 전시장. 그 안에 마련된 대형 스크린 영상 속에도 비가 오고 있었다. 방금 지나온 현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세계가 머릿속에서 뒤엉키는 오묘한 기분.

갤러리현대가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수많은 세계의 존재 가능성에 접근하는 김아영 작가의 개인전 ‘문법과 마법’을 8월 10일~9월 14일 연다. 작가는 영상, 사운드, 퍼포먼스, 소설, 텍스트 등 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특히 사변소설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게 특징이다.

 

사변소설은 실제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장르로, 과학기술 명제성의 제한을 받는 SF 소설보다 폭넓은 점이 특징이다. 지난 2018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던 ‘이마 픽스(IMA Picks)’전에서도 작가는 사변소설을 토대로 한 작업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당시 작가는 “사변소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이야기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기이한지 깨닫게 한다”고 말했다.

 

김아영 작가. 사진 = 김금영 기자

이 이야기들의 중심엔 작가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이동’이 있다. 그가 이동에 관심을 가진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인간은 긴 역사 속 무수한 이동을 반복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침범하고, 이민과 이사를 하기도 하며, 사소하게는 집 앞 편의점을 가고, 출퇴근, 등교를 하는 등 끊임없이 이동을 반복한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전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폭넓은 이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이번 ‘문법과 마법’전에선 좀 더 이야기를 가까이 가져왔다.

 

김아영, ‘딜리버리 댄서의 구’. 1 채널 영상, LED 패널 영상 2, 약 24분. 2022. 사진 = 갤러리현대

가상의 세계가 배경이라는 점은 같지만, 지하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24분가량의 영상 작품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 극 중 인물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다소 익숙해 보이는 도시를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동의 목적은 ‘배달’이고, 인물이 달리는 곳은 가상의 도시 서울이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마치 하나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여성 배달 라이더 ‘에른스트 모’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배달 플랫폼 ‘딜리버리 댄서’의 소속 라이더다.

 

이곳에서 라이더는 댄서로 지칭된다. 댄서는 일반 댄서, 파워 댄서, 마스터 댄서, 신의 댄서 순으로 계급화돼 구분되고, 최상의 능력자는 고스트 댄서로 분류된다. 에른스트 모는 고스트 댄서다.

 

김아영, ‘고스트 댄서 A’. 헬멧, 영상, 태블릿, 전선, 주름관, 체인, 가변크기, 영상 약 3분. 2022. 사진 = 갤러리현대

고스트 댄서가 달리는 길은 일반적이지 않다. 더 빠른 배달을 위해 축지법을 쓰듯 시공간을 축약하고 비튼다. 어느 날 이 비틀어진 시공간의 틈 속을 달리던 에른스트 모는 자신의 세계와 완벽하게 똑같은 또 다른 세계에 다다르고, 이곳에서 자기 자신과 완벽하게 닮은 ‘엔 스톰’과 만난다.

그런데 도플갱어와도 같은 이 존재를 만날 때마다 자꾸 공간은 무거워지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 배달에 늦기 시작한다. 이에 따른 페널티 누적으로 고스트 댄서에서 점차 추락할 위기에 놓이고, 엔 스톰과의 갈등도 쌓여간다.

실제 배달 현장 동행…현실서 출발한 이야기에 상상 더해

 

‘고스트 댄서 A’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김아영 작가. 사진 = 김금영 기자

마치 가상의 세계에서만 있을 법한 이 이야기는 의외로 굉장히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작가의 실제 경험과 인터뷰 내용이 토대가 됐기 때문. 그는 사변소설에 접근할 때 가상의 내러티브 구조에만 치중해 사변적 상상에 빠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적 이슈를 담기 위해 신경 쓴다. 이 점이 특히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진다.

작가는 “코로나19 펜데믹으로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해외에 나가지 못하고, 국내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펜데믹은 배달 시장의 폭증을 불러왔다. 배달을 위해 달리는 오토바이들이 길거리마다 흔히 보인다.

