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0호 김금영⁄ 2023.01.18 11:56:49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어머니가 딸의 산바라지를 위해 제주도에서 상경하며 가져온 알반닫이. 아픈 관절로 먼 곳부터 무거운 것을 들고 왔다며 어머니는 역정을 냈지만, 알반닫이엔 옛 것을 좋아하는 딸을 향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알반닫이는 첫 아이가 태어나자 머리맡에 두고 배냇저고리와 기저귀를 담는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공간이 됐다.
이 알반닫이가 실제 전시장에 나왔다. 가나아트센터 1, 2 전시장에 1월 29일까지 선보인다. 가나문화재단은 ‘문화동네 숨은 고수들’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조형미술계 숨은 역군들의 활약상 정리를 출판 공익사업으로 진행해 왔는데, 이 일환으로 고미술 애호가이자 예나르 화랑 대표인 양의숙의 산문집 ‘진품 고미술 명품 이야기’ 출판 및 전시를 마련했다.
양 대표는 책에서 친정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제주 알반닫이를 비롯해 우리 민예품에 대한 열의로 발견하고 품어낸 경패와 염주함, 박천담배합과 채화칠기장 등을 소개하는데, 이중 40여 점을 직접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책 속 고미술품이 현실로 소환된 셈이다.
무려 26년 동안 ‘TV쇼 진품명품’(이하 ‘진품명품’) 감정위원으로 활동하고, 50년 역사를 지닌 화랑 예나르를 운영하며, 한국고미술협회 부회장직을 거쳐 현재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오랜 세월을 고미술에 빠져 지냈지만, 고미술 책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양 대표는 “1990년대 당시 책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원고지 500매 정도 글을 썼는데 만족스럽지 않았고 ‘이건 아니다’ 싶더라. 책 집필을 마치 숙제처럼 남겨두고 있었다”며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정리의 필요성을 느껴 다시 책 집필을 준비하던 중 출판사들로부터 ‘정보가 아닌, 당신의 이야기가 담긴 고미술 이야기를 쓰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바로 수 만 가지 정보가 나오는 시대에 아는 정보를 그저 열거하는 방식은 더 이상 독자의 흥미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양 대표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공개하기 부담스럽고, 마지막 보루라 생각해 간직하고 싶었다”며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고 느꼈고, 솔직하고 진솔하게 글을 쓰는 것이 오히려 자신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양 대표의 말처럼 책은 다양한 고미술품을 다루는데, 특히 그의 삶과 깊이 연관된 목공예품이 많다. 양 대표는 대학원에서 목공예를 전공할 정도로 일찍부터 목공예품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도자기, 회화사 쪽엔 책이 많은데 정작 우리 생활을 담은 목공예 분야는 조사 보고서 범위를 벗어난 책이 거의 없어 아쉬움이 있었다”고도 짚었다. 책엔 다양한 목공예품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양 대표와 얽힌 에피소드가 함께 소개된다.
예컨대 전시장 1층에 설치된 너 말들이 뒤주는 양 대표가 가장 처음 구입했던 목공예품이다. 두 살 터울인 아이들이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 쌀을 팔러 온 아주머니에게 쌀 너 말을 샀는데, 뒤주에 담아보니 양이 꽤 모자랐다. 쌀 뒤주는 계량이 정확해 오차가 있을 수 없었고, 결국 허겁지겁 뒤쫓아 나가 모자라는 양을 다시 확인하고 쌀을 더 받을 수 있었다.
전시장 2층에서 만날 수 있는 약과판은 양 대표가 ‘진품명품’ 출연 당시 감정했던 유물이다. 의뢰인은 “경북 안동에서 약과판을 구매했다”고 했고, 양 대표가 꼼꼼하게 살펴보니 150년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약과판이 방송에서 소개된 뒤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어느 전시장에서 이 약과판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양 대표는 약과판과의 재회에서 인연을 느꼈고, 안동의 어느 양반가에서 집안의 번영을 기원하는 소망을 담아 정성스레 찍어냈던 약과판은 결국 그의 품에 안겼다.
제주도가 고향인 양 대표는 제주도의 민속문화와 고미술품의 가치를 널리 알렸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제주문자도를 볼 수 있다. 육지의 문자도가 주로 중국의 고사에 얽힌 그림을 담아냈다면, 제주문자도는 화면을 위에서부터 세 면으로 분할한 3단 구성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3등분으로 나뉜 화면엔 각각 별도의 장면을 설정하는 등 제주문자도에만 있는 독특한 구성이 눈길을 끈다. 제주도에서 과거 사람들이 사용했던 단단한 나무 의자와 그릇 등도 설치됐다.
