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이 9일 밝힌 윤석열 대통령의 11월 중순 외교 행사 참석 일정을 보면서 겁이 더럭 났다. ‘어쩌려고 이러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동남아 방문 일정은 딱 4박이다. 11일 출발해 13일까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리는 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이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15일까지만 참석하고 16일 귀국할 예정이다. G20 정상회의는 16일까지 개최 예정인데 마지막 하루를 생략하고 귀국하는 일정이다.
반면 일본 기시다 총리의 방문 일정을 보니 윤 대통령의 4박 6일 일정보다 무려 두 배가 긴 8박 일정이다. 이는 기시다가 G20에 곧이어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은 G20 마지막 날을 생략하고, APEC 정상회의에는 아예 가지도 않는다.
윤 대통령은 가지 않지만 APEC 정상회의에는 시진핑 중국 주석이 참석할 것으로 예고되고 있다. 기시다와 시진핑은, 현재 여러 언론보도를 참고하면 G20와 APEC 4박 5일을 모두 함께하지만 윤 대통령은 G20 첫날만 함께하고 귀국한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는 어떨까? 바이든은 ASEAN과 G20에 참석하고 APEC에는 카멀라 라이스 부통령이 참석 예정이니 그래도 바이든과 윤 대통령은 기시다보다 하루 짧은 4박 5일을 함께 하게 된다.
어쨌든 한중일 3국 정상들의 행보를 비교하면 일본-중국은 동남아시아 외교에 부쩍 공을 들이는 반면, 윤 대통령은 절반을 생략하는 모양새다. 앞에서 말했듯 기시다는 프놈펜-발리-방콕으로 이어지는 동남아 외교 大랠리에 ‘풀’출석할 예정이고, 시진핑은 프놈펜에는 가지 않지만 리커창 총리를 행사 시작일 무려 3일 전에 프놈펜에 보냄으로써 캄보디아가 전혀 섭섭하지 않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방에 대한 정상 외교를 이렇게 상대적으로, 즉 일본이나 중국보다 한국이 덜 열심히 하고, 대폭 생략해도 괜찮은 걸까?
경제학 박사이기도 한 KBS 박종훈 기자는 8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박종훈의 경제한방’ 방송에서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이행 사태 등으로 한국의 금융 신용도가 국제적으로 박살이 나기 일보직전이었는데 다행히 미국 텍사스의 대형 연기금 등이 중국에서 뺀 거대 자금 중 일부를 한국에 분산투자함으로써 달러 환율이 전격적으로 떨어지고, 한국 채권시장도 일부 위기를 벗어나는 모양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세는 일시적이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한국 정부는 중국-러시아 등 對북방은 물론 동남아시아에 대한 對남방 경제협력을 서둘러 강화해야 한다. 탈(脫)중국부터 말할 게 아니라 준비를 하고 탈중국을 말해야 한다. 행운처럼 찾아온 이 소중한 시기를 놓친다면 어떤 경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경고였다.
한국 경제가 지금처럼 선진국 반열에 오른 데는 노태우 정권 시절 단행한 북방외교(중국-러시아와의 수교와 경제협력 확대)가 주역으로 꼽힌다. 중국이라는 거대 수출 시장의 존재, 그리고 러시아의 국방-우주 기술에 대한 협력 없이는 21세기 한국의 수출 경쟁력과 방위-항공 산업 실력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시부터 미-중의 갈등 양상이 빚어지면서 남방 외교는 더욱 중요해졌고, 그래서 직전 문재인 정부는 신남방 정책을 통해 동남아시아 및 인도에 대한 경협과 기업 진출을 강화했고, 그 성과는 남아시아에 대한 수출 증대라는 숫자로 나타난 바 있다.
현상이 이렇기에 기시다는 이번 주말부터 다음 주말까지 이어지는 동남아 외교 大랠리에 풀출석하는 것이고, 시진핑은 3기 연임 이후 동남아에 대한 적극 기여를 공언하고 있는 상태다.
APEC 회담에는 한국의 기업들과 투자자들이 애타게 방한을 기다리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빈살만 왕세자-총리가 참석할 예정이라고 태국 언론들은 전했다. 70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자본이 투하될 예정인 사우디의 네옴시팀 건설 사업 등에 한국 업체들이 꼭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원희룡 교통부 장관이 이달초 현지를 방문했는데, 빈살만과 윤 대통령의 정상외교가 생략되는 점도 한국 경제에는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윤 대통령의 해외순방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지난 두 번의 순방(6월의 나토 정상회의, 9월의 유엔 총회) 이후 지지율이 정체하거나 하락하는 기현상을 겪은 바 있다.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면 지지율이 오르는 일반적 현상이 윤 정권 들어 깨진 결과다.
윤 대통령이 ‘외교 참사’라는 비판을 들을 때 일부에서는 “계속 이렇게 비난하다가는 대통령이 해외 나가기를 꺼리게 되고 결국 그 손해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돌아온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이번 순방 일정을 보면 그런 우려가 현실화되는 모양새다.
해외에 나가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낯설고 힘들기 마련인데, 해외에 나갈수록 비판-비난을 받고 지지율마저 떨어진다면 해외 방문을 꺼리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순방 일정처럼 ‘일본 정상은 8박, 한국 정상은 4박’ 식으로 건너뛰어서는 정말 안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사태를 예상했는지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7일 KBC광주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태원 참사를 이유로 11월 중순의 해외 정상외교에 윤 대통령이 참가 축소를 검토한다는 일부 보도에 대해 “대통령실이 언론에 흘려 간보기를 한 것”이라며 “국내가 시끄러우니까 안 간다, 이건 아니다. 대북 문제, 경제 문제, 외교 문제를 대통령이 하셔야지, 상가만 쫒아 다닐 거냐, 그러면 안 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도 8일 K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이달 중순에 아세안 정상회의도 있고, G20 정상회의도 있고, 또 APEC 정상회의가 있습니다. 전부 다 동남아시아에서 열리거든요. 그런데 지금 아시다시피 북한 핵 위협, 미사일 위협이 심각하지 않습니까? 이런 거에 대해서 국제적인 공감대를 확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입장을 세계에 더 많이 알려야 되거든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대통령께서 가셔야 됩니다. 설사 우리가 남북 대화를 하더라도 한반도 문제를 제대로 인식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순방을 가야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