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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현장] 이기봉 작가, 희뿌연 안개 속 던지는 질문 “당신은 어디 서 있나요?”

국제갤러리 서울점·부산점서 12월 31일까지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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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37호 김금영⁄ 2022.11.25 09:35:14

이기봉 작가. 사진=김금영 기자

흐리고, 혼란스럽다. 이기봉 작가가 그려낸 화면들이 그랬다. 모든 풍경들이 선명하지 않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희뿌옇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이 서 있는 곳만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기봉 작가가 돌아왔다. 1986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뒤 국내뿐 아니라 지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단체전에 초청되고, 2012 폴란드 포즈난의 미디에이션 비엔날레, 2011 모스크바 비엔날레 등에 참여했으며, 독일 ZKM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등 세계를 누비며 활동을 이어오던 작가.

이기봉 작가는 안개 속 몽환적인 물가 풍경을 전시장에 펼쳐놓았다. 사진=김금영 기자

그런데 지난 10여 년 동안 유독 개인전 소식이 없었다.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도 2008년이 마지막이었다. 그랬던 작가가 무려 14년 만에 국제갤러리에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으로 돌아온 것.

 

작가는 “10년 전쯤 갑자기 모든 게 지겨워지면서 슬럼프가 왔다.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다. 나이가 드니 몸도 힘들었다”며 “자기비판의 시간도 오래 걸렸다. 더 이상 개인전을 열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이 정도에서 만족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렸다. 스스로에게 ‘움직이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2016년 교수직도 그만두고 다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기봉 작가가 14년 만에 국제갤러리에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으로 돌아왔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가 관심을 가진 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특히 본질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회화와 설치를 넘나들며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구조 및 흐름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실험해 왔다. 몽환적으로 묘사되는 화면이 대표적이다. 이는 작가가 작업에서 주요하게 활용하는 요소인 ‘물’과 연관됐다.

2003년 국제갤러리 개인전에서 작가는 푸른 물을 담은 수조를 통해 직접적으로 물의 형태를 드러내는 작업을 선보였다. 2008년 개인전에서는 물의 형태가 직관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안개, 수증기 등 보다 비유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특히 안개는 습한 산 중턱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30여 년 동안 작업을 이어온 작가의 조형언어로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이기봉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 작품에서도 안개가 적극 활용된다. 작가는 안개 속 몽환적인 물가 풍경을 전시장에 펼쳐놓았다. 그 풍경은 고요하다. 이는 작가의 마음과도 같다.

작가는 “작업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여러 생각이 흘러넘쳐 머릿속 질서가 깨질 때가 있다. 이 생각의 파편들을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정리했다”며 “생각이 많을 땐 세상의 모든 일에서 하나하나 정답을 찾으려 애쓰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존재하는 대로, 명확하지 않으면 명확하지 않은 대로, 버릴 것은 버리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희뿌연 안개 아래 숨어 있는 본질

이기봉 작가는 언어적 한계에 갇혀 세상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작품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글자가 발견된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철학 거장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영향도 받았다. 20년 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내용이 어려워 아직까지 읽고 있다는 책이다. 작가는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은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언어나 감각 등의 일종의 ‘막’을 통해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나 또한 우리가 살아가면서 세상의 본질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한계에 갇혀 일종의 환영을 본다고 생각했다. 이 철학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작가는 언어적 한계의 예로 사과를 들었다. 사과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사과 그 자체를 떠올리기보다 사과라는 글자의 모양을 자연스레 떠올린다는 것이다.

이기봉 작가는 캔버스 위에 약 1cm의 간격을 두고 플렉시글라스(얇은 아크릴 판) 또는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올려 두 개의 이미지를 덧댄 작업을 보여준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가 물을 작업 소재로 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눈앞의 물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물은 담겨 있는 장소, 기온과 습도의 변화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모습을 달리한다. 즉, 눈앞에 명확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던 존재의 본질을 확실하게 규정할 수 없다. 사과 자체의 본질보다 글자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작가의 생각은 2008년 국제갤러리에서의 전시에서 선보인 설치작품 ‘엔드 오브 디 엔드’에서도 드러났다. 동일한 텍스트가 수조 속을 유영하게 한 이 설치작품은, 인간의 사고를 명확하게 제시하기도,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하기도 어려운 언어의 한계를 보여주며, 실재에 다가가기 힘든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발췌한 텍스트를 캔버스 표면에 깔아 놓았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건 작가의 작업 방식이다. 그는 캔버스 위에 약 1cm의 간격을 두고 플렉시글라스(얇은 아크릴 판) 또는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올려 두 개의 이미지를 덧대었다. 보는 이는 하나의 그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플렉시글라스 막 뒤에 또 하나의 그림, 즉 본질이 숨어 있는 셈이다.

이기봉 작가의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희뿌연 안개는 사람들의 인식체계를 더욱 교란시킨다. 사진=김금영 기자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희뿌연 안개는 이 작업 방식과 맞물려 사람들의 인식체계를 더욱 교란시킨다. 플렉시글라스 뒤엔 맑은 날이 숨어 있는데, 안개로 둘러싸인 표면은 눈앞에 있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게 하고, 환영을 보게 이끈다.

하지만 이걸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작가는 “기차여행을 하다보면 자신이 움직이고 세상이 고정된 것인지, 그 반대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파악하려 해도, 언어적 구조 등의 한계로 세상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이것이 작업하며 내린 결론”이라며 “산다는 것은 혼돈 그 자체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스스로가 어느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봉 작가는 회화와 설치를 넘나들며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구조 및 흐름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실험해 왔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 또한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돌아보느라 10년의 시간을 방황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지점을 캔버스와 플렉시글라스 사이의 1cm 간극에서 발견했다. 그 간극에서 세상은 불투명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작가 또한 그 과정에 서 있다.

작가는 “당신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세계다.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지 말라”며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다른 효과를 감각하고,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결국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이 세상이다. 이 가능성을 열어두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국제갤러리 서울점 K1, K2와 부산점에서 12월 31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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