“비싸고 어려운 게 고미술? 손때 느껴지는 친근함이 매력”
이처럼 전시장에 설치된 고미술품은 먼 대상이 아닌 친근한 존재로 다가온다. 양 대표는 “사람들은 고미술품이라 하면, 유물로 대하며 어렵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궁중에서 쓰던 비싼 고급품 위주로 전시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어 “이 고미술품들도 가치가 있지만, 꼭 비싸고 화려한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이번 전시엔 보릿대로 만들어진 가방도 있는데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이 현 시대에도 거부감이 없이 잘 어울린다”며 “생각보다 우리의 삶을 둘러싼 고미술품이 많고, 이를 소개해 고미술과의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돌아보면 항상 고미술품과 함께 살았다. 아름다운 채화칠기 삼층장과 알반닫이엔 옷을 넣어 생활가구로 사용했고, 떡판은 식탁으로 썼으며, 찻잔도 사용했다. 집에 놀러온 사람들에게 ‘민속촌 같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며 “고미술품과 함께하다보면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의 구분이 생긴다. 박물관에 보관돼야 할 것은 잘 보존, 관리돼 자리를 찾아간다. 하지만 생활 속의 손때가 고스란히 담긴 것도 고미술품의 매력이다. 거기에 새로운 스토리가 생긴다. 고미술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우리 아름다움의 끝, 즉 정수”라고 말했다.
고미술품 초보 컬렉터를 위한 조언도 전했다. 양 대표는 “고미술품에 비싼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이고 저렴한 가격의 고미술품도 있다”며 “일단 관련 책을 보고, 책 속 고미술품을 직접 볼 수 있는 박물관을 가 많이 봐야 한다. 결국 관심을 가진 만큼 보인다. 나 또한 학생일 때 단순하게 예뻐 보이는 알반닫이를 샀는데 가품이었던 적이 있었다. 믿고 거래하며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과거엔 화려하고 비싼 고미술품을 사고파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값비싼 고미술품을 구매한 날은 불안해서 잠을 제대로 못 이루기도 했다”며 “지금은 고미술품을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염주함 또한 조형미부터, 본래 소장자는 어떤 마음으로 이 유물을 바라봤을지 그 마음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내 마음 속에 간직한 이 존재들이 바로 명품이다. 이 기쁨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은 “제주도 비바리 출신 양의숙은 사랑으로 우리 민예품을 찾아 그 가치를 캐고 닦고 엮어왔다. 신년을 맞이해 준비한 이번 전시의 컬렉션은 알짜배기 고미술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해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해야 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며 “가나문화재단은 우리 민예품 아름다움의 발굴과 그 현창에 앞장섰던 혜곡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안목을 기려 그의 탄생 100년이던 해에 전시와 함께 도록을 2016년 발간한 바 있다. 이번 양의숙의 미학 산문 발간 및 전시도 그런 관심과 노력의 일단”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전시기간과 맞물려 가나문화재단의 신소장품전도 가나아트센터 3전시장에서 함께 열린다. 2022년 한 해 동안 가나문화재단이 구입, 기증받은 작품들을 공개하는 전시로, 지난해의 ‘신소장품 2020-2021’에 이어 열리는 재단의 정기 전시다.
가나문화재단은 한국 근대미술 컬렉션의 보강과 확장을 위해 권진규의 작품을 구입, 기증받았으며, 50년대 박생광의 병풍 1점, 손응성과 변종하의 70년대 작품,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한국 초기 추상미술운동의 역사, 문미애의 83년 작품 2점도 수집했다. 또, ‘한국 현대미술 현장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2022년에도 동시대 작가의 대형 작품을 지속적으로 구입했다.
이번 전시에서 권진규의 ‘십자가 위 그리스도’를 비롯해 박생광의 ‘모란과 까치’, 김선우의 대작 ‘파라다이스 오브 도도(Paradise of Dodo)’, 임옥상의 90년대 작품 ‘자금성’ 등을 볼 수 있다. 가나문화재단 측은 “재단의 역할을 다시금 새기며 미술자산의 대중화와 공익화를 위해 작품 수집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