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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현장] 허수영 작가가 한 그림에 10년 넘게 붓질한 이유

"그림은 노동으로 만들어진다"... 학고재서 6년 만에 개인전, 최근작 포함한 회화 23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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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35호 김금영⁄ 2022.10.24 14:00:41

허수영 작가. 사진=김금영 기자

‘완벽주의자.’ 허수영 작가의 작업 방식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이었다. 학고재는 작가의 근작을 포함한 회화 23점을 설치했는데, 이중 2010년에 그리기 시작해 올해가 돼서야 붓을 놓은 작품도 있다. 전시장 초입에 위치한 ‘버섯’이다.

본래 버섯 도감 작업으로 시작했다가 식물이 있으니 주변에 벌레를 그리고, 거기에 또 식물을 그리고…. 그러다보니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화면이 빽빽하게 채워졌다. 이유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작가는 “그림이 마음에 들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린다. ‘봄부터 겨울까지 그리자’, ‘도감을 참고해 그릴 땐 책 마지막장을 넘길 때까지만 그리자’ 등 나름대로 자신만의 원칙을 정해놓아도 손을 자꾸 대게 되더라”며 “‘정말 더 이상 못 그리겠다’는 지점이 올 때까지 꾸준히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허수영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학고재. 사진=김금영 기자

실제로 우정우 학고재 실장이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면 작가는 캔버스 앞에 앉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허술한 완벽주의자.’ 작가의 작업 방식에 대해 더 들었을 때 두 번째로 든 생각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 속 기준치에 도달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울 것 같은데 또 그렇진 않다.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여기엔 이걸 그려야지, 이런 그림을 그려야지 계획을 세워두고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라며 “어제 한 일도 잘 까먹는다. 그래서 오늘 할 일도 계획을 철저히 세우는 편이 아니다. 한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그 끝이 언제일지 나도 가늠이 안 될 때가 있다”고 말했다.

허수영, '버섯'. 캔버스에 유채, 162x390cm. 2010-2022. 사진=임장활

그런 그가 주목해서 그린 것들은 일상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꽃, 바다, 숲, 벌레 등이다. 이는 작가 삶이 반영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3년 전 조경기능사인 아내와 결혼하면서 생전 해본 적 없었던 정원 가꾸기를 시작했고, 그로 인해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식물, 벌레, 새, 흙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일상의 소재를 그리는데 정작 인물이 화면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서도 멀리서 봐야 깨달을 수 있는, 개미들로 뒤덮인 자화상 그리고 작가가 마다가스카에서 여행할 때 무수한 메뚜기떼를 발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벌레들에 휩싸인 아내의 모습을 담은 것이 전부였다. 이유를 듣자 작가에 대한 생각이 또 바뀌었다. 그는 ‘수행자’라고.

허수영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가운데 '양산동 05'가 걸려 있다. 2012년 입주했던 광주시립미술관 양산동 레지던시를 매년 찾아 10년에 걸쳐 그린 작품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식물, 벌레가 화면에 많다보니 이를 좋아해서 관심이 많아서 그리는 건지, 왜 사람은 잘 그리지 않는 건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며 “하지만 사실 그리는 대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면서 그곳에 함축되는 시간과 과정이 내겐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작가가 그림에 자꾸 손을 대는 것 또한 노동이자, 캔버스에 시간을 쌓는 과정 중 하나다. 본래 그렸던 그림 위에 또 다른 물감이 칠해져도 아래 깔린 그림의 시간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시간들은 한 화면에 함축되고, 캔버스는 다양한 시간을 지닌 초현실적 공간이 된다. 즉, 작가는 그림이라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수행하듯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대형 회화 ‘양산동 05’ 캔버스 뒷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2012년 입주했던 광주시립미술관 양산동 레지던시를 매년 찾아 10년에 걸쳐 그린 작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흔적을 찍었던 사진을 캔버스 뒤에 붙여 놓았다. 그 사계절의 시간이 ‘양산동 05’에 모두 함축됐다.

“100점의 그림 같은 1점의 그림을 그릴 것”

허수영 작가가 '양산동 05' 캔버스 뒷면을 보여주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흔적을 찍었던 사진을 캔버스 뒤에 붙여 놓았다. 사진=김금영 기자

일상 소재에서 시작된 그림은 현실을 넘어 초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무제 12’의 경우 실제로는 다른 나라와 기후 조건에서 살아 함께 존재할 수 없는 벌레, 새, 그리고 포식자와 피식자 관계가 한데 엉켜 있어 눈길을 끌었다.

관련해 우정우 실장은 “본래 같이 있기 힘든 존재들이 어우러진 화면은, 복잡하고 어려운 우리의 사회, 삶과도 닮은 것 같다”며 “그런 점에서 공감과 위안을 끌어내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허수영 작가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뒤에 개미 이미지로 뒤덮인 자화상과 메뚜기떼에 뒤덮인 인물을 담은 작품이 눈길을 끈다. 사진=김금영 기자

시간의 함축은 일상의 소재에서 우주로 범위를 넓혔다. 아내와 식물을 가꾸거나 키우면서 자연이라는 우주를 발견한 영향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이기도 한 ‘무제 20’은 언뜻 보면 꽃밭처럼 보인다. 그러다 면면이 들여다보면 작고 반짝반짝 빛나는 모래알들이 모여 있는 것 같기도, 작은 행성들이 모인 광활한 우주의 한 단면 같기도 하다.

작가는 “과학 서적에서 ‘우주의 은하와 별들은 모래알만큼 많다’고 하는데 상상이 되지 않아 그림으로 그려보려 했다. 많은 별들의 이미지를 찾아보고 참고하지만, 무한한 우주에 같은 별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 번도 조합되지 않은 색과 무늬를 상상해 별들을 그렸다”고 말했다.

허수영, '무제 12'. 캔버스에 유채, 80x250cm. 2022. 사진=임장활

그는 이어 “꽃밭 한가운데 있으면 우주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꽃 중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내가 현실에서 우주를 발견하는 방법”이라며 “레지던시에서 1년 동안 변화하는 풍경을 한 작품에 담았었는데, 별이나 우주는 1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압축해 담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우주를 겹치고 나열해 그려봤다”고 말했다.

봄과 여름이 생명을 꽃피우고 가을과 겨울엔 저무는 것처럼 우주 또한 무한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그리고 여기엔 흘러가고 쌓이는 시간들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그 시간을 노동집약적인 방식으로 작가는 묵묵하게 그려낸다. 그러면서 거기엔 또 작가의 시간까지 쌓인다.

허수영 작가는 일상의 소재에서 우주로 범위를 넓힌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왜 그렇게 힘들게 그림을 그리냐는 이야기도 듣는데, 작가가 개성을 표현하려면 어느 정도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겐 반복해서 그리는 행위”라고 말했다.

작가는 작가노트에도 “100점의 그림 같은 1점의 그림을 그릴 것”을 신념으로 강조하며 “그림은 노동으로 만들어진다. 노동은 표현의 정도를 결정하고, 표현의 정도는 시각적 강도를 결정한다”고 썼다. 이런 작가의 수행이 담긴 작품들을 전시에서 볼 수 있다.

허수영, '무제 20'. 캔버스에 오일, 200x450cm. 2022. 사진=임장활

이번 전시는 학고재가 주목한 젊은 작가의 전시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1984년생인 작가는 2016년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연 바 있다. 전시는 학고재에서 11월 19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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