 

특히 ‘더 빠른’ 배달을 위해 지역 간 이동 최소화를 위한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며 “한 베테랑 여성 배달 라이더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실제 배달 현장에도 동행했다. 이를 토대로 이야기를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세 개의 조각 ‘궤도 댄스’ 연작에 대해 김아영 작가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 = 김금영 기자

배달 라이더들이 더 빠른 배달을 위해 경쟁하며 달리는 길들이 마치 아름다운 춤의 움직임처럼 보이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이 모습이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처음 시도한 조각 작업 ‘궤도 댄스’로 구현됐다.

 

그는 “분리되지는 않지만, 또 따로 놀기도 하는 이 하나의 구조물은 딜리버리 댄서들이 끊임없이 달리는 경로임과 동시에 지독하게 얽힌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의 관계를 상징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작품이 플랫폼 노동자 현실을 고발하는 게 목적은 아니다. 현실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을 만나 또 다른 이야기의 물꼬를 튼다. 특히 작가가 오래 관심을 두고 연구한 가능세계론과 접목한다.

 

가능세계론에 따르면, 이 세계는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세계 중 하나다. 그렇기에 또 다른 세계엔 자신과 완벽하게 똑같은 또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있다. 마치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처럼. 앞선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전의 주인공 페트라 제네트릭스(이하 페트라) 또한 이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자신과 만난 바 있다.

 

2층 전시장의 양 벽면을 뒤덮은 거대한 월페이퍼 작업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 사진 = 김금영 기자

당시 작가는 “이 세상 유일한 존재로 있고 싶어 하는 인간이 자신과 정신적으로 연결된 똑같은 존재를 봤을 땐 어떤 감정을 느낄까? 거기에서 조화가 발생할지, 또 다른 균열이 발생할지 궁금하다”고 한 바 있는데,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한 작가의 행보가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은 영상 말미에 이르러 서로 치고받으며 갈등이 극대화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이야기의 결말을 정해놓지 않고 다양한 상상의 가능성을 펼쳐 놓았다.

 

헬멧이 서로 노려보듯 바라보는 구조가 눈에 띄는 ‘고스트 댄서 A’, 이 작품의 연장선상인 ‘고스트 댄서 B’, 그리고 2층 전시장의 양 벽면을 뒤덮은 거대한 월페이퍼 작업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여성들 사이 관계를 이야기할 때 우정 등으로 맥락화 할 때가 많은데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의 관계는 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관계”라며 “서로 대립하는가 싶지만, 여기에 존재하는 뒤틀린 애정 등 퀴어한 관계의 가능성도 열어뒀다. 고스트 댄서 B의 경우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공격하는 것인지, 넘어진 상대방을 일으키며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고스트 댄서 B에서는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공격하는 것인지, 넘어진 상대방을 일으키며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 = 김금영 기자

파국인지, 구원인지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는 인물들 사이 관계는 극 중 겹치고 겹친 여러 세계의 다층적인 구조와도 맞물린다. 그만큼 상상의 가능성도 더욱 증폭된다.

이 이야기들을 돋보이게 하는 화면 구성도 눈길을 끈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현실의 풍경을 촬영해 보여주는가 하면, 3D 합성 기법을 활용해 현실의 풍경을 재배치하기도 하고,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 화면들도 이어진다. 마치 다양한 현실의 화면들이 한 영상에 봉합된 느낌이다.

작가는 “지난해 1인용 VR(가상현실) 체험을 하면서 게임엔진(게임 개발 시 주로 사용하는 기능들을 모아놓은 프로그램) 툴을 접하고 새로운 작업의 가능성을 느꼈다”며 “비 내리는 도시의 도로와 골목을 횡단하는 에른스트 모의 실사 촬영을 중심으로, 볼류메트릭(4K 수준의 카메라 수백 대를 갖춘 크로마키 배경 스튜디오에서 인물의 움직임을 캡처해 360도 입체 영상으로 만드는 기술) 3D 인물 스캔, 게임엔진, 디지털 아바타 제작 등을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이를 실사 촬영 장면과 비연속적으로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현실과 가상 세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이런 작업 방식은 우리가 믿어 왔던 모든 사실이 흔들릴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또 다른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하지만 거기에 명확한 답은 없다. 가능성을 닫지 않고 계속 새로운 상상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이야기꾼’ 김아영이 작업을 풀어내는 방식이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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